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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마대제 1권(17화)
Chapter 5 첫 번째 수하(4)
자작가의 성에 도착한 레이얀은 경비가 지키고 있는 굳게 닫힌 정문에 서 있었다.
안으로 단숨에 이동할 수 있었지만, 자신의 것이나 다름없는 곳을 쥐죽은 듯 조용히 들어갈 이유가 없었다.
레이얀이 한 걸음 옮겨 문으로 다가갔다.
그때 경비병 처소에서 비를 피하고 있던 기사가 레이얀을 발견하고 뛰쳐나왔다.
“거기서 멈춰라!”
“…….”
저벅저벅.
드넓은 대지를 두들기고 있는 빗소리보다 더욱 선명하게 발소리가 들려왔다.
“더 이상 다가오면 베겠다!”
경고에도 불구하고 레이얀이 걸음을 멈추지 않자 기사가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그 모습을 처소에 있는 동료들이 흥미롭게 보고 있었다.
자작가의 전투 소집령으로 성에 도착하고, 전쟁 준비만 죽도록 했다. 그리고 전쟁 당일에는 후발대로 남아 성이나 지키고 있어 지겨운 참이었다.
그 와중에 비까지 내려 성을 지키는 것이 더욱 지겨워졌다.
만약의 역습을 대비하여 굳게 닫힌 성문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고, 밖에서 하염없이 내리는 비나 보고 있으니 지겨울 만도 했다.
그러던 차에 이상한 청년이 등장했다. 지척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장대비가 세차게 내리는데 후드조차 쓰지 않은 것으로 보아 정신이 나간 것이 분명했다.
지겨운 차에 짧게나마 좋은 구경거리가 생긴 것이다.
“어이, 빅. 살살하라고!”
“하하. 빅이 진다에 1실버 걸지 어때?”
“뭐? 이 양반이. 그럼 난 빅이 이긴다에 2실버를 걸…….”
대놓고 청년을 무시하던 그들의 대화는 지축을 흔드는 폭음에 이어지지 못했다.
콰아아앙.
“커, 커억?”
“저…… 저 무슨…!”
두꺼운 성문이 떨어지며 빅과 함께 성으로 날아가 버렸다. 이런 엄청난 일이 일어날 조짐조차 없었기에 기사들이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마스터에 이른 누군가가 베어 버린 것도 아니고 갑작스레 폭발음과 함께 성문이 날아가 버렸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터무니없는 일에 기사들이 패닉에 빠져 있을 때 성 안에 있던 기사들이 몰려나왔다.
그들은 만약에 처음 출전한 자작의 기사들이 패배할 경우 출전할 지원병이었다.
그만큼 체론의 준비성은 철저했다. 단지 그런 준비성 따위가 먹히지 않는 자가 적이었을 뿐이었다.
“무슨 일이냐?”
지원병의 대장을 맡고 있는 단트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 그게…….”
경비병이 말을 잇지 못하고 날아간 성문과 단트를 번갈아 봤다. 레이얀이 단 한 수만으로 날려 버린 성문이지만, 마스터도 쫓기 힘든 레이얀의 손속을 일개 경비병이 보았을 리 만무했다.
경비병이 아무 말도 못하자 단트의 시선이 정면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세차게 내리는 비에도 불구하고 후드를 쓰지 않은 청년이 서 있었다.
척 보아도 보잘것없는 청년인 듯했지만 이 주변에 있는 사람이 그뿐이었기에 단트가 물었다.
“너는 누구냐!”
“이곳의 주인이다.”
“뭐, 뭐?”
예상치 못한 대답에 단트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되뇌어 봐도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성문을 파괴한 범인이 청년이라고 결정 내렸다.
분명히 마법이 새겨진 아티펙트를 사용하여 폭발시킨 것이 분명했다.
청년한테 일말의 마나조차 느껴지지 않았기에 마법사일 리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후작가의 첩자냐!”
“…….”
레이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문답을 하는 자체가 레이얀은 짜증스러웠다.
그것은 곧 행동으로 나왔다.
저벅저벅.
청년이 별안간 성으로 걸음을 옮기자 단트가 당황하며 소리쳤다.
“멈춰라! 멈추라고 했다! 멈추지 않으면…… 히엑!”
“멈추지 않으면?”
단트는 입김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차가운 어조보다 순식간에 바로 앞에 나타난 청년의 신형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마치 귀신에 홀린 것만 같았다.
“네놈이 주인으로 모시던 자작은 끝났다. 정해라, 나를 주인으로 할 테냐 죽을 테냐.”
