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진마대제 1권(5화)
Chapter 2 후계자의 귀환(1)
영주 성으로 가는 겔릭에게 근심거리가 있었다.
물론 앞날에 대한 걱정은 아니었다.
본격적인 움직임을 한 이상 칼날 위에서의 나날은 끝날 것이니까.
겔릭이 걱정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장로들의 결정에 의해 분명히 저항할 어린 영주의 지지자들이었다.
루스펠드 후작령은 항시 전투태세에 돌입된 위험한 곳이기에 인재들이 많았다. 일곱 장로들도 그러했듯이 그들 모두 레닐의 성품에 반하여 성에 온 것이다.
아무리 자신의 영달을 채우는 비리 관리들이 판을 친다고 하더라도 검술을 익힌 자들은 자신들의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들을 베어 버릴 기회만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와중에 일곱 장로들이 레이얀의 후작 계승 권한을 박탈해 버린다면 분명히 반발이 일 것이다.
겔릭은 그 점을 염려하는 것이다.
아직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기에는 너무나 일렀다. 자신의 임무를 무사히 완수하려면 아직까지는 숨겨야 했다.
‘어찌해야 하는가.’
고민하던 겔릭이 순간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나 간단하면서도 완벽한 방법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영주 성을 향하는 내내 고민한 자신이 더 없이 한심해 보였다.
“그래, 그거면 된다. ……불쌍한 레이얀 도련님, 부디 남은 시간 후계자로서 편히 영위하시길. 크크크.”
한순간 떠오른 계획이기에 너무나 간단하였지만 그 결과는 완벽할 것이다.
겔릭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그리고 좌불안석이던 겔릭의 몸이 마차의 푹신한 의자에 파묻혔다.
검을 아래로 든 기사가 새겨진 깃발이 펄럭이는 성이 멀리서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주인 없는 성, 주인이 바뀌게 될 성, 루스펠드 후작의 성에 겔릭이 도착한 것이다.
겔릭과 나머지 장로들은 영주 성에 들어선 후에 의문을 가졌다.
자신들을 맞아들이는 영주 성의 가신들의 태도가 너무 호의적이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비리가 만천하에 알려진 지금, 이들의 태도를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냉대와 무시를 받아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이런 살가운 태도는 무엇이란 말인가?
머무는 방 또한 아늑하기 그지없었다. 식사 또한 자신의 성에서는 먹어 보지 못한 갖은 별미들이 나왔다. 그런 예우를 받으며 겔릭은 이들의 속내를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이들은, 그러니까 어린 영주는 자신들에게 호감을 살 생각인 것이다. 그것 말고는 이들의 태도를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다른 장로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들은 겔릭의 말을 듣는 순간 모두 조롱 섞인 웃음을 머금었다.
“어린 영주가 발악을 하는군.”
“나름 현명한 방법이군. 크크, 힘으로 안 되니 회유할 수밖에.”
그들의 비웃음에 겔릭이 조용히 웃음 지었다.
‘소용없는 짓이다, 그런다고 나의 생각이 변하지는 않는다. 어린 영주.’
겔릭의 웃음 또한 조롱으로 변해 갔다.
“하지만 호의를 무시할 수는 없는 법. 즐겨 줍시다.”
겔릭의 한 마디에 그들의 비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록펠은 속이 타들어 갔다.
어린 영주가 일곱 장로를 대하는 태도 때문이 아니다. 자신은 어린 영주를, 차기 주인을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이 믿는다고 부하 기사들도 모두 믿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어린 영주의 나약한 태도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있었다. 보통 때라면 자신의 기세에 짓눌려 말도 못 꺼낼 기사들이 노골적으로 불만을 털어놓는 이유를 록펠은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자신들이 예전에 충성을 맹세했던 주인, 레닐을 죽인 것이 일곱 장로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증거는 없더라도 일곱 장로의 소행임이 너무 뻔했다. 레닐이 그들의 비리를 깨닫고 그것을 막고자 움직임을 보일 때 죽었기 때문이다.
그 점을 확실히 알지만 자신들은 검을 다루는 기사에 불과했다.
논리적으로 몰아붙이는 장로들을 짓누를 언변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에 속으로 화를 억누르며 이날까지 참아 왔다.
언제고 베어 버릴 기회가 오길 바라며.
그런 와중에 어린 영주가 숙적인 일곱 장로들에게 갖은 예우를 해 주고 있으니 열불이 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단장님, 이해가 안 갑니다. 왜 보고만 있어야 하는 겁니까!”
부단장 데린의 외침에 다른 기사들도 동조했다.
“그들을 베어 버려도 되지 않습니까!”
