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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악교관 1(4화)
Chapter 1 과거(4)
나는 죽을 정도의 부상을 입었고 제갈세가 남자는 죽었다.
만족스러웠다.
“망해 버려라. 저주 받을 제갈세가여!”
어차피 나도 죽을 몸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붉은 하늘이 아닌 푸른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아름답구나.
웃으며 마지막을 장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세상이 다시 붉어졌다.
푸욱!
어라?
섬뜩한 소리에 비해 통증은 없었다. 대신 왼쪽 가슴에 거북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고개를 내렸다. 삐죽 튀어나온 검날이 보였다.
어차피 죽을 몸인데 이렇게 확인 사살을 해 주다니. 나는 이 친절한 행위를 한 인물이 궁금해졌다.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유환이었다. 그는 비열한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자네 덕분에 한몫 크게 벌겠어. 버러지 같은 오랑캐 새끼지만 불쌍해서 만나 줬더니 이런 복이 찾아왔네그려. 지금까진 자네를 그저 멍청한 부하 정도로 여겼는데 마지막 가는 길이니 친구로 불러 주겠네. 잘 가게, 친구. 클클.”
이러니까 낭인들이 쓰레기 소리 듣는 거다. 유한아.
그래도 잘 왔다. 혼자라서 조금 쓸쓸했거든. 저승길을 친구와 함께 가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같이 가자. 망할 친구 자식아.
나는 왼손으로 유한의 머리를 쥐었다. 힘을 주었다. 마지막 남은 내공을 모두 손에 모았다. 유한의 머리가 두부처럼 바스러졌다. 이제 나의 몸에는 한 톨의 내공도 남지 않았다.
내공으로 막고 있던 상처가 벌어지며 온몸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나의 몸은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때.
나의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가 빛을 발했다.
나는 정신을 잃었다.
그곳은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이었다.
순백의 색만이 존재하는 곳.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존재하는 곳.
그렇기에 인간이 인지함을 허락받지 않은 곳.
질서는 어그러지고 혼돈만이 가득했다.
아마도 점쟁이 노인에게 받았던 목걸이 때문인 것 같았다.
죽기 직전의 순간, 빛과 함께 나는 이곳으로 이동했다.
목걸이는 이곳으로 오는 순간 나에게 하나의 지식을 넘겨주고 사라졌다.
원래라면 죽어야 했을 내가 아직 살아 있었다.
아니, 살아 있다고 하기에는 조금 이상한 상태였다.
나의 생명은 정지해 있었다.
죽기 직전의 상태 그대로 나는 존재하고 있었다.
이곳에 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나의 내공 속에 잠들어 있던 독기가 폭발했다.
그 독기는 나의 생명을 수십 번은 앗아 갈 정도로 지독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의 생명은 고정되어 있었다. 고통은 엄청났지만 나는 죽지 않았다.
독기는 폭발 후 사라졌지만 그 폭발이 나에게 남긴 것은 아주 컸다.
폭발하는 힘에 의해 내공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내공은 천마심법의 구결에 따라 도도히 흘렀다.
시간이 흘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르겠다. 무수한 시간 동안 운기하며 나는 천마심법에서 이상한 부분을 찾을 수 있었다.
제갈세가에서 일부러 그렇게 바꾼 건지 아니면 원래부터 잘못되어 있던 건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대로 심법을 외우면 이성을 잃고 마인이 되는 것은 확실했다.
나는 조금씩 천마심법을 수정했다.
심법 자체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니 몸으로 때울 수밖에 없었다.
주화입마에 걸리고 남을 일이었지만 나는 감행할 수 있었다. 나의 생명이 정지해 있었기 때문이다. 고통은 느꼈지만 죽지도 미치지도 않았다.
나는 수없는 시행착오 끝에 천마심법의 문제점을 모두 수정했다.
그 순간 나는 하나의 벽을 깨뜨렸다.
드디어 극마의 경지에 올라선 것이다.
극마에 올라서는 순간 나는 하나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지독하게 느렸지만 경지가 올라가며 예민해진 감각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나는 흐름이 향하는 곳으로 움직였다.
