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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펜의 유희 1권(11화)
4 새 친구(4)


“으음∼ 그런 일이 있었군요.”
데네브가 페퍼민트차를 쭈욱 들이켰다.
“응, 그래. 근데 데네브는 아직 데네브 세계의 족속들이 문명을 피우지 않았어?”
“저희 쪽은 신이 되고 난 후 세계를 만드는 걸 늦게 시작했지요. 때문에 아직 오백 년은 더 있어야 한다고 천사들이 보고했어요.”
“그래?”
우적우적.
내 손바닥만 한 쿠키를 먹던 명왕이 입에 잔뜩 초콜릿을 묻힌 채 말했다.
“자, 여기.”
“고마워.”
데네브가 그녀에게 젖은 손수건을 주었다.
“그러면 샤펜, 넌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글쎄? 그것 때문에 내가 물어본 건데?”
“그야 당연히 포교 활동을 하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신이 되면서 짊어진 숙명이 바로 그들의 위에 군림하며 그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니까. 나만 빼고.”
명왕이 이번에는 오렌지 주스에 손을 뻗으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중급 신들처럼 온갖 미사여구를 넣은 교리 같은 게 없어.”
“넌 여태까지 수천 년을 지내면서 뭐하고 있었던 거야?”
“그냥 너희들이랑 탱자탱자 놀았지.”
“흥, 난 그래도 일일이 열심히 일하고 있다구.”
“어련하시겠어요? 어느 익명의 여성 제보자가 그러던데 명왕은 일은 잘 안 하고 오는 영혼 족족 전부 지옥으로 보낸다고 하던데요?”
데네브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뭐라고? 누가 그래? 응? 그 녀석 누구야!”
“핫핫핫핫!”
“누구냐니까?”
“핫핫핫! 신변 보장을 위해 말할 수 없습니다.”
“이익! 이것들을 그냥!”
흥분한 명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차원의 문을 소환했다.
그 뒤에서 데네브가 조용히 말했다.
“1억 2천만 명이나 되는 부하들을 전부 죽이시게요? 그러고 나면 그들의 죄를 속죄하는 기간이 사라져서 그들은 자유를 얻을 텐데요? 그러면 하루에 7억 명이나 되는 영혼을 누가 처리하려나? 명왕 혼자서 다 하시게요?”
흠칫!
차원의 문 손잡이를 잡은 명왕이 멈추더니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흐, 흥! 내가 아량을 베풀어 이번만은 살려 주도록 하지.”
“명계의 저승사자들이 이 소식을 들으면 분명 명왕을 칭송할 거예요.”
“응! 그래야지!”
‘참 다루기 쉽죠?’
라는 표정으로 데네브가 나한데 고개를 돌려 눈짓했다.
끄덕끄덕.
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회의 결과 난 그냥 포교 활동을 하지 않기로 했다.
왜냐하면 한번 포교된 족속들은 믿고 있는 종교를 개종하기 힘들다는 내 생각과 특정 종교를 타도하기(또는 개종하기) 위해서는 다른 종교를 사용해야 한다는 데네브의 의견도 있었지만, 날 믿게 하자고 중급 신들을 믿는 신자들을 타도하고 날 포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세상에 관심을 가지라는 베그라이텐의 요청으로 나에게 기도하는 신자들에게 귀를 기울이기(그래 봤자 일부 엘프들이지만) 시작했고, 그들의 기도 소리가(그중에 진심으로 나에게 기도하는 신앙심 높은 자들의 기도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또한 나를 따르는 신실한 종들에게(신관이나, 사제들) 나의 힘을 주어 신성력을 펼치게 하였다.
……물론 대부분의 기도가 그렇듯이 가족이나, 자기 자신,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에 대한 안녕과 미래에는 행복하게 해 달라는 기도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샤펜 님.”
“응?”
후르릅!
식사시간인지라 칼국수를 시켜 먹던 내 앞에 갑자기 베그라이텐이 나타났다.
“아시아 대륙에서 신마전쟁이 일어났다 합니다.”
“뭐?”
신마전쟁이라니? 갑자기 뭔 개소리야?
“빛의 신 나르를 따르는 사제들이 나르에게 계시를 받아 어둠의 신의 신자를 이단으로 간주, 인간의 왕국들을 부추겨 어둠의 신을 믿고 있던 남쪽의 수인족들을 향해 성전을 펼쳤다 합니다. 그로 인해 자연이 많이 파괴되어 정령왕들의 항의가 빗발치고 있습니다.”
“허참, 성전이라니. 그래, 빛의 신과 어둠의 신의 동태는?”
“빛의 신 나르와 어둠의 신 둔켈은 각자 인간과 수인족에게 싸움을 부추기고 있다고 합니다.”
