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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펜의 유희 1권(2화)
1 명계(2)


뭐, 뭐야? 웬 허연 빌딩이?
눈이 부시게 새하얀 빌딩이 내 눈앞에 우뚝 솟아 있었다.
어찌나 높아 보였는지 족히 700층은 될 것 같았다.
“저기가 명부다. 흐아암, 지루해 죽겠네.”
저승사자가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말했다.
“뭐, 뭡니까? 마법입니까?”
“마법은 무슨. 아까 내가 한 말 못 들었어?”
그, 그래도 이건 너무 신기하잖아?
“그, 그런데 제가 그동안 걷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앞으로 간 거죠?”
“내가 밀었지. 영혼 주제에 발이 어디 있다고, 그냥 밀면 밀리는 게 영혼이야.”
참으로 간단한 원리군.
“흐음, 드디어 우리도 들어가는구나.”
하얀 빌딩으로 들어가 보았다.
건물이 매우 웅장했기에 내부도 웅장할 줄 알았지만, 로비도 없고 네 사람이 지나갈 만한 복도에(내부 장식도 없고 온통 새하얗다) 문이 빼곡히 붙어 있었는데 마치 고시원을 보는 것 같았다.
“내 담당 부장님은 57층에 있으니까. 57층으로 가자.”
“네? 엘리베이터도 없는데, 언제 올라가요?”
“뭐가 어때서 그래? 영혼은 지치지 않는다고. 지치는 건 내 쪽이지. 얼른 올라가.”
그러면서 저승사자가 내 등을 밀었다.
하아∼ 천국 가기 참 힘드네.
“그런데 제가 왜 부장을 만나야 하나요?”
보통은 염라대왕을 만나는 게 아닌가?
“그러면 명부의 왕과 만나게 해 주리?”
염라대왕이 명부의 왕인가?
“얌마, 이곳 명계는 하루에도 약 7억에 달하는 영혼들이 죽어서 오는 곳이야 그 많은 영혼들을 명부의 왕 한 분이 전부 판결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아? 그건 말도 안 되지. 그래서 이곳 명부에 부장급 저승사자들을 두어서 대신 판결을 내리도록 하지. 그 수가 자그만치 1억 2천만 명이 되지만, 그래도 빠듯하다고.”
저승사자는 전에도 인도하는 다른 영혼들에게 이런 말을 자주 해 주었는지 아주 지겹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오∼ 그런 거군요.”
“암튼 그런 거니까 얼른 따라와.”

계속 여러 가지 잡담을 하는 사이에 우리는 벌써 57층에 도착하여 복도를 쭉 따라 걸었다.
“자아, 도착이다.”
57-023842번이라고 쓰여진 하얀 문을 가리키며 저승사자가 말했다.
똑똑.
저승사자가 문을 두드렸다.
“부장님, 다음 영혼 데리고 왔어요.”
“이제 오는 거냐? 빨리 들어와.”
문안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의외로 아리따운 여자의 목소리였다.
“네.”
덜컥!
방안은 매우 비좁았다. 아니, 좁으면서 길었다. 그것보다 취조실 같았다.
책상과 한곳에 높게 쌓인 서류, 검은색 책표지로 가득 찬 책장, 세 개의 커다란 도장, 펜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얼마나 비좁았는지 책상과 벽 사이의 간격이 없어서 책상 너머에 앉아 있는 부장이라는 사람은 저 책상 너머 의자에 앉기 위해 책상을 넘어가야 할 정도였다.
“자, 어서 그 앞에 있는 방석에 앉아. 네가 마지막이다. 너만 처리하면 퇴근이니까 빨리 하지.”
부장이라는 사람은 매우 날카롭고 깐깐해 보이는 인상의 여자였다.
하얀색 제복과 비슷한 옷을 입었는데 단추를 풀어 놓아서 쇄골과 가슴 굴곡이 보였다.
턱은 마치 V자처럼 뾰족했는데 붉은 입 옆에 매력점이 있는 게 포인트였다.
“사람 얼굴 그만 쳐다보고 얼른 앉지 그래?”
부장이 예리한 눈빛으로 날 쏘아보며 말했다.
“아, 네.”
책상 앞에 놓인 방석에 앉으니 마치 부장이라는 사람이 날 위에서 지엄하게 내려보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이름 박성은, 나이 19세, 사망 원인 교통사고.”
서류를 뒤적거리던 부장이 옆에 놓여진 검은 표지로 된 책꽂이를 뒤적거렸다.
“아, 찾았다.”
촤라락!
뭔가 멋들어지게 책을 펴고는 부장이 첫 페이지부터 눈을 빠르게 돌리면서 속독으로 읽어 나갔다.
“이게 뭐야, 뭐 이런 거지 같은 놈이 다 있어? 선한 일도 한 적이 없고, 그렇다고 나쁜 일도 한 적이 없다니. 나 참, 이런 놈 341년 만에 처음이네.”
약 30분 후 책을 덮으면서 부장이 투덜거리며 말했다.
“이거 참, 애매하네. 흐음! 이걸 어떻게 처리한다?”
부장이 헛기침을 하며 잘 들리지 않게 중얼거렸다.
