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진마대제 1권(9화)
Chapter 3 후작의 공표(3)
디엔은 지금까지 레이얀과 관련되었던 정보에 의해 자신들이 속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이게 어디 성인군자가 재현했다는 인간의 모습인가!
가차 없이 폭력을 휘두르는 것과 어떠한 상황에서도 냉정을 유지할 법한 눈동자는 평범한 인간이 가질게 못 되었다.
디엔은 기필코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의무감에 휩싸였다.
“너는 벗어나지 못한다.”
마치 디엔의 생각을 알기라도 하듯이 레이얀이 말했다.
여전히 높낮이가 없는 음성이 들리기 무섭게 레이얀의 두 눈이 붉게 물들어 갔다.
상대의 기억을 더욱 깊게 읽으려 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디엔은 피할 새도 없이 붉은 눈동자를 마주하며 머릿속이 뒤흔들리는 통증을 느꼈다.
그리고 레이얀은 기술을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디엔의 몸이 경련에 가깝게 떨려도 더욱 집요하게 그의 기억 속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이내 디엔의 눈에 생기가 사라졌다.
멱살을 풀자 디엔의 시체가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특급 어쌔신이라는 고강한 실력에 맞지 않는 허무한 죽음이었다.
“졸개치고는 겔릭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구나.”
방금 읽은 정보를 떠올리며 레이얀이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치밀한 놈들이군. 애초부터 전쟁은 시선 돌리기에 불과했던 건가.”
레이얀은 디엔의 얕은 기억만으로 전반적인 겔릭이 속한 조직의 움직임을 꿰뚫어 보았다.
“그렇다면 노리는 건 외부 붕괴가 아닌 내부겠군.”
디엔의 단편적인 기억들로 조직의 전반적인 목적을 추론해 내고 있었다. 보통 인간이라면 근처조차 가지 못할 것을 레이얀은 거의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잠시 디엔을 바라보던 레이얀이 침대로 몸을 돌렸다.
“너흰 발판을 잘못 정했다. 시작도 전에 모조리 죽고 말 것이다.”
자신의 영지를 기어 다니는 바퀴벌레를 살려 둘 생각은 없었다. 그 씨를 멸할 작정이다.
어두운 방 안에서 번뜩이는 레이얀의 두 눈이 지긋이 감겼다.
다음 날 아침, 레이얀은 평소와 다른 아침을 맞이했다.
평소의 아침은 침실에 들어선 하녀가 오늘 입을 예복을 옷걸이에 걸어 두고 휘장을 걷은 후 방을 나서고 레이얀이 깨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문을 열고 몇 발자국 들어서자마자 지른 하녀의 비명 소리에 슬며시 눈이 뜨였다.
애초에 잠을 잘 필요도 없지만 인간의 육체를 가진 후부터 육체가 호소하는 피로로 인해 잠을 자기 시작했다.
여전히 감각은 깨어 있고 뇌조차 깨어 있지만 육체만이 잠드는 것이다.
눈을 뜬 레이얀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저앉은 하녀가 품에 안고 있는 옷을 빼서 갈아입고는 방을 나섰다.
한평생 동안 볼일이 없을지도 모르는 시신을 본 하녀에게 위로 한 마디 하지 않고 레이얀은 곧장 집무실로 향했다.
그리고 곧이어 달려온 기사들로 인해 시신은 치워졌고 디엔의 행색과 품에 지닌 무기들로 인해 암살자임이 드러났다.
그리고 곧 성 안에 모든 이들에게 소식이 전해졌다.
간밤에 암살자가 침입했고, 그 암살자는 영주 방 주변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상급 기사가 기척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 실력자였다. 하지만 그 뒤가 압권이었다.
그런 고강한 실력의 암살자가 죽어 있었단 것이었다.
아무런 외상도 없이 그냥 바닥에 쓰러져 죽어 있었던 것이다.
외상이 없는 것으로 보아 검이나 마법으로 죽은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성 안의 사람들은 미지의 고수에 대해 더욱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미 일곱 장로를 죽인 것이 자신의 어린 영주인 레이얀이 한 것이 아님을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 * *
시간은 거꾸로 돌아가 막 레이얀에게 출진 명령을 받은 록펠에게 돌아간다.
록펠은 윈스톤 자작가의 어이없는 공문서에 화가 나기에 앞서 황당함을 느꼈다.
하지만 사색에 빠져 있을 여유가 없었다.
지금은 레이얀의 명령이 최대 과제였다.
갑작스러운 출진 결정이었지만 항시 전투태세이며 2주 전에 얘기를 들었기에 록펠은 빠르게 출전 준비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식량부터 해서, 진출로와 갖가지 것이 부족하였지만 이대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어린 영주 혼자 보낼 수는 없지 않겠는가.
