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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전설 1권(23화)
제7장 이별주(3)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웃기지도 않은 일종의 치기였다.
“그런데 술이 변한 걸까? 아니면 자신이 변한 걸까? 그토록 쓰게만 느껴지던 술이 지금은 너무 달게 느껴지는구나.”
화무휘는 재차 술을 한 모금 들이켜곤, 감상에 빠진 어조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잠시 후, 그는 엷은 미소를 머금은 채 휘영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 이 갑갑한 곳에서 미친 듯이 수련에만 정진하다니…… 장차 꿈을 펼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경험이었지만, 동시에 이젠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휘영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단 한 번도 불평을 한 적은 없었지만, 사실 그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이 힘들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다시 화무휘는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휘영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내가 몇 번이나 말했지만……. 너와 난 주종이기 이전에 형제다. 십여 년 전, 네가 날 구해 준 순간부터 난 언제나 네게 감사하고 있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형제보다 더 질긴 운명의 끈으로 묶인 사이다.”
“어찌 그런 말씀을…….”
휘영은 짐짓 송구한 듯 말끝을 흐렸지만, 화무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더욱 단호히 말했다.
“아니. 이곳에서의 수련만 해도 그렇다. 만약 네가 없었다면, 난 이곳에서의 생활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난 네게 의지하고, 네게 위로를 받았으며, 때론 너로 인해 자극을 받은 덕분에 무사히 수련을 마칠 수 있었다.”
“그건 제가 드리고 싶은 말입니다. 만약 휘님이 안 계셨더라면, 저도 이곳에 갇혀 십 년을 버티지 못했을 것입니다.”
휘영도 엷은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만큼은 진심이었다. 비록 화무휘의 그림자라는 굴레 때문에 고민한 적도 많았고, 또 속성으로 익힌 천무심결의 부작용으로 인해 괴로워한 적도 많았다.
그러나 화무휘는 자유분방하고 오만할지언정 언제나 진심으로 휘영을 대했고, 이것은 휘영에게 있어서도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애증의 관계.
‘차라리 화무휘가 미워할 수밖에 없는 악인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나도 이 그림자의 운명을 원망하며,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을 텐데…….’
휘영에게 있어 ‘화무휘’란 마냥 원망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마냥 좋아할 수도 없는 복잡한 이름이었다.
그런 그의 생각을 아는 걸까, 모르는 걸까. 화무휘는 더욱 진심 어린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난 내일 이곳을 떠날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배운 것은 천무십이검의 열두 수법 중에서 열 가지일 뿐. 그래서 나머지 수법을 익히기 위해, 난 내일부터 다른 곳에서 삼 년간 폐관수련을 할 예정이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그는 몇 번이나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아닙니다. 천무십이검의 최종 절기는 대대로 화씨 가문의 가주에게만 전해 내려오는 비전입니다. 그런 중요한 것은 휘님만 익히는 것이 당연합니다.”
휘영이 오히려 고개를 가로저으며 화무휘를 위로했다.
솔직히 휘영도 나머지 두 개의 수법에 대한 욕심이 없다면 거짓말이었다. 배우는 게 어렵다면 천무십이검의 최종 절기가 무엇인지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고 싶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때의 휘영은 자신의 신분과 한계에 대해 분명히 자각하고 있었고, 또 자신의 생각을 내면으로 갈무리하는 데 능숙했다.
아무튼 그제야 화무휘는 다시 술을 한 모금 들이켠 뒤, 다소 밝아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렇게 이해해 주니 고맙다. 그러나 너도 이것으로 수련이 끝난 건 아니다. 너 또한 무명 스승님의 무공이 우리 화씨 가문의 무공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는 것은 이미 느꼈을 터. 아마도 무명 스승님은 우리가 모르는 다른 무공을 알고 계실 테지. 그러니 내가 천무십이검의 최종 절기를 익히는 동안, 너도 이곳에서 무명 스승님의 진짜 무공을 익혀야만 한다!”
그는 힘주어 강하게 말했다. 그리곤 이어서 금박으로 포장된 세 개의 단약을 내밀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휘영은 조심스럽게 단약을 받아들면서도 언뜻 정체를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했다.
화무휘는 약간은 미안함이 섞인 듯한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건 우리 화씨 가문의 비전인 천룡단이다.”
“천룡단?”
“그래. 넌 무공을 시작한 나이가 조금 늦은 탓에, 천무심결을 속성으로 익혀야만 했다. 그래서 매년 정기적으로 기혈이 뒤틀리고 내공이 통제를 벗어나는 부작용을 겪고 있지. 만약 발작이 나타나면 그 약을 복용해라. 비록 그 약이 내공을 증진시켜 주거나 상처를 치유해 주는 효능은 없지만, 통제를 벗어난 천무심결을 다스리는 데에는 즉효다.”
“아!”
그제야 휘영은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며 단약을 소중히 품에 갈무리했다. 약간은 감격에 젖은 표정으로.
바로 이런 면이었다. 계산된 것인지, 아니면 순수한 의도인지는 몰랐다. 어쨌거나 화무휘는 일단 자신이 인정한 것은 끔찍이 아꼈고, 이로 인해 휘영은 그를 단순히 원수로만 여길 수가 없었다.
화무휘의 말은 계속되었다. 이어서 그는 휘영의 두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처음 만난 이후 이렇게 오랫동안 떨어지게 되는 건 처음이구나. 그러나 앞으로 삼 년! 삼 년만 더 참고 수련을 견뎌 내자! 그리고 이 인고의 시간이 끝났을 때, 우리 화씨 가문의 부귀는 물론이고 강호의 모든 영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 화무휘가 혼자 아닌…… 너와 나, 우리 모두를 위한 강호가……!”
