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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전설 1권(21화)
제7장 이별주(1)


1.

그날 밤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달은 미녀의 수줍은 자태처럼 구름에 반쯤 가려 교태를 부렸고, 별들은 그런 달을 질투하듯 서로의 반짝임을 뽐냈다.
바람은 너무 차갑지도 않게, 그러면서도 너무 따뜻하지도 않게 부드럽게 두 뺨을 어루만졌으며, 어렴풋이 들려오는 풀벌레들의 울음소리는 몽롱한 선율처럼 귓전을 파고들었다.
그날 밤.
화진은 세심정에 앉아 모처럼 무명과 조촐한 술자리를 가졌다.
둘 다 말은 별로 없었다. 언제나처럼 별다른 말이 없이, 둘은 그저 자연을 안주삼아 무명이 직접 빚은 술을 조금씩 음미했다.
단, 아무리 자랐어도 화무휘와 휘영은 아직 그들에게 있어 아이였다. 때문에 두 청년은 모옥 안에서 글공부를 하고 있고, 월하의 음주는 오직 두 명의 어른에게만 해당되었다.
그렇게 얼마나 달과 별과 술에 취했을까. 문득 화진이 무명에게 넌지시 물었다.
“아이들이 이곳에 온 지도 벌써 십 년이란 시간이 흘렀구려. 당신이 보기엔 두 아이의 성취가 어떻소?”
무명은 잔을 소반 위에 내려놓으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둘 다 자질은 훌륭합니다. 지금은 휘아가 조금 앞선 듯하지만, 영이도 무공의 출발이 상대적으로 늦은 것을 고려해 보면 절대 낮은 성취가 아닙니다. 솔직히 두 아이는 지금까지 제가 본 아이들 중에서도 최고의 자질을 갖고 있으며, 당장 하산하더라도 또래들 중에서는 당해 낼 녀석들이 별로 없을 겁니다.”
“허허허! 지나친 과찬이시구려. 부디 냉정하게 평가해 주시오.”
화진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싫지만은 않은 칭찬이었다. 하지만 그는 화무휘의 아비이기 앞서 화씨 가문의 가주였고, 따라서 단순한 칭찬일색이 아니라 질책도 함께 듣고 싶었다.
무명은 잠시 술잔을 내려다보며 고민했다. 그러다 이윽고 술을 한 모금 입에 털어놓고는 말을 이었다.
“우선 휘아부터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사실 휘아는 자질만 놓고 봤을 때는 아마 당신도 능가할 것입니다. 명가의 자제답게 기초도 제법 훌륭합니다. 아직 경험이 조금 부족합니다만, 이 또한 시간이 지나 연륜이 쌓이면 자연스럽게 보완될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너무 어려서부터 귀하게만 자란 탓에, 독기나 필살의 마음가짐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화진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사실 그건 녀석의 문제이기에 앞서, 내 불찰이오. 녀석은 너무 일찍 제 어미를 여의였소. 그래서 내가 너무 녀석을 감싸고만 돈 것 같소.”
“물론 녀석은 한번 빠진 것에는 무서울 정도로 집착하고 몰두하는 편입니다. 그러나 그 외의 것에서는 언제나 열정이 조금 부족지요. 만약 녀석이 그 무서울 정도의 집착과 몰입을 제어할 수 있다면…… 녀석은 당신의 예상보다 더더욱 발전할 것입니다.”
화진은 곰곰이 무명의 말을 되새겼다. 뛰어난 자질과 반대되는 약한 의지. 이는 여느 부잣집 도련님의 문제이기도 했지만, 장차 일문(一門)을 책임져야 하는 화무휘에게는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영이는 어떻소? 우리의 생각대로 휘에게 좋은 그림자가 될 것 같소?”
다시 화진이 묻자, 무명은 이번에도 잠시 술잔을 내려다보며 생각하다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녀석의 성격은 쉽게 말해, ‘영리하지만 영악하지 않다.’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늘 말수가 적고 차가운 척합니다만……. 녀석은 천성이 정이 많고 여리기 때문에, 약간은 고집이 센 휘에게 잘 맞습니다. 아마 세상에서 절대 악인이 될 수 없는 사람을 한 명만 꼽으라면, 전 주저 없이 녀석을 꼽을 겁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화진의 질문은 계속되었다.
“그것 참 다행이구려. 그렇다면 무공의 측면은 어떻소? 내가 봤을 때는 둘의 성취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소만.”
“영이도 타고난 자질은 휘 도련님 못지않게 뛰어납니다. 그러나 녀석은 너무 늦게 무공에 입문한 단점이 있습니다. 만약 삼 년만 더 일찍 내게 찾아왔으면, 녀석은 아마 지금보다 더욱 뛰어난 성취를 이뤘을 것입니다. 지금 당장이야 부족한 기초가 그다지 표시나지 않겠습니다만…… 앞으로 더욱 상승의 무공을 익히고 고수가 될수록, 녀석은 한계에 부딪히고 고민하는 시간이 휘아보다 길 것입니다.”
