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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마대제 1권(24화)
Chapter 9 게리오스의 선공(2)


어찌해야 할지 몰라 멈칫거리는 그들을 향해 레이얀이 물었다.
“왜 왔지?”
테스는 흠칫 놀라며 레이얀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의도하더라도 꼭 있어야 하는 높낮이가 레이얀의 음성에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놀란 것도 잠시 테스는 마음을 추슬렀다.
강하게 나가지 않으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쉬울 것이라 생각했으나 테스는 말을 더듬었다.
제라드와 마찬가지로 테스도 답답함과 함께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다, 다시금 정식 맹세를 하러 왔습니다.”
“그럼 하면 되지 뭘 망설이는 거지?”
레이얀은 여전히 서류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자신을 무시하는 느낌을 받은 테스가 그제야 두려움을 떨쳐 냈다.
일곱 장로가 장악한 후 지내 온 안락한 생활이 테스를 용감하게 만들었다.
“그전에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지?”
여전히 서류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테스는 부아가 치밀어 오름을 느꼈다.
긴 옷단 사이로 보이는 얇은 팔뚝과 그다지 넓지 않은 어깨를 보고 레이얀이 소문에서보다 더욱 볼품없는 실력을 지녔을 것이라 생각한 테스는 더 이상 부아를 참지 못했다.
“왜 우리가 대가도 없이 당신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까?”
테스의 말투에 다른 기사단장들이 놀란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를 말리지는 않았다.
그제야 레이얀이 테스를 바라보았다.
움찔.
레이얀과 눈이 마주친 테스가 반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 이게 무슨.’
뒤로 물러선 테스가 얼굴을 붉히고 자세를 바로 했다.
겨우 눈이 마주친 것만으로도 자신이 물러서다니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레이얀의 두 눈은 너무나 차가웠다.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듯 차갑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두 눈을 보고 있으면 끝없는 나락에 떨어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슬며시 눈을 돌린 테스가 대답을 촉구했다.
“저희는 가난한 생활에 질렸습니다. 다른 영지의 기사들과 똑같은 대우를 해 줄 수 없다면 저희는 떠나겠습니다.”
“돈에 눈이 멀었군.”
레이얀이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말했다.
제라드가 예전에 그런 식으로 말했던 적이 있었으나, 레이얀이 말하자 테스는 알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한 명 한 명을 살펴본 레이얀이 말을 덧붙였다.
“돈에 팔려 다니는 용병과 다를 바가 없군.”
테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당장 그 말을 취소하십시오.”
아무리 안락한 생활이 좋더라도 기사의 긍지마저 잃은 것은 아니었다.
일개 용병과 동급으로 취급하는 상황을 다혈질인 테스가 참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그것을 넘어 약골로 보이는 레이얀에게 무시당하는 자체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사실을 들으니 기분이 나쁜가 보군.”
아무렇지 않게 레이얀이 말했다. 테스가 또다시 한마디 하려 할 때 레이얀이 덧붙였다.
“원한다면 떠나라, 돈에 눈이 먼 용병은 줘도 갖고 싶지 않으니.”
그 말에 테스의 손이 검을 향했다. 긍지를 짓밟는 언사에 분노가 선을 넘은 것이다.
기사도 준 귀족에 해당하는 작위였다.
그렇기에 아무리 귀족이라도 쉽사리 기사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기사 작위는 귀족과 같이 왕에게서 하사되기 때문이다.
귀족이 기사를 무시할 수 있는 조건은 오로지 그 귀족이 주군일 때 뿐이었다.
지금은 그것에 해당되지 않았기에 테스는 거리낌 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맑은 검명이 집무실에 흘렀다.
그와 동시에 한 형상이 레이얀과 테스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 형상 또한 검을 들고 있었다.
“비켜라, 제라드!”
“당장 검을 넣어라! 이게 무슨 추태냐! 저분은 우리의 주군이시다!”
“너의 주군이다. 제라드! 난 맹세를 하지 않았다.”
테스의 말에 검을 쥔 제라드의 손에서 힘이 약간 빠졌다.
“그,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
테스는 제라드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제 밤에 성에 와서 맹세를 하지 않았단 말인가?
“주군, 아니 영주님.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레이얀은 슬슬 짜증을 느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바뀌지 않을 종족에서 오는 사고방식은 이 하찮은 인간들을 죽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감히 자신의 앞에서 소란을 피운다는 명목으로, 또한 감히 자신에게 검을 들이댄 죄로써.
하지만 레이얀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 순간을 참으면 후에 일들을 처리할 때 편할 것이기 때문이다.
