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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마대제 1권(23화)
Chapter 8 강해지려는 이유(2)
그렇다, 레이얀은 ‘한 번의 기회’라는 자비심 자체가 없었다. 그럼에도 록펠의 행동을 용서한 이유는 여전히 ‘쓸 만한 인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쓸 만한 인간을 더욱 유용하게 만드는 수고를 한다면 후가 편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런 레이얀의 생각을 모르는 록펠은 물음에 충실히 답했다.
레이얀이 물은 질문의 의도를 록펠은 짐작할 수 있었다.
수하들 중에도 참된 수하란 것이 있듯이 참된 주군은 수하를 아낄 줄도 알아야 했다. 레이얀은 그 점 때문에 자신의 기운을 북돋아 주고자 질문하였을 것이다.
레닐이 그랬던 것처럼, 레이얀 또한 성군의 자질을 가진 것이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록펠은 묘하게 안심됨을 느꼈다. 레이얀이 폭군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안도감, 기쁨 등 감정이 복합적으로 섞인 상태에서 답했다.
“예.”
“그럼 강하게 만들어 주지.”
여전히 높낮이 없고, 감정조차 실리지 않은 어조였으나 마치 악마의 유혹처럼 달콤하게 록펠의 귓가를 자극했다.
“예?”
예상조차 못한 답이었다.
온갖 물음이 떠올랐으나 이어진 레이얀의 말은 질문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자세한 건 내일 날 찾아오면 가르쳐 주마. 지금은 집사와 싸우고 있는 기사를 나에게 데려와라.”
“예?”
여전히 알 수 없다는 듯이 반문하였지만 어느새 레이얀은 등을 돌린 채 성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잠시 그를 멍하니 보던 록펠이 다급히 로비로 걸음을 옮겼다.
보통의 반응은 어이없는 명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연무장에서 꽤나 떨어진 로비의 기척을 감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성이 그러하듯 루스펠드 후작가 또한 성과 먼 곳에 연무장이 있었다.
이유는 모든 기사가 훈련하는 모습을 남에게 보이기 싫어했기 때문이다.
일개 기사들의 의견이었다면 결코 건축 때에 반영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구도로 지어지게 된 것은 성의 영주들도 그 직책을 떠나 기사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들로 연무장은 성에서 꽤나 떨어진 곳이거나, 후미진 곳에 지어지기 마련이다.
루스펠드 후작 성은 성 안에서조차 볼 수 없도록 숲 속에 연무장이 있었다. 그렇기에 레이얀의 명은 다소 어이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미관상 성과 숲이 일정 거리가 떨어져 있음을 감안하고, 쉽사리 보이지 않게 더더욱 안으로 들어왔음을 감안한다면 그 거리란 성터와 맞먹었다.
그런데 레이얀이 그 거리에서 기척을 감지했다?
참으로 어이없는 것이다. 하지만 록펠은 레이얀의 무위를 직접 봐 왔고 방금은 직접 겪어 보았다.
그렇기에 아무런 의구심조차 없이 로비로 빠르게 이동했다.
역시나 로비에 도착한 록펠은 몇몇 후작가 기사가 한 기사를 붙잡고 밀어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런 그들을 지켜보는 집사 또한 있었다.
“그만하게.”
“록펠 단장님.”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밀어내던 기사들도 끌려 나가던 기사도 행동을 멈추었다.
“영주님이 데려오라고 하셨네.”
“예?”
기사들이 이해되지 않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것은 집사 또한 마찬가지였다. 백금발의 기사를 쫓아내고자 한 이유는 약속이 잡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레이얀이 그를 보고자 하였다. 그 말은 약속이 잡혀 있었단 것인가?
그들의 의문이 무엇인지 깨달은 록펠은 얼마 후면 풀릴 것임을 알기에 답하지 않고 백금발의 기사를 향해 손짓했다.
며칠 후면 자작가와의 전투가 영지를 포함하여 사방으로 퍼져 나갈 것이고, 그로 인해 레이얀의 무력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들로 갈리겠지만 성의 가신들은 태반이 믿게 될 것이다.
며칠 만에 자작가에서 승리를 안고 돌아온 것과 일곱 장로들을 제거한 것 등, 성의 가신들은 믿기 싫어도 믿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레이얀을 향한 그들의 신뢰도 상당히 달라질 것임을 록펠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록펠이 진심으로 기대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중앙 귀족들이 거들떠도 보지 않던 변방 지역의 후작과 친분을 쌓기 위해 마차 바퀴가 달도록 드나드는 것.
