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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마대제 1권(3화)
Chapter 1 루스펠드 후작가의 후계자(2)
레이얀이 다시 깨어난 지 3일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레이얀이 되어 버린 진마는 많은 것을 깨달았다.
태양빛을 받고자 만들었던 마법진이 영혼 이탈이라는 결과를 만들어 내었고, 이탈한 영혼이 다른 차원의 다른 인간 몸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을 깨달은 것은 정신을 차리고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영혼 이탈 후 다른 몸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또한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등한 인간의 몸이란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육체는 영혼에 의해 변하기 마련이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부터 인간과는 다른 사고방식과 폭을 지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뱀파이어의 권능과 능력이 고스란히 남아 있음을 깨달았다. 영혼이 들어온 것이기에 능력이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힘은 육체로 인하여 제약이 있었지만 고유 권능은 아무런 제약이 없기에, 이 세계 언어를 파악하는 것에 어려움은 없었다. 뱀파이어 때의 능력 때문에 언어가 저절로 이해되고 머릿속에 그려진 것이다.
그렇다면 겉모습을 제외하고는 예전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가장 큰 변화가 있었다.
바로 뱀파이어가 가지는 불멸이 사라진 것이다.
이제 자신도 다른 인간들처럼 시한부 인생을 살아야 한다.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인간 아니, 다른 생명체들과 같이 죽음이 최후의 목적지인 동등한 입장에 놓이다니.
하지만 다시 진마의 육체를 찾을 생각은 없었다.
아버지 대에서부터 태양빛을 받고자 하는 연구를 하는 것도 상당한 귀찮음을 감수하여 한 것이다.
그런데 또다시 기나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연구를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럴 시간을 육체가 허락하지 않을 뿐더러 태양빛 연구와는 달리 수식을 자신이 처음부터 만들어야 했다.
더더욱 귀찮은 일인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일을 받아들였다.
인간으로 살아가더라도 종족 자체에서 오는 이념과 관념을 비롯한 모든 것이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단지, 인간의 육체 그리고 인간으로 분류되는 종족으로 살아가는 것뿐이다.
일단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선 레이얀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했다.
그렇기에 첫날처럼 자신을 문안하러 온 사람들을 살피다가 가장 곁에 있는 사람에게 질문하였다.
“여기는 어디지?”
이런 질문을 하는 자신에게 이상한 시선을 보내었지만 쓰러지기 전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에 그나마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측은과 슬픔이 섞인 눈빛으로 스스로 집사라 소개한 자가 현재 사정을 설명해 주었다.
설명을 통해 자신이 후작가의 후계자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자신의 입지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때 가문 사정에 대해 설명하려던 집사의 말을 끊고 중년인이 끼어들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제가 설명 드리겠습니다.”
그의 이름은 록펠, 레닐 루스펠드의 수호기사이자 루스펠드 가문의 기사단장이었다.
그는 레닐이 살아 있을 때 한시도 옆에서 떨어진 적이 없었다. 그로 인해 가문의 사정을 레닐 다음으로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청하고 나선 것이다.
레이얀이 열병으로 쓰러지면서 다음 가주에 대한 문제가 불거지고 있는 지금 시점에, 레이얀이 다시 깨어났기에 다음 후작은 당연히 그였다.
그렇다면 반드시 알아야 했다. 지금 영지의 사정을 말이다.
레이얀이 고개를 살며시 끄덕이자 록펠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레이얀이 변한 것이 확실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록펠의 입이 열렸다.
광명정대한 레닐의 성품에 반해 버려 관리들은 진심으로 그를 따랐다고 한다. 그게 현재 가문의 중추 세력이자 장로라고 불리는 7명의 관리들이었다. 하지만 장로들이 변한 것은 순식간이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장로들은 변해 있었다. 레닐을 바라보던 충성심이 깃던 눈빛은 추잡한 탐욕에 물들어 있었다.
눈빛이 변했다는 것은 행동도 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후작령에서 생산되는 곡식과 보석을 포함한 이익 일부분을 장로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빼돌리고 있었다.
영지의 주인인 레닐은 너무 안일해 있었다. 아니, 그들을 믿은 것이다. 그로 인해 상당히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런 사실을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수를 쓰기에는 너무 늦어 있었다. 이미 장로들은 영지의 근간까지 장악한 상태였다.
그들은 작당하고 후작가를 무시하는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그렇게 직접적으로 행동하였기에 장로들의 태도를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종래에는 어중간한 태도를 보였던 중추 세력에서 약간 떨어진 관리들도 자신의 배를 채우는 데 급급해졌다고 한다.
레닐을 죽인 것도 더 많은 이익을 쉽게 챙기려는 관리들의 소행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려다 간신히 참았다.
열병에 시달리다 보름 만에 깨어난 어린 주인이다. 지금까지 말한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힘드실 것이다.
