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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마대제 1권(14화)
Chapter 4 윈스톤 자작가(6)


“이…… 무슨?”
그때 레이얀이 지독하게 차가운 눈으로 베로크를 본다.
“내가 그리 만만했나?”
“그, 그게 무슨?”
베로크가 당황했다.
레이얀의 어투는 전력을 다했냐는 것보다 마치 자신이 먼 곳에 있는 기척들을 살펴본 사실을 아는 것 같은 뉘앙스를 풍겼다.
하지만 이내 감정을 추슬렀다.
그것을 어찌 알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의 머릿속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자신의 검을 막았기에 내뱉은 거만한 말로 치부했다.
그러자 또다시 이 사태가 믿기지 않았다.
자신의 검을 어떻게 맨손으로 막을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검에 머금은 마나와 기세를 어떻게 순식간에 차단할 수 있단 말인가.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자신이 장악한 공간에서 버금가게 싸우려면 비슷한 경지여야 했으며, 장악한 공간을 뺏으려면 훨씬 웃도는 경지여야 했다.
이 경우는 공간을 빼앗긴 것이었다.
그렇다면 레이얀이 마스터란 말인가?
자신이 생각하고도 너무 어이가 없어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대륙에 드러난 것만 10인에 불과한 마스터를 이 새파란 꼬맹이가 이루었다니.
너무 과한 생각이었다.
그때 레이얀의 왼손이 뒤로 젖혀졌다.
너무나 느린 동작이었고, 육안에 확연히 들어왔다. 자연스레 그것을 막고자 검을 잡은 양손 중에 오른손을 내밀었다.
원래라면 검을 회수하여야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기에 일단 주먹부터 막고자 한 것이다.
허나 그 주먹이 더욱 빨랐다.
너무나 느려 주먹의 진로마저 예상할 수 있었던 움직임이었지만 막지 못하였다.
조금 전 복부에 맞은 것과는 차원이 다른 충격이 베로크의 복부를 시작으로 전신을 강타했다.
“크허억!”
온몸이 거대한 충격에 한차례 경련을 했다.
그리고 관성의 법칙에 따라 당장이라도 뒤로 날아갈 것 같이 허리가 굽혀졌다.
그럼에도 베로크의 발은 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대로 날아가게 되면 검을 놓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치욕을 겪을 수는 없었다.
그때 레이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저 때린 것에 지나지 않지만 그것을 버텼다는 사실에 기분이 나쁜 것이다.
그것에 베로크가 다른 것에 신경을 쓴 점이 부가되어 레이얀을 자극했다.
다시금 레이얀의 왼손이 뒤로 향했다.
베로크의 눈에 두려움이 스쳤다.
막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본능으로 느낀 것이다.
저것을 또 맞게 되면 이번엔 반드시 날아갈 것이었다. 그 사실보다는 또다시 고통이 찾아오는 사실이 더욱 싫었다.
그 정도로 참지 못할 끔찍한 고통이었다.
베로크의 눈동자가 두려움에 떨리고 있었다.



진마대제 1권(14화)
Chapter 5 첫 번째 수하(1)


