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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펜의 유희 1권(10화)
4 새 친구(3)
“실은 내가 소개해 줄 신이 있거든.”
신계로 온 후 명왕이 입을 열었다.
“소개?”
“응, 전생에 네가 살던 지구에서 살았다는데 너처럼 검은 머리에 갈색 눈동자더라고.”
“그래?”
한국인이었으면 좋겠네.
“그 신의 이름이 뭔데?”
“데네브라고 해.”
데네브라…….
“여∼ 여기예요.”
동상 한 부분에 돗자리를 펴고 앉은 콧수염을 기른 남자가 손을 흔들었다.
“저기 있다.”
“전생에 지구에서 살았다고요?”
우리가 다가오자 그가 다짜고짜 말했다.
“응. 전생에 고등학생으로 있다가 교통사고로 죽었대.”
그런 슬픈 이야기를 아무 부담 없이 말하다니.
“음?”
난 그를 자세히 보았다.
흰머리가 듬성듬성 보이는 회색 머리를 반으로 갈라 가르마를 한 후 아랫머리 끝 부문을 파마한 것처럼 말아 올려 마치 19세기 노신사들이 하는 머리같이 하였고, 왼쪽 눈에는 외눈안경을 착용했는데 얼굴에 주름은 거의 없고 콧날이 높은 사람이었다(추가로 여기에 중절모를 씌워 주면 아주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서글서글한 눈동자는 누가 봐도 머리에 인상 깊게 새겨질 정도로 크고 맑았다.
“아, 이런, 손님이 오셨는데 혼자 앉아 있다니. 자, 앉으세요.”
그가 우리에게 자리를 권했다.
“제 이름은 데네브입니다.”
“아, 예. 샤펜입니다.”
“샤펜 님은 전생에 지구에서 살았다지요? 어디에서 살았었나요? 그리고 연도는요?”
우리가 자리에 앉자마자 그가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 사람, 말끝마다 ‘요’를 붙이네.
“아예, 저는 한국 서울에서 살았고 마지막이 2008년이었습니다.”
“그래요?”
그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그때면 난 일곱 살이었네요.”
“네?”
시간이 다르잖아.
“흐음∼ 뭐, 난 신이 된 게 샤펜 님보다는 느리지만요.”
그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전생에 전 노환으로 죽었거든요. 아주 멋진 인생이었어요.”
이거, 난처하네. 신으로 살아온 생은 내가 더 많지만 그렇다고 모습이 노인인 사람에게 하대할 수도 없는 건데.
“그대, 샤펜이라고 했지요?”
“네.”
“전생에는 같은 한국인이었으니까 친구로 지내는 게 어떨까요?”
“친구요?”
“네, 친구요. 친구로 지냅시다. 저기 저 내가 직접 만든 바게트 샌드위치를 허락도 없이 더럽게 소스 흘리면서 먹는 명왕이랑도 전 친구 하기로 했거든요.”
“응? 방금 뭐라고 했어?”
입에 토마토소스, 겨자소스를 묻힌 명왕이 물었다.
“방금 맛있냐고 물었잖아요.”
빙그레 웃으며 데네브가 말했다.
상당한 포커페이스의 소유자군.
거짓말을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하고 있어.
“응! 상당히 맛있어.”
“핫핫핫∼! 내 전생의 아내도 내가 만든 요리는 좋아했지요.”
“저기…….”
“반말해도 돼요.”
그러면서 자기는 끝까지 ‘요’를 붙이면 어떡하자는 거야?
“아, 내 말투는 신경 쓰지 마세요. 신으로 살고 있지만 전생에 늙어서 바뀐 이 말투는 망각의 물을 마시지 않는 한 변하지 않으니까요.”
“…….”
관심법 쓰나?
“나이 드신 분한테 반말을 할 수 없는데요?”
“나이는 샤펜이 더 먹었잖아요.”
그것도 그러네.
“하지만, 음…….”
아까 반말하라고 했지?
“네가 더 늙어 보이잖아.”
“그것도 그러네요. 그러면 내 모습을 젊게 해 볼까요?”
응?
스스스스.
“어어어?”
데네브의 별로 없던 주름이 사라지고 흰 머리가 검은색으로 변하면서 말아 올려졌던 머리가 펴지고 키가 조금 커지기 시작했다.
“어떤가요? 내가 열아홉 살 때 모습인데요.”