그렇게 걱정할 것이라면 며칠 뒤에 후작령의 사정에 대해 얘기하였어도 될 문제였다. 하지만 록펠은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예전의 기억을 잊은 레이얀은 어딘가 모르게 변해 있었다.
그렇기에 가문의 상황을 알게 되면 예전의 레이얀처럼 대처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때문에 갓 병상에서 일어난 어린 주인에게 가문의 사정을 상세히 말한 것이다.
부디 기억을 찾더라도 지금 이 순간의 감정을 잊지 말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말을 마친 록펠이 레이얀의 안색을 살폈다.
“……!”
레이얀을 본 록펠은 놀라고 말았다.
한 치의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의 말에 충격을 먹어 정신을 놓은 것도 아니었다.
뚜렷한 초점이 잡힌 무심한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 확실히 달라지셨다!’
무심한 눈동자와 무표정한 얼굴 때문에 지금의 심정을 헤아리긴 힘들지만 확실히 변해 있었다.
예전의 레이얀이라면 후작령의 사정을 듣고 아버지인 레닐처럼 ‘다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성품이 변한 것이 확실해지자 속으로 안도한 록펠은 다음에 이어진 레이얀의 행동에 혀를 깨물 뻔했다.
한쪽 손을 들어 귀찮다는 듯이 휘저었기 때문이다.
그게 방을 나가라는 의미임을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레이얀이 그런 행동을 취하다니!
그것도 예전엔 깍듯이 대했던 검술 스승인 자신에게 말이다!
기분 나쁠 상황이지만 록펠은 그저 고개를 까닥이고 방을 나섰다.
문을 나선 그의 입에는 주체하지 못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변한 레이얀에 대한 염려를 지닌 다른 가신들과는 상당히 상반된 모습이었다.
* * *
루스펠드 후작령의 중추 관리는 모두 7명이다.
장로라고 불리는 그들은 후작령의 크고 작은 문제들을 처리할 때 영주와 함께 안건을 논의한다.
레닐은 그들을 대우해 주고자 과반수의 승인이 떨어져야지 영주인 자신도 안건을 처리할 수 있게끔 했다.
그것을 도입할 때는 후작령 사정이 이렇게 될지 몰랐을 때였다.
장로들이 처리할 수 있는 일에는 후계자 문제 또한 들어 있었는데 이 안건은 레닐이 죽은 지 3일, 그러니까 레이얀이 쓰러지자마자 도입한 것이었다.
오로지 장로들만의 의견으로 도입된 안건이지만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가장 중요한 점은 관리들 중에 후작의 편이 없다는 점도 있지만 그들의 이유가 타당했기 때문이다.
장남이 가문을 잇는 것은 당연하지만 후작령은 케이안트 제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 말은 능력이 없는 작자가 가문을 잇게 되면 가문을 떠나 왕국 전체의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점을 빌미로 후계자 안건을 도입한 것이다. 그렇기에 다른 영지와 달리 루스펠드 후작가는 장로들의 승인이 필요했다.
지금 후계자 승인권을 지닌 일곱 장로들 중 하나인 겔릭은 점심 식사를 마치고 집무실을 향하고 있었다.
“비가 올려나.”
어느새 도착한 집무실에서 창밖을 살피던 그는 곧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잠시 그렇게 쉬던 겔릭이 자세를 바로 잡고 안건을 살피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다이아몬드 채굴량에 관련된 서류였다.
서류를 훑은 겔릭의 입가에 만족스런 웃음이 머문다.
이번에도 수확한 다이아몬드의 양이 꽤 되었기 때문이다. 요새 재산 늘리는 재미에 푹 빠진 겔릭은 기분 좋은 마음으로 다음 안건을 들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고요한 집무실을 깨웠다.
겔릭이 들어오라 명하니 깔끔한 차림의 중년인이 들어와 고개를 숙이고는 곱게 말린 양피지를 건네었다.
그것을 조심스레 받아 들자 중년인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섰다.
“……!”
중년인이 나가고 나서야 양피지에 찍힌 인장을 살핀 겔릭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검을 땅으로 향하게끔 쥔 기사가 그려진 그 인장은 다름 아닌 루스펠드 후작만이 쓸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 죽지 않은 건가?’
순간 어이없는 생각을 한 겔릭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는 없었다.
한 달 전에 자신이 확실히 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이 인장은 무엇이란 말인가. 확실히 후작만이 쓸 수 있는 인장이었다.
곰곰이 인장을 살피며 고민하던 겔릭의 머릿속으로 한 명의 인물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그리고 설마라는 심정으로 양피지를 조심스레 펴 보았다.
지금 이 순간 겔릭을 포함한 일곱 명이 똑같은 내용의 양피지를 펴 보고 있었다.
