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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전설 1권(22화)
제7장 이별주(2)
2.
언젠가 화무휘는 휘영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영! 아무리 봐도 넌 거지가 아니다. 어째서 시장에서 구걸이나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네 녀석은 정말이지 뼛속부터 강호의 무사다!”
화무휘는 몇 번이나 휘영의 무공에 대한 진지함과 열정에 혀를 내둘렀다.
휘영은 마치 수도승 같았다.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오직 무학(武學)뿐이었고, 무학을 위해서라면 한 치의 주저함도 없었으며, 때로는 집요할 정도의 치열함과 집념마저 내비쳤다.
그날도 이러한 수도승의 일상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화진이라는 강호의 절세 고수와 비무를 한 아주 특별한 날이었기 때문에, 그날은 평소보다 더더욱 무공에 대한 집념을 불태웠다.
늦은 밤.
휘영은 허름한 모옥 안에 홀로 정좌한 채, 지그시 눈을 감고 낮의 비무를 복기하고 있었다.
―만약 이때 이렇게 대응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만약 이 장면에서 위치를 다른 방향으로 바꿨다면 어떻게 됐을까?
비록 혼자만의 상상이었지만, 그는 그 상상 속에서 수십 번이나 화진과 치열한 대결을 펼쳤다.
물론 아무리 상상이라고 해도 승자는 언제나 화진이었다. 어떤 방법을 써도 그는 화진의 검세를 뚫을 수 없었고, 오히려 도전을 할수록 압도적인 실력의 차이만 절감했다.
그러나 그는 상상 속의 비무를 통해 자신의 약점을 보완했고, 자신의 부족한 실전 경험을 보충했으며, 무엇보다도 화진과의 간격을 조금씩 줄여 나갔다.
그런데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비무의 삼매경에 빠져 있었을까.
“영! 또 무공에 대해 고민하는 거냐? 그래도 오늘은 기념비적인 날이 아닌가? 오랜만에 술이라도 한잔 어때?”
문이 벌컥 열리며 화무휘의 목소리가 그의 상념을 깼다.
눈을 떠보니 문가에 기대어 서 있는 화무휘가 보였다. 어디서 구했는지 한 손에는 작은 술병을 들고 흔들면서. 그리곤 그는 휘영과 눈이 마주치자 장난스런 표정으로 한쪽 눈을 찡긋했다.
솔직히 휘영은 술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술은 무학에 방해가 된다하여 냄새조차 맡는 걸 꺼려했다.
그러나 휘영은 화무휘의 술을 거절하지 않았다. 일단 화무휘가 순순히 남의 말을 듣고 물러설 성격이 아닐뿐더러, 화무휘가 갑자기 술을 제안한 것엔 뭔가 다른 의도가 있을 것이라고 직감한 탓이었다.
“휴! 알겠습니다.”
결국 휘영은 짧게 한숨을 내쉰 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모옥을 나왔다.
화무휘가 데려간 곳은 먼 곳이 아니었다.
모옥의 지붕.
그는 한 차례 날렵한 몸놀림으로 사뿐히 지붕에 올라간 뒤, 그 자리에 편히 걸터앉았다. 그리곤 웃으면서 손짓을 해, 약간은 어리둥절한 휘영을 옆자리에 앉혔다.
“겨우 여기입니까?”
잠시 후, 자리에 앉은 휘영이 조금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화무휘는 씨익 미소를 지으며, 특유의 넉살 좋은 어투로 말했다.
“여기가 어때서? 이 정도면 제법 운치 있지 않나?”
“그래도 안주도 없는 건 조금 너무하지 않습니까?”
“안주는 밤하늘의 별과 달이다. 너무 많이 먹으면 체할 수도 있으니 적당히 먹으라고. 하하핫!”
화무휘는 재차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곤 술병의 마개를 열고 휘영에게 술병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휘영은 가벼운 목례와 함께 순순히 술병을 받아들었다.
솔직히 휘영은 주도(酒道)에 대해서는 완전히 문외한이었다. 원체 술에 관심이 없을뿐더러, 체질상으로도 술을 조금만 마셔도 온몸이 빨개졌기 때문이다.
‘이걸 마셔도 될까?’
그는 알싸한 독주 특유의 향기에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이윽고 질끈 눈을 감고 술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커헉!”
목구멍이 화끈해지며 비명과 탄성이 뒤섞인 헛기침이 절로 터져 나왔다.
“하하핫! 술 못하는 건 여전하구나!”
그런 그를 바라보며 화무휘가 배를 잡고 웃었다. 그러다가 그는 뺏듯이 휘영의 손에서 술병을 받아든 뒤, 지그시 눈을 감고 여유롭게 술을 음미했다.
화무휘와 휘영은 외모만 같을 뿐, 성격이나 성향은 정반대였다. 서로 극단적이라고 할 정도로 반대되는 면이 많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지금 보이고 있는 술에 대한 반응이었다.
사실 화무휘가 지붕을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귀곡에서 술을 마실 수 있는 장소는 지붕이나 폭포 옆의 정자가 고작이었는데, 화진과 무명 스승이 정자에 앉아 한창 술을 주고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유야 어쨌건 지붕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물론 주로 술을 마시는 쪽은 화무휘였고, 휘영은 어쩌다가 겨우 혀끝을 축이는 정도였다. 그러나 선선한 바람, 영롱히 반짝이는 밤하늘의 달과 별, 그리고 어디선가 울어대는 벌레들의 울음소리는 음주의 여부와 상관없이 감상에 젖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얼마나 각자의 상념에 빠졌을까. 문득 화무휘가 소매로 쓰윽 입가를 훔치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이렇게 같이 술을 마시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군. 우리가 처음 몰래 술을 마셨을 때를 기억하나?”