이, 이게 열아홉 살 모습이라고?
완벽한 이목구비, 도도해 보이는 단발머리의 여자 같은 인상의 남자가 날 보며 싱긋 웃었다.
“고등학생 때 날라리? 열아홉 살이라며?”
“우리 학교는 두발 자유였거든요.”
말도 안 돼!
“우씨.”
“하하하! 샤펜은 머리가 짧은 이유가 두발 규제가 있었나 보군요.”
“으윽! 그래, 있었어.”
“그거 안타깝네요. 핫핫핫∼!”
호쾌하게 웃는 데네브.
“자, 그럼 한 잔 해요. 샴페인 한 병 가지고 왔으니 마시죠.”
“음, 좋아. 나도 따라 줘.”
묵묵히 샌드위치를 탐내던 명왕이 자기가 먹던 샌드위치를 내려놓더니 샴페인 잔을 집어 들었다.
“어린아이는 술을 마시면 안 되지요.”
홱!
데네브가 명왕에게서 샴페인 잔을 빼앗았다.
“아앗! 뭐하는 짓이야? 이리 줘!”
명왕이 다시 잔을 빼앗으려고 했지만 데네브가 일어선 채 잔을 높이 들자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명왕은 손을 아무리 뻗고 발뒤꿈치를 들어도 데네브의 가슴까지밖에 닿지 않았다.
“훗, 안 되지요. 어린아이에게 술을 먹일 순 없답니다.”
“난 이미 오만 살이라고!”
“그러면 뭐합니까? 모습은 아주 귀여운 어린아이인데.”
놀리는 듯한 말투, 그렇지만 부드러운 미소. 사람 성질 건들기에 아주 좋았다.
데네브는 웃으면서 명왕의 탐스러운 젖살로 인한 볼을 꼬집었다.
“우웅∼ 이러지 마.”
세상에, 그 무서운 명왕이 아주 휘둘리는구나.
“자, 샤펜. 잔을 받아요. 키가 크니까 무리가 없을 거예요.”
확실히 나도 키가 큰 편인지라. 명왕은 아무리 깡충깡충 뛰어도 잔이 닿지 않았다.
“으앗! 날 무시하는 거야?”
“아니지요. 어린아이는 나중에 커서 마시라는 뜻이지요. 자, 샤펜, 이제 막 성인이 된 사람이지만 아무튼 어른들끼리 마시자구요.”
뻥!
마개가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빠져나갔다.
쪼르르륵!
노란색, 그것도 탄산 기포로 톡톡 터지는 샴페인이 내 잔을 채웠다.
“자, 건배!”
“건배!”
쨍!
샴페인이 기분 좋게 혀를 자극하며 부드럽게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안 돼! 나도 줘! 나도 달란 말이야!”
명왕이 악을 쓰며 어떻게든 술잔과 병을 데네브에게서 빼앗으려고 노력했지만 헛수고였다.
“악! 악! 악!”
“뭐라고 말하는 건지. 저는 외계어는 잘 몰라요.”
“우씨! 수백 년 친구끼리 이래도 되는 거야?”
“친구도 친구 나름이지요. 아핫핫핫핫! 맛있다!”
그리고 데네브는 마지막 남은 샴페인을 한번에 쭉 들이켰다.
“진정으로 친구를 생각한다면 친구의 건강을 위해 몸에 나쁜 것을 주면 안 되지요. 멜라닌 파동인데도 불구하고 빼XX데이날 X빼로를 사 준 연인들이 있으면 그건 자신의 연인이 죽기 바라는 놈들일지도 몰라요. 전 그런 사람이 아니랍니다, 명왕.”
“우리는 신이야! 절대 안 죽는다고! 독약을 한 통 마셔도 죽지 않는 단 말이야! 건강 따위 신경 쓸 필요가 없단 말이야!”
“그래도 진정으로 자신의 친구를 생각한다면…….”
“진정은 무슨 얼어 죽을!”
“휴우∼ 안 되겠네요. 명왕, 자, 한 잔 받으세요.”
데네브가 자신이 마시던 잔을 명왕에게 주었다.
“오우! 좋았어! 네가 웬일이야? 처음 만나고 나서부터 나에게 술을 준 적이 없었는데 오늘 샤펜이 있으니까 화끈한데?”
“네, 오늘 샤펜을 봐서 드리지요.”