“아…….”
록펠의 입에서 다시금 탄성이 튀어나왔다. 아까와는 달리 주군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슬픔과 자신의 약함에 대한 원망은 서려 있지 않았다.
두 눈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져 있었다.
그건 다른 기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200에 달하는 자작가의 기사들 또한 지금의 상황에 놀라워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주군인 체론이 당하고 정신이 없는 와중에 베로크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그제야 기사들이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주군에게 수모를 안겨 준 레이얀이 베이길 기대했다.
그런 기대는 산산이 무너져 내렸다.
강맹한 기세를 머금었던 검이 가녀린 손에 잡히더니 그 자리에 굳은 듯이 멈췄다. 기세 또한 흩날리는 바람마냥 흩어졌다.
그것만으로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다음에 이어진 사태는 더욱 황당했다.
자신들의 눈으로도 뻔히 보이는 주먹을 오러 나이트인 베로크가 고스란히 맞아 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어떠한 기운도 서려 있지 않던 맨주먹에 맞은 베로크는 금방이라도 뒤로 날아갈 것만 같았다.
표정 또한 고통에 한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그때 또다시 레이얀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콰앙!
아까는 들을 수 없었던 거대한 충돌음이 주위를 울렸다. 굉음에 지축 또한 일순간 흔들렸다.
왈칵.
“크으으……!”
피를 한 사발이나 내뱉은 베로크의 초점이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이…… 이 고통은 대체…….’
사람의 힘이 아니었다.
마나가 실린 것도 아니었다. 어떠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눈앞에서 주먹이 날아들어도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극심한 고통이 찾아왔다.
신음성조차 내뱉을 수 없었다.
이대로 쓰러지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건 오러 나이트라는 지고한 경지에 오른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쓰러질듯 하면서도 베로크는 여전히 왼손으로 검을 잡은 채 비틀거리며 서 있었다.
“허허…….”
록펠의 헛웃음이 고요한 일대에 흘렀다.
오러 나이트.
오러 나이트는 소드 엑스퍼트 하급, 중급, 상급, 최상급의 경지를 모두 지나야 도달할 수 있는, 모든 기사들이 바라는 꿈의 경지였다.
오러 나이트의 전유물인 오러 블레이드는 마나 소드의 정수라고 할 수 있었다. 쓸모없는 유실은 막고 최고의 효율을 내는.
그만큼 오러 나이트는 그 경지에 올랐다는 자체만으로도 추앙 받을 수 있다.
그런 오러 나이트가 척 보아도 가녀린 청년의 주먹 2방에 엉망진창이 되었다.
베로크의 내부를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산발된 머리와 입가에 흐르는 선혈 그리고 비틀거리는 신형에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오러 나이트를 그렇게 만든 것이 다름 아닌 자신의 주군 레이얀이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수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체론 윈스톤 자작을 공격하는 순간부터 오러 나이트를 날려 버리는 순간까지.
보고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점은 레이얀이 일말의 마나도 쓰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믿지 못하였다.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일곱 장로를 죽이고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의문의 고수는 레이얀이 맞았다. 그만큼 레이얀의 신위는 눈으로 따라잡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러 블레이드를 맨손으로 잡고 기세를 빼앗다니.
록펠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건 다른 기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레이얀이 오러 블레이드에 버금가는 검술을 보였다면 감탄하였을 텐데. 그저 손으로 제압했기에 쉽사리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때 레이얀이 베로크의 검을 쥐고 있던 오른손을 풀었다.
갑작스레 풀린 검에 베로크의 신형이 크게 휘청거렸다. 그럼에도 쓰러지지 않았다.
그 모습에 레이얀이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
베로크가 어떠한 생각으로 버티고 있는지 알기 때문이다. 강자로서 무릎을 꿇을 수 없다는 자존심과 기사로서 검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자긍심.
그 이념들이 베로크를 쓰러지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이 정도라면 적이라도 감탄하고 베로크에게 예를 표할 것이었다. 하지만 운이 나쁘게도 이번 적은 상대를 고려하는 자가 아니었다.
상대의 생각과 심정을 고스란히 읽어 낼 수 있어도 일말의 관심조차 주지 않는 자였다.
레이얀이 오른손을 뒤로 당겼다.
왼손이 아닌 오른손으로 맞게 된다면, 두 차례의 공격에 정신이 혼미한 베로크는 불구가 되거나 목숨을 잃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레이얀은 공격을 할 생각이었다.
실력을 시험해 보고 쓸 만할 경우 수하로 쓸 작정이었지만 기사도를 운운하며 예의를 따지는 것에 마음이 변하였다.
레이얀이 아무런 기세가 실려 있지 않은, 바람의 마찰을 받아서 생겨날 인기척 또한 느껴지지 않는 주먹을 지긋이 내뻗었다.
그때 인자한 목소리가 일대에 흘렀다.
“허허, 그만하게나.”
모든 이들이 자신의 귓가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흠칫했다.
마치 바로 옆에서 말을 한 것 같았다.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한다. 그곳에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멋들어지게 기른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서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혀 왔다.
노인의 인자한 눈빛에서는 형형한 안광이 흘러나오고 있었으며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흘러나왔다.
그만큼 노인이 내뿜는 존재감은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레이얀은 베로크에 닿기 직전에 주먹을 멈추었다.
노인이 다가오는 기척은 이미 느꼈었다. 그런데도 노인의 등장에 주먹을 멈춘 이유는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더욱 일찍 이곳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갑작스레 이곳에 등장한 노인, 알페론은 이곳에 오기 전의 일을 떠올렸다.