록펠을 더욱 유용하게 만들고자 마음먹은 이상 몇 명이 추가된다고 나쁠 것은 없었다.
레이얀은 이들 또한 자신의 수고를 줄여 줄 인간들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국경을 지켜야 할 기사단장들이었지만, 후에 퍼질 자신의 신위와 호거스 여관에 있는 자들과 마찰이 생긴 후에는 국경이 분명히 안전해질 것이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레이얀은 이미 펠리스가 속한 단체와 그들의 배후를 알고 있었다. 그렇단 말은 그들이 어디까지 침략한지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레이얀은 그런 정보를 다른 이들에게 제공하는 수고를 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영지들이 짓밟혀 자신의 영지가 더욱 올라갈 수 있었다.
도무지 인간이 생각할 수 없는, 아니 생각은 하더라도 실현할 수 없는 방법을 레이얀은 기꺼이 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몇 백, 몇 천 명이 죽던 레이얀은 신경조차 쓰지 않는 것이다.
짧은 시간이 흐르고 제라드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의 검과 시선은 여전히 테스를 향해 있었다.
“자주권을 불가한다는 공문을 발표한 것이 사실입니까?”
“……?”
“……?”
다른 기사단장들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라드와 마찬가지로 그들도 정보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알 리가 없었다.
“…….”
레이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답해 주십시오.”
록펠이었다면 방금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제라드는 레이얀을 본 지 이제 하루밖에 되지 않았다.
“…….”
레이얀은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그제야 제라드는 침묵이 긍정을 의미함을 깨달았다.
테스를 향했던 검이 바닥으로 기울었다.
“어째서, 어째서 그러셨습니까.”
“…….”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긍정의 침묵이 아니었다. 자신보다 월등히 떨어지는 자에게 자신의 생각을 가르쳐 줄 필요를 못 느꼈기 때문이다.
“대체 어째서 그러셨습니까! 아버지에 이상을 배반하는 행위임을 모르는 것입니까!”
레이얀을 향해 돌아선 제라드는 분노에 몸을 떨었다.
“실망한 모양이지?”
무미건조한 음성에 제라드가 검을 들었다.
제라드를 무심한 눈빛으로 보던 레이얀이 고개를 옆으로 돌려 세 명의 기사를 바라보았다.
“너희도 이 둘과 같은 생각이겠지?”
“…….”
“…….”
“…….”
칸과 헤르만 그리고 시렌은 침묵을 지켰다.
“선전 포고를 했단 말이군.”
“무, 무슨?”
“……?”
배신당했다는 느낌에 분노를 감출 리 없던 제라드조차 당황했다.
당황한 그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칸이 빠르게 침착을 되찾고 말했다.
“기사는 준 귀족에 해당하는 작위입니다. 치욕을 당한 이상 아무리 귀족이라 할지라도 검을 뽑을 수는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자신의 실력을 믿는 기사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대개의 귀족들은 저마다 능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점이 아니더라도 귀족이 지니는 권력이란 힘은 능력을 웃도는 경우가 이 세계에서는 허다했다.
그렇기에 대부분이 모욕을 당하더라도 참고 만다. 하지만 테스가 검을 뽑은 이유는 레이얀이 만만히 보였기 때문이다.
너무나 창백하였기에 백색을 넘어 죽은 사람처럼 보였으며, 옷에 가려져 있는 몸은 척 보아도 빈약해 보였다. 마치 병에 거려 골골 앓는 것만 같은 인상이기에 어느 누가 만만한 상대로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소속조차 없는 기사들이 베론 왕국의 루스펠드 후작가에서 후작에게 검을 뽑아 들었지.”
레이얀이 칸의 말을 정정했다.
“……?”
한순간 이해 못하던 칸의 낯빛이 사색이 되었다.
준 귀족이란 자리도 기사 작위를 하사한 왕이 있는 왕국에 속해 있어야지 효력이 있는 것이었다.
지금 그들은 그 왕국에 속하지 않았다. 그들 스스로 인정하지 않았던가.
맹세하러 왔다는 한마디에 자신들 스스로 프리 나이트라 인정하고 만 것이다. 레이얀은 그 사실을 이용하는 것이다.
프리 나이트가 기사와 같이 준 귀족에 위치에 있을 수는 없는 법이였다.
이해한 것은 칸만이 아닌 듯, 헤르만의 또한 사색이 되었다.
차후 레이얀이 지금 그들의 행동을 흘린다면 어느 누구도 자신들을 고용하지 않을 것이다.