“당연히 기억하고 있지요. 어떻게 그때를 잊을 수 있겠습니까?”
“하긴.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몇 년간 이 산중에서 수련을 한 게 더 신기한 일이었지.”
그때를 떠올리자 화무휘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머금어졌다. 그리고 좀처럼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휘영도 실로 오랜만에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열네 살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난생처음으로 술이라는 어른의 세계를 접했을 때는.
모든 십 대의 청소년들이 그렇듯, 화무휘와 휘영도 사춘기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가장 자유로울 십 대를 귀곡에서 엄격한 수련으로 보냈다. 때문에 두 소년은 다른 또래보다 더욱 강렬한 사춘기의 방황을 경험하게 되었다.
자유에 대한 갈망!
이때 두 소년의 염원은 바로 자유였다.
―단 며칠이라도 좋다. 언제나 똑같은 고된 수련의 일상에서 벗어나, 단 며칠만이라도 밖으로 나가 자유를 만끽하고 싶다!
무명 스승이 엄하게 그들을 가르치면 가르칠수록, 역설적이게도 자유에 대한 갈망은 더욱 커졌다. 특히 천성이 자유롭고 유복하게 자란 화무휘는 수도승 같은 수련의 시간을 버티기에 더더욱 힘들었다.
햇살이 따사로운 삼월의 봄날.
결국 두 소년은 단 며칠이나마 귀곡의 탈출 계획을 세우기에 이른다.
귀곡을 에워싸고 있는 진법을 파훼하는 특별한 방법을 발견한 건 아니었다. 어차피 진법이란 사람의 오감을 속이는 환상. 때문에 둘은 가장 확실하면서도 가장 무모한 방법으로 귀곡에서의 탈출을 계획했다.
방법은 단순했다. 둘은 우선 실을 몇 겹이나 꼬아서 질긴 실타래를 만들었다. 그런 뒤, 한 명이 실 끝을 단단히 잡고 있는 동안, 다른 한 명이 실을 들고 천천히 진법에 진입했다. 만약 제대로 된 길을 찾으면 다행이요, 길을 잃어버리면 다시 실을 따라 돌아오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물론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제대로 걸은 것 같은 데도 빙빙 돌기도 했고, 어떤 때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기도 했다. 그러나 실패에 대한 좌절감보다는 자유를 만끽하자는 사춘기의 열망이 더욱 간절했고, 결국 두 소년은 탈출에 성공했다.
무려 한 달의 시간이 소요되긴 했지만, 마침내 두 소년들은 답답한 귀곡을 벗어난 것이다.
그렇다고 뭔가 대단한 경험을 한 것은 아니었다. 낙양의 야시장을 돌아다니며 군것질을 하거나, 아니면 지나가는 사람들의 활기를 신기한 듯 구경한 게 전부였다. 하지만 몇 년을 적막한 귀곡에서 보낸 두 소년은 일상의 작은 활기들이 모두 낯설면서도 즐거웠고, 단순히 좋다는 말로도 부족해서 가슴이 크게 설랬다.
둘이 처음으로 술을 접한 것도 이때였다.
“아마 취선루(醉仙樓)라는 술집이었지요?”
휘영이 미소를 머금으며 그때를 상기시켰다.
“그랬지. 낙양에서 제일 잘나가는 술집이었으니까. 그때는 왜 그리 어른 흉내를 내고 싶었는지원.”
화무휘도 엷은 미소를 지으며 그때를 떠올렸다.
취선루는 하루 술값만 해도 금자 수 냥에 이르는 최고급의 주루이다. 때문에 휘영을 비롯한 일반인들은 그 입구에서부터 주눅이 드는 게 일반적이었다.
“너흰 뭐냐? 여긴 너 같은 애들이 함부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점원도 둘을 훑어보며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낙양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귀하게 자란 화무휘였다. 그는 작은 어린이용 비취 반지를 탁하고 거칠게 탁자 위에 올려놓은 뒤, 두 다리를 탁자 위에 걸치며 거만하게 말했다.
“내 오늘은 급히 오느라 옷도 남루하고 수중에 돈도 별로 없다만……. 이 정도면 한 끼 밥값은 충분히 하고도 남을 것이다. 아마 이곳 취선루의 장기가 제비요리였었지? 당장 최고급 관연으로 연자탕과 건패(乾貝:조개 기둥을 말린 요리), 대해미(大海米:껍질을 벗겨서 말린 새우 요리)를 가져오너라. 너무 싱거운 건 싫으니 조금 짜고 달아야 되며…… 만약 조금이라도 하품의 요리가 나온다면 당장 네 녀석을 경을 칠 것이다. 아, 최소한 십 년 이상 묵은 적순주(赤荀酒)도 있으면 한 병 내오고.”
취선루의 제일 철칙은 ‘손님이 왕이다.’였다. 게다가 화무휘가 옷은 남루해도 그 태도가 여느 부잣집 도련님보다 훨씬 당당했다.
“아이쿠! 소걸님들을 몰라 뵈어 죄송합니다! 소인이 잠시 눈이 멀었던 것 같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수석 숙수에게 명하여 당장 최고급의 요리를 진상하겠습니다!”
점소이는 대번 허리를 직각으로 굽히고 큰 소리로 요란을 떨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토록 위풍당당하게 도전했던 어른들의 세계는 쓰디쓴 실패로 끝났다. 적순주는 소년들이 마시기에는 너무 독했고, 그들의 입맛 또한 아직까지는 최고급 요리보다 달달한 사탕이 더 좋은 어린아이의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일탈에 대해 무명 스승은 크게 화를 냈고, 둘은 하루 밤낮을 꼼짝도 않고 무릎을 꿇어서야 겨우 용서를 받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