록펠은 그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거만한 중앙 귀족들이 레이얀과 만나 쩔쩔매는 모습을 상상하자 록펠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사이 거칠게 자신을 붙잡고 있는 기사들을 떨쳐 낸 백금발의 기사가 록펠의 옆에 서 있었다.
“따라오게.”
그제야 현실로 돌아온 록펠이 걸음을 옮겼다. 옆에 서 있던 것과는 달리 걸음을 옮기자 세 걸음 뒤에서 백금발의 기사가 조용히 록펠을 따라갔다.
레이얀 앞에서가 아닌, 기사들의 우상인 모습으로 돌아온 록펠이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이름이 뭔가?”
“제라드라고 합니다. 록펠 단장님.”
상당히 예의 바른 태도였다. 너무나 무심한 레이얀의 태도에 잊고 있었지만 록펠은 중년의 나이에 들어 있었다.
살짝 보이는 눈가의 주름이 록펠이 웃음 지으며 더욱 굵어졌다.
“허허, 조금 전에 들은 이름을 기억한 겐가?”
“그 점이 아니더라도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저희들이 본받을 실력과 인품을 지니신 기사가 아니십니까.”
일체에 사심이란 없었다.
자칫 환심을 살려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었으나, 록펠은 단호한 어조에 서린 진심을 읽어냈다.
“허허…… 그런가, 본받을 실력이라…….”
자조적인 웃음을 짓던 록펠이 걸음을 멈췄다.
“제라드?”
“예?”
“제라드? 설마 국경 수호 기사단장 제라드?”
“예, 맞습니다.”
몸을 돌린 록펠이 제라드를 살펴보았다.
“계급이 올라갔단 소식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 젊을 줄은 몰랐군.”
“칭찬 감사합니다.”
제라드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아니, 이게 아니지. 그보다 후작님을 왜 뵙고자 하는 것인가?”
“물어볼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단호한 어조로 답했다.
당당하게 서 있는 제라드를 록펠이 투영하듯 바라보았다.
분명히 그것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제라드는 답할 것이다. 잠깐 물으려던 록펠은 이내 등을 돌려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것은 기사와 주군이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결론 내린 것이다.
마침내 집무실 앞에 도착한 록펠은 지키고 있던 기사가 문을 여는 것을 보았다.
“제라드 기사단장님이 오시면 바로 들라고 하셨습니다.”
“…….”
록펠은 다시금 마른침을 삼켰다.
기척이야 충분히 감지할 수 있는 실력자라고 하지만 이름을 어찌 안단 말인가.
약속이 잡혔던 만남도 아니고 한밤중에 그것도 갑작스레 먼 국경에서 찾아온 단장의 이름을.
다시금 레이얀의 신위를 느낀 록펠이 걸음을 옮겼다.
반면 제라드는 별신경 쓰지 않고 집무실로 들어섰다.
자신의 방문을 보고 받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제라드의 방문을 보고하고자 기사가 집무실에 왔었으나 그때 레이얀은 연무장에 있었다.
제라드는 그 사실을 몰랐기에 록펠과 달리 아무런 걱정 없이 레이얀의 앞으로 걸어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한쪽 무릎을 꿇고는 예를 차렸다.
“국경 수호 기사단장 제라드가 주군께 인사드립니다.”
“무슨 일이지?”
레이얀은 시선조차 던지지 않은 채 무심히 물었다.
“주군님의 안위와 함께 다시금 충성을…….”
“충성이란 것이 당시의 주군에게만 맹세를 하더라도 대개가 자식에게까지 이이지는 것이 아니었나 보군.”
“아, 아닙니다. 대개의 기사들은 주군에게만 맹세를 행할지라도 자식에게까지 그 맹세를 이행합니다.”
이토록 냉정하게 사실을 말할지 몰랐던 제라드가 당황한 채 대답했다.
“그럼 이행하면 되지, 이 밤중에 나를 찾아온 이유가 그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란 말인가?”
레이얀은 이미 여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제라드의 목적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짐짓 모르는 척하는 이유는 그들을 한꺼번에 처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금 제라드를 해결하고 나면, 내일 또 비슷한 문제로 다른 기사단장들을 만나야 할 텐데 레이얀은 그런 수고를 하기 싫은 것이다.