제발, 제발 천국 가게 해 주세요. 으윽! 제발.
“에라, 귀찮다. 이래봬도 난 칼퇴근 주의란 말이야. 오래 생각하는 건 체질에 안 맞아. 환생.”
쾅!
그리고 부장이 내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내 서류에 환생이라는 고딕체의 붉은 낙인이 선명하게 찍혔다.
에?
“뭐, 뭐예요? 그렇게 남의 인생을 간단히 정해 버리면 어떡해요?”
“그거야 내 알 바 아니지.”
“그,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그러면 지옥 가서 2천 년 동안 튀겨지고, 못이 박힌 방망이로 맞고, 똥물 속에 잠수하고, 혀를 강제로 잡아 뺀 다음에 쇳물을 부어 버리는 고문을 당할래?”
“…….”
그, 그런 건 싫다.
“그냥 환생해. 니 거 책 보니까 착한 일도 한 게 없어서 영혼의 낙원에 가기도 글렀고, 그렇다고 악한 일도 한 게 없어서 지옥 가기도 그래. 그냥 환생해. 어차피 영혼의 낙원이나 지옥을 간다고 해도 2천 년 동안 그곳에서 지내다가 환생하게 되어 있는 거니까 말이야. 그런 데서 지루하게 2천 년을 보내느니 차라리 한 번 더 환생해서 인생을 보내는 게 낫지 않아? 악하게 살지 않았으니 바퀴벌레나, 파리, 모기, 몬스터 같은 걸로 환생하지 않게 해 줄게. 원한다면 인간, 취미가 다르면 페어리나 정령으로 살게 해 줄 수도 있어.”
페어리는 뭐고 정령은 또 뭐야?
“그, 그러면 인간으로 다시 환생하게 해 주세요.”
2천 년 뒤에 다시 환생할 거면 빨리 환생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그래? 잠시만 기다려 봐.”
드륵!
부장이 책상 서랍을 열더니 커다란 유리구슬 같은 걸 꺼냈다.
“이건 ‘전생의 오브’다. 네가 전생에 몇 번 환생했는지 볼 수 있는 오브지. 자, 여기다가 손을 짚어.”
전생의 오브? 저게 내가 그동안 몇 번 환생했는지 알 수 있는 거라고?
난 천천히 그 오브에 손을 올렸다.
스으으―
무언가 연기 같은 게 지나가는 느낌이 손의 감촉에 전달되었다.
“음?”
오브에서 붉은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숫자를 만들어 갔다.
“어? 665?”
부장의 눈이 점점 커져 갔다.
그나저나 세상에……. 내가 전생에 665번이나 살았단 말이야?
기분 나쁘게 악마의 숫자 666 이전이잖아. 그러면 다음 생은 666번째 삶이네?
“헉!”
여태까지 가만히 있던 저승사자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부, 부장님!”
왜, 왜들 이래?
“너,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봐.”
그러더니 부장이 이번에는 책상 서랍에서 옛날 전화기 같은 것을 꺼냈다.
“아, 여보세요? 여기는 57-023842번인데요, 국장님 좀 바꿔 주세요……. 아, 국장님? 665번 영혼이 나왔어요. 665요! 네! 빨리 와 주세요.”
뭐, 뭐야? 무슨 일인데 이러는 거야?
“어이, 저승, 조금 있으면 국장 올 테니까 난 이만 퇴근하겠어. 그러면, 수고.”
“아앗! 그냥 가시면 어떡해요? 그것보다 저는 엄연한 이름이 있는데 저승사자라고요! 도대체 저승이라고 부르는 건 뭡니까? 제 이름은 ‘알피지’라니까요. 이봐요! 야!”
저승사자가 듣는 척도 안 하고 문을 열고 나가는 부장을 향해 소리쳤다.
알피지……. 이슬람 사람들이 ‘알라의 요술봉’이라고 부른다는 러시아산 대전차 로켓이 아닌가.
“하아∼.”
이름하고는.
“뭔 한숨을 쉬는 거야? 아무튼 국장님 오시기 전까지 같이 여기 있어야겠어.”
“무슨 일인데 그래요?”
“국장님이 오시면 설명해 주실 거야.”
덜컥!
문이 열리더니 흰색 기단으로 된 검은 옷을 입은 단발머리의 남자가 들어왔다.
“665번 영혼이라니? 지난 350년 동안 없었는데?”
그는 들어오자마자 저승…… 아니, 알피지에게 말했다.
“없었으니까 이제야 있는 거겠죠. 665번 영혼이 맞습니다. 부장님도 보았고, 저도 보았습니다.”
“그래? 그런데 그녀는 어디로 간 거야?”
“저, 저기, 퇴근시간이라고 가 버렸는데요?”
“뭐야? 이런! 일이 복잡해져서 퇴근 늦게 할까 봐 도망간 거군.”
그가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당신은 나를 따라오시오. 어이, 저승, 너도 따라와. 네 담당 영혼이잖아.”
그리고 국장은 나가 버렸다.
“저, 저기 잠시만요! 같이 가야죠.”
내가 그 뒤를 따라 나갔고.
“하아.”
알피지는 한숨을 쉬고 발을 질질 끌며 내 뒤를 따라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