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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마대제 1권(12화)
Chapter 4 윈스톤 자작가(4)
돌아가서 에론테일 공작에게 올릴 보고에 벌써부터 얼굴이 화끈거렸다.
겨우 애송이에게 정치판 노림수 중에 가장 하책으로 조롱당했다는 생각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만큼 일곱 장로의 죽음은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그렇기에 다른 수를 생각해 볼 겨를 없이 단순히 세간에 난 ‘의문의 고수’로 단정 짓게 된 것이었다.
모든 생각을 마치고 베로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때 체론이 말에서 내려섰다.
록펠에게 받은 검을 쥐고 있는 레이얀은 무심한 눈빛으로 말에서 내려서는 체론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하는 것이냐! 내려서지 않고!”
여전히 말에서 오연한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레이얀을 향해 체론이 호통을 쳤다.
“내가 왜 내려서야 하지?”
그 말에 검을 쥔 체론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본인이 굳이 나서야 할 가치가 있냐는 대답으로 들려왔기 때문이다.
다시 호통을 치려던 체론이 별안간 떠올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가만? 왜 이놈에게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지?’
오러 나이트인 베로크가 가장 먼저 느꼈던 점을 체론은 지금에서야 느끼고 있었다.
작은 규모의 후작가 병력에 울컥한 심정도 있었지만 체론의 오만함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
젊은 나이에 꿈의 경지에 가까운 최상급에 올랐기에 자부심이 대단한 것이었다. 그 자부심은 주위의 조언을 해 주는 스승이 없어 오만함으로 변모했다.
스승 없이 체론이 최상급에 오르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를 가르친 스승이 있기는 하지만 그는 자작가의 기사단장에 지나지 않았다.
그 또한 겨우 중급을 바라보는 경지였다.
아무리 청출어람이라지만 이것은 과한 면이 있었다. 그럼에도 체론이 최상급 경지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소위 천재였기 때문이다.
수천 명의 한 명 꼴로 탄생하는 선천적으로 마나를 체내에 들일 수 있는 축복 받은 인간.
체론이 그것에 속하였다. 그렇기에 빠른 시간 내에 깨달음이 필요하지 않는 순수 마나 양으로 최상급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축복 받은 인간 모두가 빛을 발하는 것은 아니었다. 스승이 없어, 가문이 없어 묻혀 버리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체론은 자신이 마나에 대해 타고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남들에 비해 주위의 마나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주위에 모든 기사들의 마나를 상세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것에서 의문을 품은 것이다.
레이얀에게는 들려온 풍문처럼 엑스퍼트 하급에 해당하는 마나가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인간이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자 체론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내 베로크와 같은 결론을 내렸다.
‘개소리였구나!’
모든 것이 짜여진 각본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말에서 내려서지 않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겁이 나겠지! 도무지 상대조차 되지 않을 테니!’
아무런 능력조차 없이 그저 정치계에서나 할 법한 정보 노림으로 이 자리에 섰으니 그럴 만도 했다.
체론이 기고만장한 표정으로 어깨를 폈다. 그리고 자비로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지금이라도 패배를 인정한다면 내 친히 왕가에 고해 너에게 능력에 준하는 작위를 내려 주마!”
갑작스런 체론의 태도에 록펠과 멕스 그리고 후작가 기사들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체론의 자비로운 어조에는 명백히 조롱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후작가 기사들이 전의를 끌어 올리며 검을 움켜잡았다.
그런 반응을 무시한 체론이 레이얀의 대답을 기다렸다.
‘응?’
줄곧 레이얀을 응시하고 있었기에 미세한 변화를 알 수 있었다.
분명 무엇인가가 달라져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던 찰나 레이얀의 손에 쥐어졌던 검이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레이얀에게 한시도 눈을 뗀 적이 없었다. 그런데 검이 사라져 있었다.
체론이 의아해하고 있다면 베로크는 정반대의 얼굴이었다.
‘방금 손속은 대체…….’
체론은 아예 보지 못하였지만 베로크는 흐릿하게나마 움직이는 레이얀의 손을 볼 수 있었다.
잠깐 흐릿해졌다 생각했을 때 이미 그의 손에는 검이 들려 있지 않았다.
그때 이번엔 레이얀의 신형 전체가 흐릿해졌다고 느꼈을 때 옆에서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미처 베로크의 안력이 따라가지 못했다.
“컥!”
레이얀이 어느새 30m 남짓 떨어져 있던 체론의 앞에 나타나 머리를 움켜잡고 있었다.
그리고 가타부타 말도 없이 체론의 뒤통수를 바닥에 내리찍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가공할 만한 힘으로 인하여 체론의 머리가 바닥 깊숙이 박혀 들었다.
레이얀의 손이 팔꿈치만큼 땅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온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오러 나이트의 베로크조차 대응하지 못한 속도였으니 다른 기사들은 상황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다시 밖으로 나온 체론 역시 고통보다는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채 의문을 완성하기도 전에 다시 땅으로 박혀 들었다.
엄청난 속도였다.
그것이 수차례 반복되었을 때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베로크가 검을 뽑았다.
스르릉.
맑은 검명과 함께 드러난 검신이 보이기도 전에 베로크의 신형이 레이얀을 향했다.
체론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 몸이 먼저 반응한 것이다.
초를 다투는 광속의 시간이었지만 베로크는 달려 나가는 도중 레이얀과 눈이 마주쳤다.
“……!”
그 짧은 시간 마주본 레이얀의 붉은 눈동자는 지독하게 무심했다.
그것이 베로크의 본능을 자극했다.