“그, 그것이…….”
제라드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무턱 대고 주군의 영지 운영 방식에 대해 물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마땅히 대답을 못하고 있을 때 레이얀이 다시 말했다.
“자신이 온 이유조차 잊어 먹었나 보군. 그럼 내일 동료들과 다시 날 찾아오는 것이 낫겠군.”
“예?”
자신을 멍청하게 만드는 레이얀의 발언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뒤에 나온 말에 제라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거늘 다른 기사단장들이 왔음을 어찌 안단 말인가.
하지만 그 놀람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성의 문을 지키는 기사들에게서 보고가 올라왔다고 생각한 것이다.
제라드 또한 다른 국경 기사단장들처럼 소문을 듣지 못했기에 레이얀이 여전히 평범한 실력을 지닌 기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찾아뵙겠습니다.”
내일 찾아오라는 명에 제라드는 아무런 불만도 없이 그대로 방을 나섰다.
의문을 풀기 위해, 자신의 주관이 맞음을 확인하기 위해 한걸음에 달려왔지만 주군의 한마디에 제라드는 그렇게 따랐다.
방을 나선 제라드는 답답한 느낌이 사라짐을 깨달았다. 의식하지 못했기에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방을 나선 지금 답답함이 사라지자 깨달을 수 있었다.
레이얀의 방에 있을 때 주위의 공기가 자신을 짓누르듯이 답답함을 느꼈었다. 아니, 답답함보다는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마음에서 피어올랐다.
그것을 단순히 주군을 만났기 때문이라 생각했으나, 방을 나서고 보니 그것과는 약간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생각에 빠졌던 제라드가 움찔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헉! 그, 그 방에 있었던 것인가?’
자신은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거늘, 그 방 안에 레이얀이 고용한 의문이 고수가 있었단 말인가!
마른침을 삼킨 제라드가 다시금 걸음을 옮겨 집사를 따라갔다. 갑자기 걸음을 멈춘 제라드를 이상한 눈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기, 기필코 만나 봐야 한다.’
기사도가 언제나 옳은 것이라 생각하는 제라드일지라도 강한 자에 대한 호승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직 대면한 것은 아니기에 검을 나누어 보고자 하는 생각은 아니었다.
단순히 만나 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자신의 기척에 감지조차 되지 않으며 주위의 공간을 장악한 고수.
어떤 이가 만나 보고 싶지 않겠는가.
의문의 고수를 상상하느라 어느새 자신이 묵을 방에 도착한 것을 깨닫지 못한 제라드가 다급히 집사가 열어 둔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손님들을 위한 방이었는데 상당히 큰 침대와 간소한 가구들 그리고 바닥에 깔린 카펫이 상당히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그 느낌은 길쭉한 창문과 깔끔하게 접힌 휘장으로 인해 더욱 강해졌다.
아늑한 방에 들어선 제라드는 갑옷을 벗고 샤워를 한 후 갑옷을 정리하고는 침대에 몸을 뉘었다.
그리고 다음 날 자신의 모든 것이 깨어질 순간이 올 것이란 것도 모른 채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제라드가 성에 도착한 첫날밤이 저물어 갔다.
진마대제 1권(23화)
Chapter 9 게리오스의 선공(1)
잠에서 깨어난 제라드는 대기하고 있던 하녀의 안내로 식당으로 내려갔다.
기사들이 쓰는 식당인지 많은 나무 테이블에 듬성듬성 기사들이 앉아 있었다.
척 보아도 그들이 기사임을 아는 이유는 팔뚝에 드러난 근육의 모양도 있지만, 체내에 느껴지는 마나와 마나 로드 때문이었다.
마나와 마나 로드를 읽을 수 있단 것은 제라드가 그들보다 더욱 뛰어난 실력자임을 뜻했다.
어쩌면 당연할지도 몰랐다.
엑스퍼트 상급인 록펠과 비슷한 실력이라면 제라드 또한 상급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급 안에서도 격차는 있기 마련이다.
갓 상급에 올라선 이가 오래전에 상급에 오른 자와 비슷할 수 없는 이치인 것이다.
제라드는 잠시 그들을 살펴보고는 아무런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식사는 나쁘지 않았다.