참으로 잔인한 선택지였다.
원래라면 이들 모두도 죽여야 했지만 그렇게 된다면 후작령의 병력이 줄어든다. 자연스레 주변의 타 영지가 노리게 될지도 몰랐으며, 전력이 조금이나마 줄어든 이 기회를 노려 타국에서 공격을 할지도 몰랐다.
정보는 어떻게든 새어 나가기 마련이었으며, 후작가와 자작가의 접전은 많은 이가 지켜보았기 때문에 소식은 금세 퍼져 나갈 것이다.
그렇기에 이들에게 선택지를 주는 것이다.
인간들이 성을 지키면 해결될 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이 마음만 먹는다면 후작 성에서 이곳까지 손쉽게 올 수 있지만 굳이 그런 귀찮은 짓을 할 이유가 없었다.
“…….”
단트는 놀란 가슴을 추스르고 청년의 말을 되뇌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서, 설마 레이얀…… 후작님이십니까?”
단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후작이란 칭호가 어색하였다.
“…….”
레이얀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것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단트의 인상이 굳어졌다.
자작가가 패배했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방금 청년, 아니 레이얀 후작의 움직임을 보니 가벼운 실력이 아님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가 직접 이곳에 왔다는 사실은 자작가의 패배란 답밖에 없었다.
자작을 이기지 않고서는 올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때 단트의 뒤쪽에 있던 기사가 끼어들었다.
“개소리하지 마라! 우리 자작님이…….”
서걱.
말을 내뱉던 기사의 머리가 섬뜩한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허, 허억!”
바로 옆에 있던 기사들이 기겁을 하며 거리를 벌렸다.
“이, 이게 무슨?”
그들의 의문 사이로 나지막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 말에 기사들은 레이얀이 목을 베었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선택은 자유다.”
그 말과 함께 레이얀이 성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 정도만 하더라도 레이얀은 많이 참은 것이었다.
괜한 수고스러움을 하기 싫은 귀찮음이 기사들의 목숨을 살린 것이다.
성문을 기준으로 둥글게 포진해 있던 기사들이 레이얀이 다가가자 절로 물러서며 길을 텄다.
기사 무리를 지나갈 동안 어느 누구도 레이얀에게 제제를 가하지 못했다. 그렇게 레이얀은 후작 성에 비해 작은 자작가의 성에 입궁하였다.
더욱 굵어진 비가 초라하게 남겨진 자작가의 기사들을 사정없이 때렸다.
레이얀보다 훨씬 늦게 자작가의 성에 도착한 록펠은 부서진 성문과 숙연한 표정으로 서 있는 기사 무리들을 보았다.
그리고 대략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의 주군이 먼저 도착하여 이곳을 정리한 것이 분명했다.
혈혈단신으로 성문을 부수고 성을 장악한다는 건 터무니없는 소리였지만 레이얀이라면 가능했다.
‘후우.’
아직도 마스터를 제압한 장면을 떠올리면 믿기지가 않았다.
고개를 한차례 흔든 록펠이 성 안에 있는 기사들에게 시선을 보내었다.
그들의 표정을 살펴본 록펠은 레이얀이 따로 움직인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전장에 있던 기사들은 이미 레이얀의 무위에 전투 의욕을 상실한 상태였다.
하지만 선발대가 패배하더라도 성에 남은 기사들은 주군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결국 마찰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레이얀이 그 점을 사전에 봉쇄한 것이다.
알 수 없는 소름이 돋아났다.
마치 모든 일을 예상하고, 의도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때 자작가의 기사들 무리에서 중년인이 걸어 나왔다. 스스로 단트라고 밝힌 그가 조심스레 록펠에게 물었다.
“저희 자작님은……?”
단트의 심정을 이해한 록펠이 대꾸보다는 고개를 돌려 보였다. 록펠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짐수레가 있었다.
단트가 그곳으로 머뭇거리다가 걸음을 옮겼다.
피에 점철된 1명의 노인과 자작님에게 도움을 주고자 왔던 중년인, 그리고…… 자신의 주군이 누워 있었다.
미약하게 움직이는 가슴이 셋 모두 살아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저 바닥에 박히는 공격만 받았던 체론은 정신을 차리고 받은 살기에 혼절하고 말았던 것이다.
“크흑.”
그 점을 알 리 없는 단트는 막상 눈으로 주군을 확인하고 나니 울분이 터져 나왔다.
단트가 후발대를 맡게 된 이유는 실력 부족이 아니었다. 체론이 그를 그만큼 믿은 것이다.