그곳에 있는 것은 빛이었다.
나는 잠깐 고민했다. 하지만 결정은 이미 나 있었다.
이곳에서 영원히 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빛을 통과했다.
내가 눈을 뜬 곳은 아샤하르나라는 곳이었다.
중원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였다.
적월, 청월, 한월.
세 개의 달이 떠 있는 세계.
인권이라는 개념은 전무했다. 힘을 가진 자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무법의 세상이었다. 역설적이게도 그 때문에 나는 이 세상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충분한 무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곳의 생활에 익숙해지고 말을 거의 다 배울 때쯤, 나는 하나의 문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천마심법은 피를 탐하는 무공이었다.
비록 문제점을 수정했다고 하지만, 그건 오류를 잡아낸 것. 피를 탐하는 마공 본연의 성격을 없앤 것은 아니었다.
평온한 생활을 할 순 없었다. 살기가 다시 나를 지배해 혈마귀로 돌아갈 것만 같았다.
나는 전쟁터로 향했다.
굳이 직접 싸울 필요는 없었다. 전장에 서 있기만 해도 나는 피에 대한 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참을 수 없을 때면 직접 피를 보기도 했다. 그때 나의 모습을 본 자들은 공포에 떨었다.
그렇게 나는 전장에서 20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나는 탈마의 경지에 올라섰다.
더 이상 피에 대한 갈증은 없었다. 피를 보며 살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어차피 할 줄 아는 것이 칼질이니 적당히 동급(Copper) 용병으로 행세하며 살 생각이었다.
20년간 모은 돈은 넉넉했다. 높은 등급의 의뢰를 받아 주목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나는 전장을 떠나 여기저기를 떠돌았다.
평화로운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놈을 만날 때까지는…….
Chapter 2 조슈아 헤밀라스(1)
고즈넉한 밤이었다.
여름 밤하늘의 제왕. 일곱 성좌의 주인. 군왕 그류나드.
그류나드는 여름 7월에서 9월 사이에만 보이는 특별한 별이었다. 그 특별함은 바로 밝음이었다. 그류나드는 천공의 중심에서 3개의 달보다 더욱 밝은 빛을 세상에 비추고 있었다.
신화 속에서 그류나드는 가장 위대한 정복자이며, 동시에 가장 강한 기사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류나드는 모든 기사를 꿈꾸는 이들이 바라는 이상향이기도 했다.
그류나드의 밝은 빛은 밤뿐만 아니라 낮에도 그류나드를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밤에 비해 희미하긴 하지만, 하늘의 중간에서 약하게 빛나는 하나의 점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 세상 아샤하르나에는 하나의 격언이 전해져 왔다.
‘위대한 기사가 되고 싶다면 그류나드의 아래에서 수련에 정진하라.’
그류나드가 떠 있는 시기는 가장 더울 때, 게다가 낮과 밤을 가리지 않는다. 그류나드의 아래에서 수련하라는 말은 잠을 자는 시간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아무리 더워도 쉬지 말고 수련에 임하라는 뜻이 담긴 말이었다. 물론 실제로 행하기는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여기에 그류나드의 아래에서 수련에 정진하는 자가 있었다.
나이는 17, 8세 정도 되었을까? 감색 머리칼과 눈동자가 부드러운 인상을 주는 소년이었다. 좁은 어깨와 가늘고 긴 팔다리. 무인보다는 문인에 더 어울리는 체격이었다.
소년의 이름은 조슈아 헤밀라스.
조슈아는 수련을 위함인지 허름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 옷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조슈아가 얼마나 열심히 수련하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 주는 모습이었다.
붕. 붕. 붕. 붕. 붕.
양손에 들린 묵직한 목검이 파공음을 내며 허공을 내리그었다. 벌써 두 시간째였다.
그 노력하는 자세는 충분히 칭찬해 줄 만했지만, 아쉽게도 동작 자체는 그리 좋지 못했다.