따뜻한 고기 스프는 갓 일어나 부담스러울 수 있는 식도를 부드럽게 타고 넘어갔고, 빵은 갓 구워 낸 것처럼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문득 식사를 하던 제라드가 얼마 후에 도착할 다른 기사단장들을 떠올렸다.
제라드의 두 눈에 혐오가 서렸다.
‘기사의 근본을 잃은 것들.’
돈과 안락한 생활에 빠진 자가 어찌 기사라 할 수 있겠는가.
부디 레이얀이 그들의 근본을 뜯어고치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기사도를 모욕한 대가로 결투를 신청할 수는 있었지만 주군의 성까지 찾아와 괜한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식사를 마친 제라드는 성의 기사들이 훈련하는 연무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은 온통 큰 나무들로 둘러싸여 연무장 돌바닥 위를 제외하고는 그늘로 덥혀 있었다.
연무장 밖에서 다수의 기사들이 모여 한 기사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연무장으로 향하던 제라드의 귀에 그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아니, 그럼 일곱 장로를 제거한 것도 우리 어린 영주가 그랬단 말이야?”
“아니, 그런 것들은 상관없어! 영주가 마스터를 제압했다니까!”
“푸하하. 바론 지금 자네 나보고 그걸 믿으란 건가? 대체 마스터가 어떤 존재인데 그런 곳에 갑자기 등장한단 말인가.”
한 기사의 말에 여러 기사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에도 그들은 소문을 말하는 바론의 입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거리를 순찰하던 릭이 정보 길드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을 들었다니까.”
바론이 확신에 가득 찬 어조로 대답했다.
그러자 이번 또한 다른 기사가 끼어들었다.
“릭? 그, 혼자 드래곤도 잡을 수 있다는 허풍쟁이 릭 말이야?”
“그, 글쎄……. 릭 말고도 함께 있던 동료도 들었다고 했어!”
이번엔 다소 확신이 안 서는 듯이 말했다. 그때 제라드가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그 소문 다시 들을 수 있겠습니까?”
갑작스런 기사의 등장에 모든 시선이 제라드를 향했다. 제라드를 알아본 한 기사가 벌떡 일어나더니 차렷 자세를 취했다.
“제라드 기사단장님을 뵙습니다!”
그 기사는 밤에 제라드의 성 출입을 막았던 기사들 중 하나였다. 기사의 말이 신호가 되어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 차렷 자세를 취했다.
“쉬십시오. 저는 단지 그 소문을 자세히 듣고 싶을 뿐입니다.”
기사가 지닐 수 있는 직책 중 가장 높은 직책을 지녔으나 제라드는 공손히 대꾸했다.
그리고 소문을 말하던 기사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조금 전 말한 소문을 다시 말해 주겠습니까?”
“그, 글쎄 자작가와의 전투 중에…….”
“자작가와 전쟁 중이었습니까?”
제라드가 의문을 표했다. 바론은 제라드의 의문 서린 표정을 보고 그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레이얀이 쓰러졌던 순간부터 설명해야 함을 깨달았다.
귀찮은 일이었으나 바론은 내색하지 않고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했다. 바론의 얘기가 레이얀이 발표한 공문에 이르렀을 때였다.
“자, 자주권 금지령?”
제라드는 충격 먹은 듯이 바론을 쳐다보았다.
“예, 그러자 윈스톤 자작가에서…….”
바론이 설명이 이어졌으나 제라드는 이미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걸음을 돌려 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레닐과 같은 다른 이를 믿고, 함께하는 이상을 지녔을 것이라 믿었던 레이얀이 그런 공문을 발표했다니.
그 후에 일어난 자작가와의 전투의 승패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제라드는 그 공문 발표가 사실인지를 들어야 했다.
다급히 집무실로 향한 제라드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집무실 앞에 이곳까지 함께 온 국경 기사단장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집사가 제라드를 보더니 반색했다.
“그렇지 않아도 모시러 갈 생각이었습니다만, 잘되었군요.”
집사가 말을 마치는 순간 집무실 문이 열렸다.
금발의 테스를 선두로 칸, 헤르만, 시렌이 들어갔다. 제라드 또한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레이얀을 본 순간 제라드는 당장 묻고 싶었으나 주위에 있는 기사단장들 때문에 참을 수 있는 이성이 생겼다.
집무실에 들어선 그들은 제라드의 인사를 시작으로 마지못해 예를 차렸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도 레이얀의 모습은 변한 것이 없었다.
여전히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 깃펜을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