* * *
레이얀이 깨어난 지 5일이 지났다. 그동안 레이얀은 영주 집무실에 틀어박혀 지냈다.
전혀 의도하지 않았고, 하등한 인간의 몸에 들어왔더라도 지금은 자신이었다.
즉, 이 영지의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란 말이다.
그렇기에 레이얀은 집사와 록펠에게 자신에 대한 위치를 들은 후부터 영지를 파악하는 것에 시간을 투자하였다.
태양빛을 받고자 연구에 매달렸지만 아버지 이상의 갈망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레이얀은 종족 특유의 자긍심이 태양빛을 후에 문제로 미루고 말았다.
애초에 더 이상 신경 쓸 문제도 아니었다. 인간의 육체였기에 언제 어디서든 태양빛을 아무렇지 않게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레이얀의 머릿속에는 태양빛보다 다른 생각만이 떠다니고 있었다.
‘고귀한 나에게 어울리는 영지여야 한다.’
뱀파이어 중 가장 순수한 피를 가졌던 진마인 영혼이 들어온 이상 몸도 영지도 모두 최고여야 하는 것이었다.
레이얀은 루스펠드 후작령을 대륙 최고의 영지로 만들 각오를 새겼다.
그렇게 각오를 마친 레이얀은 하루하루를 집무실에서 서류를 보며 보냈다.
아직 직접적으로 이룬 결과물은 없지만 대륙의 정세를 파악했으며 영지의 사정을 어느 누구보다 더 많이 알게 된 것이다.
레이얀이 보기에 영지 사정은 록펠이 말한 것보다 더욱 심했다.
이미 영주의 권위는 바닥에 있었고 그런 사실을 모르는 것은 순진한 백성들뿐이었다. 영주의 권위가 상실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영지 내에 거주 중인 집단들을 살필 때였다.
정보 길드 아이즈의 지부는 루스펠드 영지에 있었다. 그들은 전대 영주 레닐과 거래를 통하여 합법적으로 영지에 지부를 가졌다.
그 거래의 내용은 영토를 사용하는 대신 월 100골드의 영지 사용료와 영지 내의 정보를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4달 전부터 그 거래를 지키지 않았다.
아이즈 길드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영지 내의 머물고 있는 용병 길드를 시작으로 누군가가 벌이는 큰 사업은 단합이라도 한 듯이 거래의 내용을 지키지 않았다.
거래를 어기기 시작한 것도 서로 비슷한 주기였다.
거래 내역을 살피며 레이얀은 생각에 잠겨 들었다.
정말 그들이 단합한 것일까?
만약 그들이 단합을 했다면 돈 때문일 리는 없었다.
정보 길드 아이즈만 하더라도 대륙의 3대 정보 길드에 드는 거대한 곳이었다. 그런 곳이 겨우 100골드 때문에 후에 신용이 떨어질 만한 문제를 만들 이유는 없었다.
“……누군가 개입되었군.”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했을 것이 분명했다. 아니, 장로들의 힘이 작용한 것인지도 몰랐다.
다이아몬드나 곡식 같은 것도 빼돌리는데 영지 내의 거래를 통해 들어오는 이익을 빼내지 않을 것이란 보장이 없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라면 영지 내의 거래가 적힌 서류를 열람 가능한 이는 영주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영주만이 열람 가능한 이 서류를 그들이 어떻게 보았단 말일까.
지금으로써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월등한 지능을 지녔어도 없는 일을 있는 일로 만들 수는 없는 것이기에 때를 기다려야 했다.
“마음에 안 드는군.”
루스펠드 후작령은 이제 자신의 것이다.
이곳에서 나오는 모래알 한 톨 마저 자신의 것이란 말이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것이 다른 녀석들의 영달에 채워지고 있었다.
그 점이 아니더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근 2일간 집무실에서 본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이였다.
방금 전에 살핀 거래 내역도 그러했다.
못 받은 것이야 영주의 권위가 상실되어서라고 하지만 월 100골드와 정보 공유는 뭐란 말인가.
자신의 땅을 쓰게끔 하는 것인데 이 터무니없이 손해 보는 조건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것을 남이 쓰고자 하는 것이라면 이쪽에서 굽히고 들어갈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 모든 것이 사회를 살아가기 편한 방법임을 모를 리는 없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약해 빠진 인간에 속한 관념이다.
자신은 뱀파이어 중에 가장 순수한 혈족인 진마였다. 그런 고귀한 특성에 맞게 능력 또한 강대했다.
그렇다면 일일이 자신이 움직이면서 남 눈치 볼 이유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또한 자신의 것을 남에게 선심 쓰듯 그냥 줄 이유는 절대 없었다. 이 영지의 주인이 자신이 된 이상 타인의 눈치를 보며 명예나 부를 축적할 생각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