“허, 참. 싸우지 말라고 경고를 주었는데 이것들이 감히 내 말을 무시해?”
“제가 보기에는 그 둘 다 샤펜 님을 잊은 것 같습니다.”
“응? 잊다니? 뭔 소리야?”
“샤펜 님이 그들을 창조하신 지 몇 년이 지났지요?”
“…….”
몇 년이더라?
“2천하고도 150년 됐습니다.”
“호오∼ 내가 그렇게 오래 살았구나.”
“전혀 기뻐하실 일이 아닙니다, 샤펜 님. 샤펜 님은 그들을 창조하시고 나서 그들을 만나러 한 번이라도 가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아니. 전혀∼ 갈 필요 없잖아. 내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한 불간섭하는 거 아닌가?”
“샤펜 님은 약 2천 년 전에 잠깐 만난 사람을 만나면 제대로 기억하시겠습니까?”
“글세, 그건…….”
확실히 잊을 만하다.
“제가 보기에는 중급 신들도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쩝, 자업자득인가?”
“당장 싸움을 멈춰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샤펜 님의 강령을 무시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건 그렇지.”
나의 뚱한 반응이 마음에 안 드는지 베그라이텐이 딱딱하게 말했다.
“아시아 대륙에 귀를 한 번 기울여 보시는 게 어떠신가요? 분명히 전쟁의 참상을 느끼실 수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인간이나 수인족은 나를 안 믿잖아?”
“중급이나 하급 신들에게 청해지는 기도는 상급 신이신 샤펜 님이 도청하실 수 있습니다.”
“…….”
그런 건 가르쳐 주지 마.
그래도 한 번 해 보았다.
―둔켈이시여, 저는 저들에게 불타 죽지만은 당신에 대한 믿음은 영원하나이다!
―나르시여, 저희를 굽어 살피사 저 악독한 악마들을 물리칠 힘을 주시옵소서.
―……이 어린 생명이 부디 다시 건강해지게 도와주소서.
시도해 보겠다는 마음을 먹기 무섭게 가지각색의 기도 소리가 머릿속에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응?
갑자기 간절한 기도 소리 하나가 내 머리에 울렸다.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였다.
―인간들이 저희 엄마 아빠를 따로 어디론가 데리고 갔어요. 엄마 아빠가 보고 싶어요.
“베그라이텐, 아시아 대륙의 전쟁 상황은 어떻지?”
“아무런 방비도 없이 맞게 된 성전에 수인족들이 일방적으로 학살을 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다 죽인다고 합니다.”
이런 건 가만히 두면 안 되겠군.
어린아이의 간절한 기도 소리가 들려온 거라면 지금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인가?
이런 걸 들었으면 구해 줘야지.
[베그라이텐, 너의 의무의 순간이 왔다.]
“아, 네!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샤펜 님!”
내가 힘을 개방하자 전신이 빛으로 감싸였다.
내가 진지하게 명령을 내리자 베그라이텐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나의 권속들을 이끌고 나가서 나르와 둔켈을 잡아 끌고 와라.]
“알겠습니다!”
베그라이텐이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올랐다.
[간절히 기도한 아이야,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난 나에게 기도한 그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누, 누구세요?
5살 정도 아이의 목소리였다.
[난…… 신이란다.]
―어둠의 신 아저씨?!
응?
머리에 해머를 맞은 기분이 들었다.
이게 아닌데.
아, 맞다. 내가 기도를 도청한 거였지.
이 아이는 아마 너무 어려서 어둠의 신 둔켈의 이름을 모르고 무조건 기도를 한 모양이었다.
[뭐, 대충…… 맞다고 할까나?]
일단 대충 넘겼다.
―어둠의 신 아저씨! 제 이름은 리리인데요. 도와주세요! 인간들이 엄마 아빠를 데리고 갔어요. 그리고 저희를 미셸네 집안에 전부 몰아넣었어요.
[그래, 내가 너희를 위해 강림해 주겠다. 기다려라.]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강림!]
쿠웅!
번개 치는 소리와 함께 구름 같은 것이 커다란 원을 만들더니 문이 만들어졌다.
끼익―
문이 저절로 열렸다.
문 너머로는 구름으로 만들어진 계단이 보였다.
밤이라 어두운 하늘과 그 밑에 불타는 마을, 그리고 인간들의 군대로 보이는 횃불을 든 행렬이 보였다.
나에게 기도를 한 아이가 있는 곳이었다.
저벅저벅.
난 그 구름 계단을 따라 천천히 내려왔다.
계단은 지상까지 이어져 있었다.
내 몸에서 나오는 빛 때문에 하늘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질퍽!
마지막 계단을 내려오자 진흙탕인지라 내 신발과 의복이 더러워졌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누군가의 피로 인해 질퍽해진 진흙탕이었다.
“맙소사!”
“이런 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