레이얀이 베논 왕국의 루스펠드 후작가라고 굳이 말한 이유는 이것이었다. 자신들을 고용한다는 것은 베논 왕국 그리고 루스펠드 후작과 적이 된다는 것이다.
기사가 부족하지 않는 이 시대에 굳이 적이 딸린 기사를 고용할 귀족은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요즘 들어 부쩍 유명해지고 있는 루스펠드 후작가를 상대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칸은 레이얀이 두려워졌다.
설마 이 모든 것을 예상하고, 검을 뽑아 들기를 기다린 것인가. 그리고 자신이 방금 내뱉은 한마디가 어떤 파급효과들을 가져올지 알고 말한 것인가.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겨우…… 20대에 불과한 레이얀이 정치계에서 묵을 대로 묵은 귀족이 할 수 있을 법한 상황을 만들다니.
고개를 젓던 칸이 레이얀의 붉은 두 눈을 보았다.
‘허억!’
테스보다 많은 위기 상황을 겪었기에 물러서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굉장히 놀라고 말았다.
저런 류의 냉혹한 눈빛은 어떤 강자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두려움에 젖은 마음으로 레이얀의 눈을 지켜보던 칸은 이내 깨달았다.
레이얀은 자신이 한 말이 어떤 파급효과를 미치는지 잘 알고 있다고.
털썩.
칸과 비슷한 순간에 헤르만 또한 무릎을 꿇었다.
그들은 이미 힘의 논리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산전수전을 모두 겪은 변방 귀족 소속의 기사들이었다.
힘 앞에 어떠한 태도를 보여야 하는지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시렌과 테스 그리고 제라드는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레이얀의 말에서 예상한 것은 지금 당장 즉결 처분이 될 수 있는 행동을 했다는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칸이 부복 자세에서 고개를 돌려 그들에게 눈짓했다.
시렌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무릎을 꿇었다. 칸이 자신의 스승이었기 때문에 거절할 수 없었다.
반면 테스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여전히 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대체 어째서…… 이 성에 기사들이 그리 강하지도 않은데!”
테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칸이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그럼에도 테스는 무릎을 꿇지 않았다.
그 순간!
콱!
“커억!”
“어억!”
쿵.
테스는 자신의 눈앞에 순식간에 나타나 목을 움켜잡은 레이얀의 모습에 경악했다.
경악한 것은 비단 테스뿐이 아니었다. 제라드는 갑작스레 옆에서 등장한 레이얀에 놀란 나머지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다른 기사들 또한 놀란 눈으로 레이얀을 보고 있었다.
검을 뽑아 든 테스와 레이얀 사이에 제라드가 끼어들 수 있었던 만큼 테스와 레이얀 사이의 거리는 대략 5m는 되었다.
기습적으로 달려들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레이얀이 순식간에 나타나 테스의 목을 움켜잡은 것이다.
자신들이 아무리 방심하고 있었더라도 5m에 달하는 거리를 이동하는 동안 기척을 감지할 수 없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기척을 떠나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당사자인 테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테스는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나타난 레이얀도 그렇고, 목이 잡힌 이후 온몸에 힘이 빠진 것마냥 꿈쩍도 할 수 없는 상황이 이해될 리 없었다.
“크으윽.”
체내로 유입되는 공기가 부족해지자 테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집무실 안에 있는 기사단장들은 모두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멍하니 테스와 레이얀을 지켜봤다.
시간이 조금씩 흐르자 기사단장들은 레이얀이 접근한 방식보다 테스를 이해할 수 없었다.
척 보아도 호흡이 곤란함이 보이는데 테스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점점 모든 것이 흐릿해지는 테스를 향해 레이얀이 말했다.
“운이 좋군.”
그 한마디와 함께 테스의 목을 잡고 있던 손을 풀었다.
철퍼덕.
“허억…… 허어억…….”
거친 숨을 몰아쉰 테스는 지금 상황을 이해하려 애썼다.
“용서받고 싶다면 이 성을 지켜라.”
부복해 있는 기사들을 보며 레이얀이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기사들 또한 이해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무엇을……?”
칸이 되물으려 할 때 레이얀이 여전히 알 수 없는 말을 내뱉고는 문으로 걸어갔다.
“스스로 목숨을 단축시키는군.”
레이얀의 두 손이 막 손잡이에 닿는 순간.
콰아아앙!
귀가 멀어 버릴 것 같은 폭음이 대기를 뒤덮었다. 그와 함께 천지가, 아니 성이 세차게 흔들렸다.
갑작스레 일어난 일에 모두 혼비백산하고 있을 때 레이얀은 여전히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