“안타깝구려. 하지만 녀석에겐 휘아가 갖추지 못한 것, 밑바닥의 삶을 경험해 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독기가 있소.”
다시 화진이 쓴웃음을 머금으며 말하자, 무명도 고개를 끄덕여 화진의 말에 동의했다.
“그렇습니다. 어떻게 보면 휘 도련님과 정반대지요. 비록 녀석은 부족한 기초로 인해 많은 좌절을 경험하겠지만, 절박함과 독기로 능히 그 좌절을 뛰어넘을 수 있을 겁니다.”
“외모는 똑같지만 성향이나 잠재력은 정반대군.”
화진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길게 탄식했다.
둘을 하나로 합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는 문득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마저 들었다.
다시 침묵이 흘렀다. 두 사람이 각자 두 아이의 장래에 대해 고민하는 동안, 술자리에는 자연스럽게 침묵만이 흐른 것이다. 물론 화진의 생각은 화무휘의 장래였고, 무명의 생각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휘영의 장래라는 차이가 있었지만.
한참 후, 화진이 화제를 바꿔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나저나 몸은 어떻소? 여전히 차도가 없으시오?”
무명은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쓰게 대답했다.
“아시지 않습니까? 아마 길어야 이삼 년? 설사 화타가 살아 돌아온다고 해도 제 몸은 회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 때문에 미안하구려. 정말 다른 방법은 없소?”
“제 몸은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림자 무공’을 선택했던 순간부터…… 이미 어느 정도는 예견하고 있었던 일 아닙니까?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저 아이들의 성장을 두 눈으로 끝까지 보지 못하는 게 아쉬울 따름입니다.”
무명은 죽음이 아무렇지 않은 듯 덤덤하게 대답했다.
다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그 침묵은 분위기에 취한 처음의 침묵과는 그 성격이 전혀 달랐다.
자신으로 인해 상대가 죽음에 이르게 됐다는 자책감, 그리고 더 이상의 희망을 포기한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인해 흐르는 무거운 침묵이었다.
한참 후, 화진은 긴 한숨을 내쉬더니,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무명에게 내밀었다.
“그때도 말했지만…… 최근 ‘대업’이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소.”
이 말과 함께 그가 내민 것은 금박으로 포장한 세 개의 작은 단약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청아한 향기가 진동을 했는데, 그 향기만 보더라도 보통 영약은 아닌 것 같았다.
“역시 ‘그 일’이 이제 마무리 단계에 이른 것입니까?”
무명이 단약을 받아들며 은근한 어투로 되물었다.
“그렇소. 이제 우리 화씨 가문이…… 무림 역사의 중심에 설 날도 머지않았소!”
자신만만한 단호한 대답!
그리곤 화진은 단숨에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화씨 가문의 영광을 위하여…….”
무명도 상대를 향해 가볍게 술잔을 들어 올리며 대꾸했다. 단, 상대와 달리 어쩐지 허무함마저 깃든 것 같은 어투였지만.
화진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아까 휘아에게 언질은 했소만…… 휘아는 내일 나와 함께 화검장으로 돌아갈 것이오. 그리고 앞으로 삼 년간, 은밀히 폐관수련을 할 것이오.”
“화씨 가문의 주인만이 깨우칠 수 있는 천무십이검의 비전 절기. 마지막 두 개의 수법을 가르치려는 것입니까?”
“그렇소. 아직 여러 가지로 미숙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천무십이검의 진정한 오의를 접하기에는 충분하오.”
“휘아가 벌써 ‘그때’가 되다니…… 허면 영이도 드디어 ‘그때’가 되었단 말씀이십니까?”
다시 무명이 은근한 어투로 물었다.
화진은 대답 대신 잠시 넘실거리는 술잔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침묵은 잠시. 그는 이내 단숨에 술잔을 비우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소. 드디어 때가 무르익었소!”
“……!”
“그대에겐 늘 미안한 생각뿐이오. 그러나 이것이 그대에게 하는 마지막 부탁이오. 앞으로 삼 년! 삼 년 안에 휘영에게 그림자 무공을 전수해 주시오!”
무명의 마지막 임무!
“알겠습니다. 휘영을 반드시 제 마지막 역작으로 만들겠습니다.”
재차 술을 한 모금 들이켠 뒤, 무명도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때, 겉으로는 단호한 척하는 무명의 눈가에는 알 수 없는 묘한 망설임이 스며 있었다.
휘영에게 그림자 무공을 전수할 수 없다는 자신감의 결여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신의 비전 절기를 전해 주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나 미련도 아니었다.
휘영에 대한 애잔한 마음!
그것은 자신과 같은 길을 걷게 될 휘영에 대한 연민과 동정, 그리고 미안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