그 점을 떠나 단트는 충이 목숨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쓰러진 체론의 모습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단트의 신음성에 자작가 기사들의 고개가 더욱 처졌다.
그들을 지켜보던 후작가의 기사들이 성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베로크와 체론, 그리고 알페론이 실려진 수레를 내버려 두고.
선발대도 200명에 달하는 많은 수였지만 성에 있던 기사들의 수 또한 그에 육박했다. 자작가에 이토록 기사가 많은 이유는 에론테일 공작가의 기사도 섞여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작가에 존재하는 이들 중 이 점을 아는 이는 베로크와 눈을 마주치며 그의 기억을 읽은 레이얀뿐이었다.
적어도 100명은 될 법한 그들의 사이를 지나치는 록펠은 다시금 레이얀의 무위를 체감할 수 있었다.
이제는 자신마저도 두려움이 생길 정도였다.
레이얀은 더 이상 자신이 예전에 알던 사람이 아니었다. 꿈도 못 꿀 정도로 강하고 잔혹한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레이얀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록펠은 그렇게 되기를 바라였지만 막상 겪고 나니 두렵기만 했다.
피로 흥한 자는 피로 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레이얀이 망할지가 의문이었지만 두려움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후작가의 집무실보다 아담한 자작의 집무실에서 록펠은 레이얀을 면담했다.
“괜한 짓을 했군.”
“…….”
레이얀의 말이 무엇인지 알기에 록펠이 조심스레 대답했다. 레이얀은 알페론을 자작가 성으로 데려와 치료 중인 이유를 묻고 있었다.
“알페론 님을 죽게 내버려 둘 경우 알로이크 제국과 척을 지게 됩니다.”
“그럼 그들도 죽이면 그만이다.”
록펠의 표정이 아연하다 못해 새하얗게 질렸다.
레이얀이라면, 분명히 그러고도 남을 것만 같았다. 레이얀의 말이 이어졌다.
“주군에게 이를 드러낸 자에게 자비를 베푸는군.”
“……!”
록펠의 표정이 굳었다.
눈이 마주침으로써 그 사람의 생각과 가치관을 알 수 있는 레이얀은 록펠의 약한 부분을 이용하여 얘기했다.
전형적인 기사인 록펠에게 주군의 실망이야말로 가장 괴로울 것이기 때문이다.
레이얀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가 또 참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록펠은 사소한 일을 처리하는 것에 쓸 만했기 때문이다.
“다…… 다음부터는 절대 그러지 않겠습니다.”
록펠이 단호하게 말했다.
“지켜보지.”
간단한 대꾸와 함께 레이얀이 손짓했다.
이제는 익숙해진 록펠이 고개를 숙이고는 집무실을 나섰다.
록펠이 나간 후 영주만이 읽을 수 있는 자작가의 영지 서류를 읽으며 레이얀이 생각에 잠겼다.
‘답신이 없던 3곳 중 2곳이 이번 접전을 지켜봤군.’
접전에서 감지했었던 기척들을 떠올려 보았다. 레이얀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걸렸다.
‘기대되는군.’
어떠한 형태로든 2곳은 반응을 할 것이다. 더욱 후작가를 외면하던가, 타협을 하던가.
그들의 반응이 어떨지 레이얀은 기대가 되었다.
뱀파이어 때는 전혀 느낄 수 없었던 감정을 레이얀으로 지내면서 자연스레 알아 가고 있었다.
레이얀 또한 자신이 감정을 느낄 수 있음을 자각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차가운 성정은 변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절대 변하지 않을 종족에서 오는 천성은 더한 피를 불러올 것이 분명했다. 피를 갈망하고 폭력을 즐기는 것이 아니었다.
질 수 없다는 견고한 자긍심. 오로지 그것에서 오는 마찰들이 피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때 문득 레이얀의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예전과 다를 바 없이 가녀리며 창백한 손.
아주 더디지만 육체가 영혼으로 인해 변해 가고 있었다. 육체가 완전하게 변한다면 예전의 강함이 돌아올 것이 분명했다.
지금도 경악할 만큼 강하지만, 그것은 레이얀이 가진 힘에 6할밖에 되지 않았다.
이 사실을 록펠이 알았다면 실성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만큼 대륙의 최강이라는 마스터를 제압하는 레이얀은 강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만큼 강하기에 반신이라 불리는 드래곤조차 상대가 될지 의문이었다.
그렇게 성공적으로 자작가의 반란을 제압한 레이얀은 아직 영지에 남아 있는 바퀴벌레들로 생각을 전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