처음엔 비교적 잠잠한 어투였다. 그러나 점점 흥분과 격정으로 높아지더니, 나중에는 선언을 하듯 단호함마저 엿보였다.
“우리의 강호……! 우리의 시대……!”
휘영도 상대에게 동화된 듯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8장 그림자 무공(1)
1.
쏴아아아!
부드러운 봄비가 아침부터 나긋한 속삭임처럼 귀를 간질였다. 겨우내 메말랐던 대지도 모처럼 기지개를 켜며 봄을 맞이했고, 또한 수련으로 인해 메말랐던 휘영의 가슴도 그 빗줄기로 인해 따뜻하게 젖어 왔다.
“이제 봄인가?”
감정이 메마른 무명 스승마저도 약간은 감상에 빠진 표정으로 봄비를 바라보았다.
단 하루 만이지만 귀곡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우선 화무휘가 떠났다. 그가 만들어 내던 부산함과 활기도 떠났다. 그에게 일정 부분 의지하던 휘영의 위안도 함께 떠났고, 대신 귀곡에는 말수가 적은 두 사제가 만드는 어색한 침묵만이 남았다.
두 사제는 작은 다과상을 가운데에 하고 세심정에 마주 앉았다.
공허함이 깃든 정적.
스승은 한 명의 제자를 떠나보낸 공허함으로 인해, 그리고 제자는 의지하던 벗을 떠나보낸 공허함으로 인해, 둘은 말없이 그저 하염없이 내리는 빗줄기만 바라보았다.
그러나 언제까지 감상에 젖을 수만은 없었다. 둘 다 한가로운 상황은 아니었고, 또한 앞으로 남은 삼 년이란 시간도 결코 긴 시간이 아니었다.
잠시 후, 무명 스승이 먼저 정색을 하고 휘영에게 물었다.
“영아. 너도 천무십이검의 최종 절기를 익히지 못하는 것이 억울하냐?”
그제야 휘영도 감상에서 깨어나, 본래의 무덤덤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가주에게만 전수되는 비전 절기를 탐하겠습니까? 전 제 본분과 한계를 잘 알고 있습니다.”
너무도 담담한 대답.
“그 말이 정녕 진심이더냐?”
다시 무명 스승이 낮지만 날카로운 어조로 물었다.
휘영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앞에 놓인 차를 마시며 여전히 담담하게 대답했다.
“제게 지나친 화가 불행을 부른다고 가르쳐 주신 건 스승님이십니다.”
무명 스승은 더욱 날카롭게 휘영을 살폈다. 그러나 이윽고,
“역시 너와 휘는 같은 외모이면서 정반대의 성격이구나. 휘아는 솔직하고 자신의 감정 표현이 충실한데 반해, 네놈은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구나.”
무명 스승은 가볍게 웃었다. 그리곤 적당히 식은 차로 입술을 축이고 말을 이었다.
“그러나 섭섭해할 필요는 없다. 아니, 정확히는 섭섭해할 시간이 없다고 하는 편이 옳겠지. 앞으로는 지옥처럼 느껴질 정도로 더욱 힘든 수련이 기다리고 있다. 후후후!”
그 말을 들은 휘영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본래 무명 스승은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그에게 무공을 전수해 줄 때도 언제나 말 대신 시범을 몸소 보이고, 그다음에야 간략하게 요점만 설명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한가로이 빗줄기를 바라보며, 이렇게 한담을 하고 있었다.
‘스승님의 무공이 화씨의 것과 같으면서도 뭔가 다르다는 것은 나 또한 진작부터 느끼고 있었다. 다만 그 차이점 정확히 무엇인지 확실히 말할 수 없었을 뿐. 대체 스승님은 무엇을 가르쳐 주시려는 걸까?’
다행히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잠시 후, 무명 스승이 표정을 바꿔 그에게 진중하게 질문을 던진 것이다.
“하나 묻겠다. 만약 열 살 먹은 아이와 화 대가주가 검을 겨룬다면 어떻게 될 것 같으냐?”
“그야 당연히 아이는 화 대가주님의 옷깃조차 건들 수 없을 것입니다.”
휘영은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공손히 대답했다.
“만약 화 대가주님께서 평범한 삼재검법만 사용하고, 반대로 그 아이가 정말 뛰어난 재능을 지녀 천무십이검을 대성한다면? 그러면 승부가 어떨 것 같으냐?”
“그래도 아이는 화 대가주님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어떤 무공을 익혔느냐도 중요합니다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공을 사용하는 것이 누군가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아이가 천부적인 재능이 뛰어나고 해도…… 화 대가주님에 비하면 기본적인 힘과 내공에 있어 비할 바가 못 됩니다.”
“잘 아는구나. 그런데 또다시 만약에 말이다. 그 아이가 비록 아이의 몸이지만, 일시적으로나마 화 대가주님과 맞먹는 힘과 내공을 갖게 된다면 어떨 것 같으냐? 아니, 일시적으로 힘과 내공이 화 대가주님을 뛰어넘는다면?”
“…….”
그제야 휘영은 쉽게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물론 경험은 여전히 아이가 화진에 비해 부족할 것이다. 그러나 사용하는 무공의 위력이 다르고, 또한 힘과 내력마저 화진을 능가한다면, 상대가 아무리 아이라도 쉽게 승부를 예측할 수 없을 것이다.
휘영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무명은 그런 휘영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엷은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너도 아마 내 무공이 화씨의 무공과 뭔가 다르다는 것은 이미 진즉에 감지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정확히 어떤 점에서 다른지, 확실히 말로 설명할 수 없어 답답했겠지.”
“그렇습니다.”
휘영은 고개를 끄덕여 순순히 시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