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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마대제 1권(18화)
Chapter 5 첫 번째 수하(5)
아침부터 하염없이 내리던 비는 밤이 되어서야 그쳤다.
그때까지 나뭇가지 위에서 고통에 정신을 잃고 있던 펠리스는 눈을 떴다.
회색 눈동자에서 일순간 강한 기운이 일렁였다. 얼핏 일견하기에도 상당히 깊고 묵직한 기운이었다.
펠리스가 눈을 깜빡이자 기운이 순식간에 갈무리되었다.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난 펠리스는 몸을 내려다보았다.
‘죽지 않았다?’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고통이었다. 결국 고통을 참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다시 차렸을 때는 전신이 갈라지는 듯한 고통은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고 오히려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한동안 몸을 살펴보던 펠리스는 아차 싶었다. 지금은 한가로이 몸을 살필 때가 아니었다.
‘영주, 그놈!’
레이얀의 능력을 알려야 했다.
비록 오러 나이트와 마스터를 제압하는 것은 보지 못하였지만 펠리스는 레이얀이 다가왔을 때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기감에도 잡히지 않을 정도의 실력자라는 것을.
이것은 그분의 목적, 즉 케이안트 제국의 계획에 엄청난 변수로 작용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한시라도 빨리 보고를 올려야 했다.
펠리스는 신형을 빠르게 움직였다. 엄청난 속도로 나뭇가지에서 벗어났음에도 가지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몇 초 만에 숲에서 벗어난 펠리스는 갑자기 속도를 늦추었다.
분명히 보고를 올려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지만 머릿속에서, 그리고 본능 깊숙한 곳에서 윈스톤 자작가로 가야 한다고 자꾸만 알려 왔다.
펠리스는 결국 걸음을 멈추었다.
‘왜 이러지?’
자작가에서 거리가 멀어지면 질수록 심장이 세차게 뛰었으며 불안감이 뇌리를 감싸 안았다.
웬만하면 무시하고 보고를 올리러 갔겠지만 무시할 수준이 되지 않았다.
결국 펠리스는 걸음을 돌렸다.
몸이 알리는, 본능이 알리는 그것을 보지 않으면 심장이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상당히 현명한 판단이었다.
진마의 피를 먹고 수하가 된 자는 진마에게서 일정 거리를 허락 없이 벗어나게 될 경우 심장이 터져 버린다.
본능에 따른 그의 판단이 목숨을 살린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허나, 앞으로의 미래를 본다면 살아도 산 것이 아님이 분명했다.
진마대제 1권(18화)
Chapter 6 케이안트 제국의 음모(1)
레이얀이 다시 정신을 차린 지 한 달이 훨씬 넘었다. 그사이 레이얀은 일곱 장로를 숙청하여 실권을 장악하였으며, 영지를 굳건히 만드는 법안을 발표하였다.
그 와중에 자작가에서 반발이 일었지만, 빠르게 병력을 꾸려 출전했다.
그리고 그 마찰을 지켜본 집단에 속한 자들은 마법이나 전서구 등을 이용하여 빠르게 조직에 보고하고 있었다.
그것은 펠리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루스펠드 후작의 영토 중 영주 성이 위치한 중심부의 도시는 상당히 넓었다. 동문에서 입장하여 하루 종일 걸어야 겨우 서문에 도착할 정도였다.
그렇게 넓은 만큼 다른 조직들도 이곳에 지부를 마련하게 되었으며, 상업의 교류 또한 활발했다.
넓은 것만으로 상업의 교류가 활발할 리 없었다. 상업이 발달하게 된 까닭은 후작령이 5약에 속하는 다섯 왕국 중 두 곳의 진출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발전했던 상업은 레닐이 죽기 직전부터 약해지더니 이내 뚝 끊기다시피 변해 버렸다.
이유는 일곱 장로가 붙인 관세 때문이었다.