* * *

“허허, 어떻더냐?”
“마음에 안 들어요.”
알페론의 맞은편에 자리한 탐스러운 금발의 여인이 진녹색의 눈망울을 흘기며 대답했다.
탐스러운 금발을 따라 내려오는 고운 아미와 오뚝한 콧날 그리고 아담한 입술. 이 모든 것의 바탕이 되는 뽀얗고 고운 피부는 아기를 연상케 했다.
이 세상 모든 미의 기준이라고 할까? 그 정도로 여인은 상당히 아름다웠다.
알페론은 자신의 손녀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보는 혼처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니 애가 탈 지경이었다.
한가락 하는 각 왕국의 왕자들과 제국의 황태자들을 만나 보았다. 그런데도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
오죽하면 5약에 속하는 베론 왕국의 왕자를 보러 왔을까.
오는 혼처도 마다하고 가는 혼처도 마다하고, 알페론은 미칠 지경이었다.
그때마다 자신의 아들이자 알로이크 제국의 황제인 필리아스의 부탁이 떠올랐다.
‘이번에 정말 꼭! 마음을 돌려야 합니다! 마지막 혼처라고요!’
사실은 마지막 혼처가 아니었다. 사돈이 되어 이득을 취할 수 있는 쓸 만한 혼처 중 마지막이란 뜻이었다.
근데 그 혼처마저도 실패했다. 돌아간 후에 며칠 동안 아들에게 시달릴 생각에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할아버지, 정말 모르겠어요?”
“뭐를 말이냐?”
“그들은…… 저, 아이린 자체를 본 것이 아니라 제 외모를 본 거라고요.”
“…….”
손녀의 말에 알페론이 쓴 미소를 머금었다.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지금껏 지켜본 혼처 중에 그렇지 않은 왕자나 황태자는 한 명도 없었다.
“어쩌겠느냐? 네가 잘난 것이 잘못이지. 그러니 조금이라도 시간을 주고 서로를…….”
“싫어요.”
단호한 음성에 알페론이 앓는 소리를 냈다.
“끙…… 네 아비를 알잖느냐. 이 할애비가 안쓰럽지도 않느냐?”
분명히 베론 왕국에 도착하고 왕자를 면담해 본 후, 2일 만에 성을 다시 나왔단 사실을 알면 필리아스가 상당히 귀찮게 굴 것이다.
“그래도…… 싫은걸요…….”
아이린의 힘 빠진 어조에 알페론이 애처로운 시선을 보냈다.
자신의 손녀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저 황족으로 태어나 원하는 신랑감도 제대로 못 찾는 불쌍한 신세이거늘.
“후우……. 그래 내가 잘 말해 보마.”
짧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내저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기에 앓는 소리를 냈던 것일지도 몰랐다.
알페론의 한마디에 언제 기죽었냐는 듯이 아이린이 배시시 웃었다.
또다시 당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저 미소 앞에서 쓴소리를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허탈한 웃음을 흘리고 있을 때 알페론의 표정이 굳었다.
“……왜 그러세요?”
갑작스런 알페론의 변화에 아이린이 당황했다.
“아, 아니다…… 허허, 갑자기 아주 오래전에 했던 약조가 생각나서 말이다.”
“……예?”
이해되지 않는 말에 아이린이 되물었다.
“이 근방에 지내는 친우와 예전에 했던 약조가 떠올랐구나. 허허, 이 할애비는 잠시 그 약조를 지키러 갔다가 오마.”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갑작스런 부재 선언에 아이린이 음성을 높였다. 이대로 자신만 황궁으로 돌아가면 아버지의 따가운 시선을 어찌 견디란 말인가!
그런 아이린의 마음을 안다는 듯이 알페론이 말했다.
“금방 돌아오마. 아주 잠깐이면 될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