“도련님을 지킬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면면을 찬찬히 살펴본 록펠이 나직이 말했다.
“그러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다. 그들을 밀어주는 세력이 너무 커. 그리고 우리는 기사도를 익힌 기사다! 이유 없이 살생을 할 수는 없는 법이다!”
단호한 록펠의 외침에 기사들의 표정이 참담해졌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들이 한심한 것이다. 그런 기사들의 마음을 읽은 록펠이 누그러진 어조로 입을 열었다.
“도련님을 믿어 보자. 우리의 주인 되실 분이 아니더냐.”
기사들이 마지못해 분노를 억눌렀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는 전의가 한껏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들을 둘러보던 록펠이 한 마디 덧붙였다.
“만약…… 그들이 도련님에게 불합리한 발언을 한다면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
기사들의 전의가 더욱 굳어 갔다.
장로들이 도착한 지 며칠 후 드디어 회담이 열렸다.
회의실로 쓰이는 곳이었는데 기다란 탁자만이 덜렁 놓인 방이었다.
그곳에서 일곱 장로들이 어린 영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이리 늦는 것이오!”
성급한 헥토가 보채었다. 하지만 그의 질문에 대답해 줄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흐음…….”
생각에 잠겨든 겔릭을 보며 게드릭이 말을 걸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겔릭은 아무것도 아닌 척했지만 실은 레이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레이얀이 한 대우를 미루어 보면 장로들보다 더욱 빨리 회의실에 와서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지금 약속 시간보다 30분이 늦어 있었다.
‘역시 어린 것인가.’
어린데다가 그저 좋은 성격을 지닌 레닐을 보며 자랐기에 정치판에 숨겨진 비수를 모르는 것이다.
혹여나 레이얀이 장로들보다 한 수 앞에 있어서 이 점을 노림수로 쓸 수도 있었다.
하지만 레이얀은 그럴 처지가 되지 않았다.
검의 손잡이를 쥐고 있는 것은 장로들이었다. 그럼에도 늦게 오는 레이얀의 태도는 어린 것을 떠나 경험 부족과 물러 터진 성격에 의한 것이 분명했다.
생각에 잠겼던 겔릭이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더 이상의 생각 후에 낳아지는 결과물은 억측에 가까울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어린 영주 레이얀이 하기에는 어려운 방법들이다.
‘나도 참…… 검을 조금 다루는 꼬마를 상대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때 별안간 문이 벌컥 열렸다.
“……!”
“……!”
모든 장로가 놀랐지만, 그중 헥토만이 눈에 띄게 움찔했다. 그들이 놀란 이유는 간단했다.
문이 열리기 전까지 어떠한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상대가 자신의 목숨을 노렸다면 위기에 직면하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들어온 이를 확인한 그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냐하면 들어선 이가 레이얀이었기 때문이다.
검에 극을 이룬 고수도, 마법의 끝을 본 실력자도 아닌 레이얀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의아한 것이다.
레이얀은 겨우 소드 엑스퍼트 하급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무, 무슨 아무리 방심하고 있었다지만 기척이 느껴지지 않다니…….’
겔릭이 속으로 놀라며 레이얀을 응시했다.
레이얀 또한 그들을 하나씩 살펴보고는 이내 걸음을 옮겨 상석으로 향했다.
상석에 앉은 레이얀이 입을 열었다.
“왜 내가 아직 후작이 아닌 거지?”
“…….”
레이얀의 말투에 겔릭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금 이게 무슨 태도란 말인가.
말의 내용을 떠나 받들어 모시며 굽혀도 모자랄 판국에 거만한 태도라니.
레이얀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은 것에 충격을 먹은 장로들은 그의 분위기가 변한 것도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감히 무슨 말버릇이오!”
“주인이 아랫것들에게 존대해야 하나?”
레이얀이 부드럽게 받아쳤다.
“……!”
당당한 레이얀의 태도에 장로들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회복한 그들은 한껏 조롱을 입에 머금었다.
‘기선 제압을 할 작정인가 본데…… 우리가 약해질까 봐?’
‘가진 예우를 다해 주더니 우리가 변하지 않을 것이란 걸 이제야 깨달았나 보군. 크크, 너무 늦었어.’
회복한 건 회복한 것이지만 레이얀의 태도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기에 겔릭이 언성을 높였다.
“주인이라니! 후계자를 정하는 권한은 우리에게 있소!”
“그런 권한이 어디에 명시되었단 거지?”
레이얀의 대꾸에 겔릭의 입가에도 웃음이 걸렸다. 지금 레이얀의 행동은 예상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단지 순서가 달라졌을 뿐이다.