“에헷! 다음부터는 샤펜을 자주 데리고 다녀야겠네.”
명왕이 잔을 쭈욱 들이켰다.
“크으∼ 이 맛에 내가 산다.”
“자, 그러면 샤펜, 명왕에게는 싸구려 샴페인을 주고 우리는 백 년 묵은 상하지 않고 최고의 상태로 유지돼 온 포도주를 마시죠.”
데네브가 아주 오래돼 보이는 와인 병을 하나 꺼내 어디서 가지고 왔는지 모를 와인 잔에 따라 주었다.
“고마워.”
그래서 준 거였구나.
“캭! 뭐야?! 그런 걸 남겨두고 있었다니!”
쨍!
명왕이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잔을 던져 깨 버렸다.
“훗훗훗! 명왕, 당신은 내 상대가 안 돼요.”
“으윽∼!”
명왕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하하하!”
“샤펜, 웃지 마!”
“넵.”
나만 미워하네.
그 뒤로 우리는 자주 신계에 모여 술을 마시거나 음식을 장만해서 나눠 먹으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어느덧 정확히 내가 신이 된 지 이천 년이 된 해였다.
“이제는 마냥 놀기만 하시면 곤란합니다.”
외출 준비로 옷을 입던 나에게 베그라이텐이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어, 왜?”
“아시아 대륙에서 약 오백 년 전에 인간들의 문명이 나오기 시작했고, 그 뒤로 뱀파이어, 인어, 수인족, 드워프, 엘프 순으로 문명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둠의 신과 빛의 신이, 그러니까 중급 신들이 백 년 전부터 포교 활동을 시작했는데 샤펜 님은 포교 활동을 하지 않으시렵니까? 제가 전에 샤펜 님이 출타 중이실 때 엘프들에게 내려가 그들을 포교했습니다만, 다른 족속들은 샤펜 님이 직접 포교하지 않는 한 그들이 세계를 창조하신 샤펜 님을 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
“그렇습니다.”
“그래 봤자 최고신은 내가 아닌가?”
“그건 그렇습니다만, 샤펜 님의 힘으로 만든 세상인데 그 세상 사람들이 중급 신을 최고의 신으로 추앙하며 살게 내버려 두실 생각이십니까?”
“응, 그래.”
“하지만…….”
“걱정 마. 뭔가 잘못되는 일은 없을 거야.”
“하지만…….”
베그라이텐이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손톱을 물어뜯었다.
“저보다 약한 중급 신들이 저의 주인을 제치고 추앙받으며 군림하면, 왠지 화가 나서 단번에 베어 버리고 개들에게 먹이로 던져 주고 싶은데.”
어이어이, 그렇게 귀여운 모습으로 그렇게 무지막지한 말 하는 거 하나도 안 어울리거든요?
게다가 그쪽은 신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는데 천사는 사용 못하잖아.
“어이어이, 그렇게 화가 나는 일은 아닌데.”
“천사로서 가장 기쁜 일은 자신이 모시는 주인, 즉 신이 만민들에게 찬송과 경배를 받을 때거든요.”
이거 어찌 미안해지는데?
“미안, 조금은 봐주라.”
똑!
또다시 베그라이텐의 손톱 물어뜯는 소리가 들려왔다.
“…….”
똑똑똑똑! 찌익!
“헉! 피가 나잖아!”
“앗! 죄송해요! 너무 불안해서…….”
그게 그렇게 불안한 일인가?
[치료.]
손가락 끝에서 황금빛 물결이 나와 베그라이텐의 다친 손가락을 감쌌고, 서서히 빛이 사그라지면서 보이는 손가락은 전부 다 나아 있었다.
“고맙습니다.”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럼 다녀올게. 그 이야기는 갔다 와서 다시 하기로 하지.”
“네.”
기다리는 친구들 생각에 우선 이동을 해서 신계로 갔다.
하지만 이야기를 듣고 나니 베그라이텐의 이야기가 확실히 마음에 걸리긴 했다.
신으로서 사람들에게 추앙받지 못하는 것은, 이를테면 무능한 왕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아직 난 주신에게 맹세한 것을 잘 기억하고 있다.
신이 되어 날 믿고 의지하는 자들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것을.
“으음, 이거 정말 빨리 결론을 내려야겠네.”
고민이 있을 때는 친구에게 털어놓는 게 좋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