실상 조슈아의 검법 실력은 그리 좋지 않았다. 노력을 열심히 해 또래에서 중간 정도의 실력은 되지만 그것이 한계였다. 조슈아의 검법에 대한 재능은 평범했다. 하지만 조슈아는 검법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조슈아의 가문인 헤밀라스 남작가는 원래는 유명한 기사 가문이었다. 하지만 100년 전부터 세가 기울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영지마저 없는 이름뿐인 귀족의 처지가 되었다. 그런 가문을 다시 살리기 위해 조슈아의 아버지인 헤밀라스 남작은 불철주야 노력했고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조슈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이내 방울져 뺨을 타고 흘러 내렸다. 조슈아는 옷으로 아무렇게나 눈물을 닦은 후 중얼거렸다.
“아버지. 아버지가 못 이룬 꿈. 제가 이루겠습니다. 하늘에서 지켜봐 주십시오.”
헤밀라스 남작은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의 경지에 올랐다. 전장에서의 공도 많아 이번에 돌아오면 영지를 받을 거라 했다. 그게 한 달 전에 받은 편지의 내용이었다. 그리고 오늘 낮에 조슈아는 헤밀라스 남작의 사망 통지서를 받았다.
조슈아의 어머니는 그가 어릴 적에 병으로 죽었다. 형제자매도 없었다. 조슈아는 천애고아가 된 것이었다.
조슈아는 다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연습은 그 후로 1시간이나 계속되고서야 끝이 났다.
조슈아가 현재 머무는 곳은 수도 외곽에 위치한 집이었다. 수도지만 워낙 외진 곳이라 땅값 자체는 그리 비싸지 않았다. 작은 집이었지만 마당도 있어 검법을 연습하기 좋았다. 조슈아가 검을 휘두르던 곳도 이 마당이었다.
조슈아는 검을 휘두르던 것을 멈추었다. 체력이 많이 고갈되었지만 그 때문에 멈춘 것은 아니었다. 집 주변으로 여러 개의 인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조슈아는 호흡을 가다듬고 대문을 직시했다. 야밤에 무리를 지어 찾아온 자들의 의도가 의심스러웠다.
끼이익!
낡은 철 대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안으로 들어온 자들은 다섯 명의 험상궂은 사내들이었다. 말투 또한 얼굴과 마찬가지로 험했다.
“어이. 꼬마. 네가 조슈아 헤밀라스인가 하는 놈 맞나?”
조슈아는 겁이 났지만 마음을 다잡고 의젓하게 외쳤다.
“감히 평민 주제에 귀족을 능멸하느냐? 뚫린 입이라고 말을 막 하는구나. 법이 두렵지 않느냐?”
불청객들은 평민으로 보였다. 자신은 귀족이니 적당히 위협하면 물러갈 거라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처음 말을 꺼냈던 남자가 조슈아의 말을 비웃었다.
“크큭. 귀족? 남작이 귀족인가? 꼬마. 아직 네 처지를 잘 모르는 것 같군. 헤밀라스 남작이 죽었다는 말을 듣지 못한 건가?”
조슈아도 오늘 들은 이야기였다. 그런 일을 전혀 모르는 자들이 벌써 알고 있는 것이었다. 의아함을 느껴야 하겠지만, 조슈아는 그것까지 생각하지는 못했다. 단지 자신의 아버지를 비웃는 것 같아 화가 날 뿐이었다.
“닥쳐라!”
“어이. 아직 상황 파악을 못한 건가? 네놈은 이제 끈 떨어진 신세란 말이다. 네놈을 비호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모시는 분이 네놈이 더 이상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을 원치 않는다.”
“무, 무슨 말이냐!”
남자가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까불면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꼬마야.”
조슈아는 와락 겁이 났다. 비록 검을 잡고 수련을 한다고 하나 조슈아는 아직 세상 경험 없는 풋내기였다.
조슈아는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최대한 위협적인 말을 내뱉었다.
“당장 꺼져라. 그렇지 않으면 법으로 엄정히 처리하겠다.”
평민이 귀족을 능멸할 경우 최고 사형까지 가능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법이 그럴 뿐 결국 모든 것은 힘에 의해 좌우되었다. 그리고 현재 힘을 가진 쪽은 조슈아가 아니라 사내 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