겔릭의 생각대로라면 계승 권한을 박탈한다는 발언 후에 보여 줄 서류였다.
겔릭의 손이 품으로 향했다. 다시 나온 손에는 돌돌 말린 양피지가 들려 있었는데 그것을 레이얀에게 건넸다.
“이곳에 정확히 명시되어 있소이다!”
겔릭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크크, 더 이상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레이얀이 양피지를 서서히 펴 보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겔릭이 말을 덧붙이고자 입을 열었다. 어린 영주 지지파들의 저항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는 정당한 사유가 필요했다.
지지파들을 누르는 정당한 사유, 겔릭이 생각한 방법은 레이얀의 자질을 시험해 보는 것이었다. 애초에 영주 후계자에게 자질을 따지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지만 이미 실권은 장로들에게 있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문제로 삼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 권한에 따라 우리는 후계자가 충분한 자질을 지녔는지 볼 권리가 있소.”
“…….”
레이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겔릭에게서 받아 든 서류를 읽고 있었다.
그곳에는 레이얀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후계자 관련 내용이 명시되어 있었다. 그렇게 되도록 법률을 레닐이 정했기 때문이다.
다 읽은 레이얀이 겔릭과 눈을 마주쳤다.
‘헉!’
이제야 레이얀의 두 눈을 똑똑히 바라본 겔릭이 움찔했다. 그저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았지만 레이얀의 눈동자에는 알 수 없는 마력이 있었다.
더 이상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슬며시 고개를 돌린 겔릭이 마른침을 삼켰다.
잠깐 마주친 그 짧은 순간에 온몸의 기운이 다 빠진 기분이었다.
‘무언가 달라졌다. 어떻게 된 일이지?’
그런 겔릭의 반응을 못 본 헥토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미 겔릭의 의도를 알았기에 빠르게 일을 처리할 생각이었다.
“그럼 바로 장소를 옮깁시다.”
말을 마친 헥토의 시선이 레이얀을 향했다.
일종의 자리에서 먼저 일어서라는 신호였다. 하지만 레이얀은 여전히 겔릭을 바라보고 있었다.
울컥.
‘날 무시해?’
“어서 자질을 보러 갑시다.”
헥토는 끓어오르는 화를 삭이며 다시 말했다. 그러면서 기세를 은연중에 흘려보냈다.
기세란 마나를 다스리는 자들이 약자를 억압할 때 사용하는 일종의 공간 장악이었다.
많은 살인을 할수록 고강해지는 살기와 다른 이것은 지닌 마나의 양에 따라 기세의 강도와 범위가 달랐다.
헥토는 4클래스 마법사답게 회의실 내부를 장악하며 레이얀에게 기세를 흘렸다. 다른 장로들은 헥토의 기세를 느끼고 온몸에 마나를 둘렀다. 아직 헥토의 컨트롤 실력이 미숙하기에 한곳에 집약되게 기세를 흘릴 수는 없는 것이다.
몸을 보호한 장로들은 레이얀의 반응을 기대하며 상황을 흥미로운 시선으로 지켜봤다.
수치상 소드 엑스퍼트 하급이 지니는 마나 양은 4클래스 마법사에 비견조차 되지 않기 때문에 견디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오기를 부리면서 버틸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될 경우 내부의 마나가 진탕 되어 자칫 불구의 몸이 될 수도 있었다.
마나를 다루는 자들 중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기에 레이얀이 일어날 것이 뻔했다.
헥토 또한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레이얀을 바라보았다.
‘응?’
장로들의 예상과는 달리 레이얀은 태연했다. 오히려 여전히 겔릭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레이얀의 모습에 헥토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기세를 조절했다고 하더라도 아직 마나 컨트롤이 미숙했기에 공간을 장악한 헥토의 기세를 소드 엑스퍼트 하급이 받아넘길 수는 없었다.
그 말은 레이얀이 하급을 벗어났다는 것이 되었다.
‘오호, 수련 좀 했나 보군.’
헥토의 눈에 서렸던 이채가 금세 사그라졌다. 그래 봤자 자신의 밑이었기 때문이다.
‘어디 이것도 버틸 수 있나 보자!’
파앗.
무형의 기운이 보다 무겁게 대기를 짓눌렀다. 그제야 레이얀의 고개가 헥토를 향해 천천히 돌아간다.
그리고 모두의 예상과는 다른 반응이 비추어졌다.
“지금 날 핍박하는 것인가?”
“……!”
전혀 생각지 못한 반응에 헥토의 표정이 멍해졌다. 벼랑에 몰린 어린 영주가 대들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레이얀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