물론, 록펠은 이번 전투에 반드시 참여할 미지의 고수를 보는 것이 목적이었다.
레이얀이 20명에서 30명 사이의 소규모 병력으로 전력을 구축하라 말했었다.
아무리 자작가라도 소드 엑스퍼트 상급 3명과 중급 20명으로 성을 함락하기란 어폐가 있었다.
그곳에도 마법사와 기사가 있기에 공성전을 한다면 필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레이얀은 소규모 병력을 명했다.
그 말은, 레이얀이 섭외한 고수가 참여한다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록펠은 레이얀 명령 반, 고수를 견식하고 싶은 마음 반에 일을 처리했다.
그렇게 록펠이 모든 준비를 마쳤을 때 동이 트고 있었다.
기사들을 정비시키고 있는 록펠을 향해 하녀가 빠르게 달려왔다.
하녀를 보며 록펠이 의아함을 지녔다. 록펠의 곁에 서자 하녀가 귀에 대고 조심스레 얘기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록펠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뭐, 뭐라! 영주님이 암습당하셨단 말이냐!”
상당히 큰 목소리였기에 기사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어휴. 네, 하지만 다치지는 않으셨어요.”
갑작스런 고함에 짧게 한숨을 내뱉은 하녀가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그런! 어서 빨리…….”
레이얀의 집무실로 걸음을 옮기려던 록펠이 멈추어 섰다.
기사들이 출전 준비를 하고 있는 장소의 건너편에 있는 정원을 걸어가고 있는 레이얀의 모습이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레이얀이 정원에 놓인 말에 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록펠이 기겁했다.
“허, 헉! 어, 어서 빨리 준비하거라!”
그 말과 함께 록펠 또한 빠르게 갑옷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레이얀을 흘깃흘깃 살펴보았다.
‘설마…….’
먼저 출발하지는 않을 것이다.
암습의 위협까지 받은 상황에서 아무리 강심장이라 하더라도 바로 전투에 뛰어들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록펠의 기대는 한 발을 뗀 레이얀으로 인해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진마대제 1권(9화)
Chapter 4 윈스톤 자작가(1)
동이 트자마자 침실에서 나온 레이얀은 말에 올랐다.
미처 다른 기사들은 준비가 덜 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레이얀은 말을 몰아 성을 빠져나갔다.
성을 빠져나온 레이얀은 고개를 들어 자신을 사정없이 내리쬐고 있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눈동자에 기막을 쳤기에 장시간 바라보고 있어도 눈이 아프지는 않았다.
‘이런 느낌인가?’
온몸을 마치 포근한 무엇인가가 감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실제로 지금 받고 있는 태양빛이 레이얀이 진마와 인간의 생을 통틀어 처음으로 제대로 받고 있는 빛이었다.
물론 성 안에서 창문을 통해 비추어 오는 태양빛은 받아 보았지만 이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애초에 태양빛을 제대로 받고자 하는 연구로 인해 이 모든 일이 발생하였지만, 태양빛을 이제야 쬐다니.
하지만 레이얀은 그 점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았다. 햇빛을 쬐는데 제약이 없어진 이상, 인간이 된 그날 당장 태양을 보러 뛰쳐나갈 이유가 없었던 것도 있지만 그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지금은 자신의 것이 된 영지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그것은 종족에서 오는 특유의 자긍심이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최우위에 선 진마, 그들이 가지는 자긍심과 자존심은 인간이 상상하는 것 이상의 것이었다.
그렇게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는 레이얀의 뒤로 가장 먼저 록펠이 말을 몰고 뒤따랐으며 그 뒤로 속속들이 기사들이 합류했다.
영주 성 내에 기거하는 엑스퍼트 상급 3명과 중급 20명이었다.
‘성’의 전력 태반이 빠져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여기서 윈스톤 자작가까지의 거리는 영주 성에서 왕복으로 2주 조금 넘게 걸렸으며, 이 출전 자체가 갑작스레 정해졌기에 어느 누구도 침공을 계획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록펠은 또다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수선한 영지 사정은 다른 조직들 때문이었다. 실제로 일곱 장로를 지지하던 세력들이 기거하는 곳은 후작령 내부에 있었다. 전혀 드러난 것은 없지만 일곱 장로의 가족들을 제거하며 마찰이 있었던 것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렇기에 록펠이 놀란 것이다. 설마 그 조직들의 침공이 있을지도 모르기에 ‘내일’이라는 성급한 출발을 지시한 것인가?
예전이라면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레이얀이라면……. 충분히 그럴 것만 같았다.
앞서 가는 레이얀의 등을 바라보며 록펠은 속으로 다짐했다.
‘기필코 지켜 내겠습니다. 절대 그분과 같은 행보를 걷게 하지 않겠습니다.’
록펠의 두 눈이 충성심에 진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