살기는커녕 기세조차 느껴지지 않지만 상위 포식자 앞에 놓인 쥐새끼마냥 몸속 깊은 곳 어딘가는 레이얀에게 다가감을 거부했다.
하지만 베로크는 본능에 충실한 사람이 아니었다.
정확한 논리계산과 철저한 이론으로 움직이는 책사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은 본능보다 이성이 더욱 강했다.
그렇기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떨쳐 버리고는 레이얀을 베는 검에 온 정신을 다했다.
순식간에 사정거리에 든 레이얀을 향해 횡으로 검을 그었다.
상급에 이른 록펠의 눈으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빠른 공속이었다. 그리고 검을 휘두른 베로크는 그 찰나지간에 미소를 머금었다.
역시 본능은 그저 본능일 뿐이었다.
그의 검이 어느새 레이얀이 도무지 피할 수 없는 간격까지 근접해 있었다.
이제 곧 섬뜩한 파육성 소리와 함께 손끝으로 이질감이 전해져 올 것이다.
레이얀은 8위인 레론에게조차 미치지 못하는 인간들에게 뱀파이어 능력을 사용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렇기에 영혼으로 인해 변하게 된 타고난 신체와 압도적인 힘으로 누를 생각으로 달려들었다.
역시나 자신이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고스란히 잡히는 두상에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자신의 모든 능력을 발휘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리고 가히 벼락보다 빠를 만큼 체론을 초원의 바닥에 처박았다.
그것이 수차례 됐을 때 레이얀이 처음에 눈여겨보았던 중년인이 달려들었다.
짜증 나리만치 느려 터진 모습에 절로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참아야 했다.
귀찮은 일을 대신해 줄 수하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중년인의 실력을 시험해 보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압도적인 실력 차를 내보여서는 안 된다.
베로크의 검이 지척에 달했을 때 레이얀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레이얀의 허리를 노리고 들어오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엇!”
예상치 못한 결과에 당혹성을 내뱉은 베로크는 당혹스런 시선으로 아래를 보았다.
역시나 몸을 숙여 검을 피한 레이얀이 한쪽 주먹을 내뻗고 있었다.
공격 후 검을 회수하기 직전인지라 전신에 허점이 드러나 있었다.
오러 나이트에 이른 베로크는 공격 후 상당히 빠르게 검을 회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짧은 간극에 레이얀이 파고들어 공격을 하고 있었다.
방어도 회피도 못하는 타이밍이었다.
퍼억!
“크윽!”
복부를 강타당한 베로크의 신형이 튕기듯이 뒤로 날아갔다.
털푸덕.
이내 중심을 잡지 못한 베로크가 땅바닥을 굴렀다.
“허억!”
록펠이 탄성을 내뱉었다. 베로크의 검이 레이얀에게 이르렀을 때 얼마나 철렁했었던가.
절대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음에 이어진 일련의 상황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레이얀의 속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도저히 눈으로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그건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록펠보다 경지가 낮은 기사들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체론과 얼핏 일견하기에도 실력이 고강해 보이는 중년인의 모습에 경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만들어 낸 레이얀을 향해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보내었다.
“헉! 서, 설마! 의, 의문의 고수가……?”
후작가 기사 누군가에게서 내뱉어진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후작가 기사들 전원이 둔기에 머리를 강타당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설마 일곱 장로를 죽인 자가 레이얀이란 말인가?
설마가 아니다. 확실히 레이얀일 것이다.
록펠마저도 따라잡을 수 없는 무위가 그 증거였다. 기사들의 표정이 이내 확신으로 변해 갔다.
그리고 가슴 속 깊은 곳에 있던 죽음이란 두려움이 사라져 갔다.
록펠만 윈스톤 기사들의 기세를 느꼈던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사이 체론은 수차례 바닥과의 충돌로 인해 생겨난 어지러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지금의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치 꿈을 꾼 것만 같았다.
그때 현실임을 알리는 레이얀의 발이 얼굴에 올려졌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체론이 벗어나고자 발버둥 쳤다.
“크윽!”
발버둥을 쳐도 발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마치 얼굴이 붙은 것마냥 밀리지도 않았고 심지어 처음 올린 자리에서 손톱만큼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 이놈! 감히 이게 무슨 짓이냐!”
체론이 분노가 실린 일갈을 토해 냈다.
그 말에 레이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주 미세한 움직임인지라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감히란 말은…… 네가 나보다 더 높을 때 쓸 수 있는 말이다.
꽈악.
“커억!”
체론의 얼굴이 바닥에 반쯤 박혀 들어갔다.
그때 자리에서 일어난 베로크가 여전히 쑤셔 오는 복부의 고통을 삼키며 소리쳤다.
“당장 발을 떼지 못하겠소! 기사도를 익힌 기사가 어찌 그리할 수 있단 말이오!”
마법 가문과 기사 가문 어디에 속하던 작위를 하사 받은 가문은 기본적인 기사도 소양을 배우기 마련이었다.
약자에 대한 자비와 관용. 그것을 빌미로 베로크가 소리치고 있는 것이었다.
“우습군. 우린 전쟁 중이 아니었나?”
“……!”
레이얀의 반박에 베로크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생사를 건 활로에서 기사도를 운운하는 건 우습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생사를 걸었다고 보기에는 어폐가 있었기에 베로크가 다시금 소리쳤다.
“당신은 약자에 대한 자비도 없는 것이오!”
“주인을 문 개에게 자비가 없을 뿐이다.”
“…….”
사람의 말문을 막히게 하는 것에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했다.
마땅히 반박할 말이 없는 베로크를 향해 레이얀이 일침을 가했다.
“말이 많군. 기사들은 전쟁을 입으로 치루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