그들의 관세는 터무니없이 높았기에 상단들은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먼 길을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차에 일곱 장로가 죽었다.
그로 인해 상인들이 다시금 활발히 후작령의 대로를 거닐기 시작했다.
일곱 장로가 관세를 높게 잡은 것은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었고, 이 사실을 모르는 영주민들은 영지가 다시 살아나려는 조짐에 레이얀을 찬양했다.
모두 다 레이얀이 영지를 잘 살폈기 때문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런 영주민들을 타 조직들은 비웃었다.
그저 레이얀이 실권을 장악하기 위해 숙청한 일곱 장로가 사라졌기에 상업이 활발해진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레이얀이 다시금 상업이 활발해질 것을 염두에 두고 일곱 장로를 숙청했을 리는 없었다.
그 모든 사실을 알기에는 레이얀의 세력이 약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 사실을 알 정도의 세력이 있었다 하더라도 레이얀이 앞의 수까지 읽고 행동했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조직들이 영주민들을 비웃은 것이다.
그 조직들 중 절반은 후작과 자작의 접전을 지켜보지 못했으며 나머지 절반은 확인 후에 보고를 듣고도 거짓으로 치부하였다.
그들은 모를 것이다. 그 작은 판단이 조직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지.
물론 그렇지 않은 조직도 있었다. 그들은 보고가 올라온 후부터 끊임없이 레이얀의 능력에 대해 회의를 나눴다.
아무리 얘기를 나눠 본들 지구의 진마였던 레이얀의 능력을 알 리는 없었다. 저 먼 북부 지방에서 간혹 레이얀과 유사한 능력을 보이는 존재가 등장했다는 전설도 있지만, 수백 년도 더 된 허무맹랑한 전설이 이들에게까지 들려왔을 리 없었다.
그렇게 등장한 지 채 두 달도 되지 않아 레이얀은 어떤 이에게는 크나큰 충격으로, 어떤 이에게는 아무 능력 없이 그저 머리만 뛰어난 책사로 큰 이슈 거리가 되고 있었다.
그중 레이얀의 등장으로 인해 가장 골머리를 앓고 있는 자들이 머물고 있는 건물로 회색 눈동자의 사내가 들어서고 있었다.
‘호거스’라는 여관에 들어선 펠리스는 평범한 옷차림으로 띄엄띄엄 테이블에 앉아 있는 중년인들을 살펴보았다.
일견하기에는 평범하지만 그들 모두 속에는 날카로운 비수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들이 여관에 들어선 펠리스를 향해 시선을 보내었다. 날카로운 시선 수십 개가 펠리스를 훑었다. 그리고 이내 시선이 거두어졌을 때 마른침을 삼킨 펠리스는 걸음을 옮겼다.
예전 같으면 저들의 시선에 식은땀이 흐르고 주눅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끔찍한 그 고통을 참아 낸 후 마주한 저들의 눈빛은 더 이상 두렵지가 않았다.
‘저들이 약해진 건가?’
자신이 생각하고도 너무 어이가 없었다.
키가 다시 줄어들었다는 말과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강해졌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자신 스스로 성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레이얀이 준 고통을 버텨 낸 것은 자신이었지만, 능력이 강해진 것은 그 녀석이 행한 어떤 행위 때문이었다.
‘대체 그 피는 알 수가 없군.’
이곳에 오는 내내 가진 의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기에 곧 고개를 저으며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계단을 올라가자 벽을 가득 메우는 기사가 그려진 그림이 나타났다.
그림의 기사는 사냥한 사자를 한 발로 딛고 한 손에 투구를 들고 있었다.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위세가 느껴졌다.
그림 앞에 걸음을 멈추고 몇 초의 시간이 지나자 그림에 그려져 있는 기사의 눈동자가 갑자기 움직이더니 펠리스의 전신을 훑기 시작했다.
한참을 훑던 기사의 눈동자가 제자리를 향했을 때 덜컥 소리와 함께 그림이 안으로 열렸다.
열리는 순간 펠리스는 망설임도 없이 걸음을 옮겼다.
통로에 들어서자 그림이 다시 닫혔고, 복도는 빛 한 줌 없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어둠이 빛보다 친근한 암살자가 이까짓 어둠이 시야에 방해될 이유는 없었다.
어둠 속에서도 수없이 날카로운 시선이 자신을 살펴보고 있음을 펠리스는 느낄 수 있었다.
속으로 약간 놀라고 있었다.
예전에는 전혀 느낄 수 없었던 시선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자신이 확실히 강해졌음을 깨달은 펠리스가 복도 끝에 위치한 나무문을 열어젖혔다.
* * *
호거스 여관에 도착하기 전 펠리스가 자작가를 향할 때의 일이다.
뇌리와 마음을 장악했던 부름에 따라 윈스톤 자작가로 걸음을 돌린 펠리스는 자작가가 가까워짐에 따라 마음이 편해짐을 느꼈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순식간에 자작가로 스며든 펠리스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응? 이게 무슨?’
펠리스가 자신의 행태에 의문을 품을 때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듣는 순간 그의 몸이 한차례 떨렸다.
절대 잊을 수 없는, 자신에게 죽음보다 더한 악몽을 선사해 주었던 자의 목소리였다.
“예상보다 늦었군.”
“…….”
마치 자신을 기다렸다는 듯한 어투였지만 펠리스는 신경 쓰지 않았다.
두 눈이 분노로 일렁였다. 지금 이 상황이 만들어지게 된 과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낮에 지옥 같은 경험을 하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앞에 있었다.
지금은 그것이 더욱 중요했다.
본래라면 레이얀과 싸울 생각 따위는 할 수도 없었다. 잠깐 일견한 레이얀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고통에 대한 보복을 하려는 이유는 자신의 실력이 더욱 고강해졌기 때문이다.
자신이 더욱 강해졌음을 느낀 것은 지독한 고통에 의해 정신을 잃고 다시 깨어났을 때였다.
바로 자각할 수는 없었지만, 정신을 차린 후 몸 안의 기운을 움직일 때 알게 되었다.
이전보다 훨씬 많은 양의 마나가 예전보다 더욱 빠르게 몸 안을 타고 흘렀다. 언제나 생기던, 마나가 흐르는 도중 막히는 일도 없었다. 마나를 아무런 막힘없이 몸 전체로 유동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점은 암살자에게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었다.
암살자가 기척을 숨기는 방법은 마나를 사용하여 주변의 기운과 동화되는 것이었다.
그것에서 기척을 숨기는 능력이 차이 난다.
몸 전체에 마나를 유동시킬 수 있는 사람은 기척이 드러날 이유가 없었다. 몸 전체를 주변의 기운에 동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마나를 두뇌에까지 유동시키지 못하는 암살자는 기척을 완연하게 지울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마나를 몸 전체로 유동시킬 수 있는 점은 암살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였다.
지금 펠리스의 상태를 기사들의 경지에 비교해 본다면 마스터에 이른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갑자기 이렇게 강해진 이유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을 견뎌 냈기 때문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펠리스는 복수하고자 하는 것이다. 지금이라면 질 일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빠르게 오른손을 품속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거리를 걸을 때, 심지어 잠을 잘 때도 품에 보관하고 있는 단검들 중 하나를 꺼내 들었다.
퍽.
“크헉!”
단검이 모습을 채 드러내기도 전에 강한 충격을 턱에서 느끼기 무섭게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대로 신형이 뒤로 회전을 하며 벽으로 날아갔다.
쾅.
털썩.
갑작스러운 기습보다는 아무런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은 공격에 펠리스는 당황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이게 무슨…… 허억!”
일어난 펠리스는 기겁을 하며 뒷걸음 쳤다. 소리를 넘어 어떠한 인기척조차 없이 바로 앞에 레이얀이 오연하게 서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