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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 아틸라 1권(3화)
1. 나는 아틸라다(2)


바츨라브 백작가.
제국 남부에서 제일가는 가문이다. 대륙에서 유통되는 곡식의 4분의 1을 생산한다고 알려진 델리아 평야를 절반 이상 차지하기에 경제력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다.
더욱이 예부터 뛰어난 인재들을 배출해 오며 황제에게 제국의 인재 창고라는 극찬을 받기도 했다.
그런 바츨라브 백작가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얼마 전, 철혈의 길을 걷던 가주가 알 수 없는 병으로 쓰러졌다. 그것을 시작으로 백작가에 오랫동안 헌신했던 충신들이 하나둘 떠나거나 죽음을 맞이했다.
철옹성 같던 백작가가 흔들렸다.
그것은 곧 남부 지방에 파문을 일으켰다.
남부 지방의 여러 영지들은 사실상 백작가의 세력 안에 놓였다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작가는 쉽게 무너지진 않았다.
가주가 쓰러졌다고 하나, 백작가에는 사자와 같은 대공자가 있었고, 호랑이 같은 이공자가 있었다.
두 형제의 주도 아래 흔들리던 백작가는 차츰 안정을 되찾아 갔다.
한데, 사건이 터졌다.
대공자 의문의 급사(急死)!
가주를 대신해 백작가를 이끌던 대공자의 죽음은 엄청난 폭풍을 몰고 왔다.
사인은 심장마비.
격한 수련을 하던 대공자가 마나폭주를 일으켜 사망하고 말았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그 얘기를 믿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대공자는 차기 제국을 대표하는 검이 되리라 예상되는 촉망받는 인재였다.
오죽하면 그를 남부의 젊은 사자라 하겠는가?
그런 그가 수련을 하다 마나폭주로 사망하다니, 말이 되지 않는다. 마나폭주는 마나의 길에 처음 입문하는 자들이 겪는 고통이다. 대공자처럼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이들이 마나폭주에 휘말릴 일은 없다.
그제야 사람들은 수군댔다.
백작가를 장악하려는 거대한 그림자가 있다고!
이공자도 그걸 느꼈음인가?
이공자는 황실 아카데미 입학을 이유로 우선 몸을 피하고자 했다.
대공자의 사망엔 의심스런 구석이 많았다. 그것을 파헤치고 힘을 기르기 위해선 일단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아직 어린 이공자는 백작가를 떠나는 선택을 한 것이다.
이공자 루인.
그 역시 제국의 어린 호랑이라고 불릴 만큼 촉망받던 인재였다.
한데 또 한 번 사고가 터졌다.
황실 아카데미로 향하던 길에 루인이 벼락을 맞았다. 그 황당한 사건에 많은 사람들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설마 백작가를 집어삼키려는 그림자가 자연마저 다루냐고 황당해할 따름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루인은 벼락을 맞고 자신의 방에서 꽁꽁 몸을 숨긴 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지 한 달 가까이가 되어 가고 있다는 점이다.

“참 이상하다…….”
루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츨라브 백작가의 시녀인 루나로서는 최근에 일어나는 일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기름기를 쫙 뺀 삶은 돼지고기와 잘 말린 양고기가 쟁반 위에 놓인 채 그녀의 손에 들려 있었다. 루인 이공자의 식단이었다.
바로 이 식단이 의문점이었다.
본래 이공자는 소식(小食)을 즐겼다. 늘 신선한 우유와 훈제 베이컨 두어 조각을 즐겼다. 그래서 식단이 바뀔 일이 없었다.
근데 한 달 전부터…….
“그러니까 으음……. 그래! 아카데미로 떠나갔다가 벼락 맞고 돌아왔을 때부터!”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 전, 이공자가 벼락을 맞은 후 깨어났을 때부터 식단이 이렇게 바뀌었다.
바뀐 건 식단뿐이 아니었다.
본래 이공자는 늘 아침 일찍 일어나 저택을 돌아다니며 일일이 하인들과 시녀들을 챙겼다. 그다음에는 연무장에 가서 아침 수련을 했고, 아침을 먹고 나서는 방에서 책을 읽으며 여가를 보냈다.
이것이 루인 이공자의 생활 패턴이었다.
그런데 한 달 전부터 완전히 바뀌었다.
루인은 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산책도, 수련도 하지 않았고, 식사도 방에서 문을 걸어 잠근 채 해결했다.
루나는 방에 들어가 보지도 못했다. 식사는 늘 문 앞에 놓고 돌아가기만 했다.
“도대체 방 안에서 무얼 하고 계시는 걸까?”
백작가 이공자의 방이니 좁을 리는 없겠지만, 한 달을 그곳에서 지낸다면 필시 좁을 터. 하지만 이공자의 모습은커녕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저택 내에서 그의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번 살펴볼까?”
꽃다운 나이 십오 세.
한창 호기심이 클 나이다. 더욱이 루인 이공자는 무척이나 잘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뿐인가? 대단한 가문이라는 배경까지 있지 않는가. 또한 자상할 땐 한없이 자상했던 성격 때문에 저택 내에서 그를 흠모치 않는 시녀들이 없을 정도다.
그 잘생긴 얼굴 좀 보고 싶단 생각에 루나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살짝만 문 열어 보자.”
이윽고 루인의 방문 앞에 도착했다.
똑똑.
“아침 식사 가져왔습니다. 이공자님.”
역시나 방에선 아무런 말이 없었다. 혀를 내밀고 배, 웃은 루나는 쟁반을 옆에 살짝 내려놓고 문고리를 돌렸다.
끼이이익…….
문고리 돌아가는 소리는 왜 이렇게 큰 건지!
루나는 약간 불안하지만 설레는 기색으로 문을 살며시 열었다.
조그맣게 열린 문틈 사이로 보이는 이공자의 방.
깨끗했다.
한 달 동안 시녀들이 출입을 안 해 청소를 하지 못했을 터. 하지만 생각보다는 깨끗한 방의 모습이었다.
“흐음?”
하지만 가장 궁금한 이공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루나는 의아한 눈빛으로 문을 더 살짝 열려고 했다.
순간.
덜컥!
“으앗!”
갑자기 문이 활짝 열린 바람에 루나는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바닥에 이마를 제대로 찧었다.
“아고고…….”
“일어나라.”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루나는 황급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헙…….”
순간 얼어붙었다.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 전신을 갈가리 난도질당하는 기분이었다.
‘이…… 이공자님?’
바로 이공자였다. 하지만 루나는 쉽사리 그가 이공자 루인임을 확신할 수 없었다. 바로 눈빛. 차갑고 무언가 터질 것만 같은 눈빛은 결코 루인의 눈빛이 아니었다.
마치…….
병상에 누워 있는, 남부를 호령하던 바츨라브 백작님을 본 느낌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루인 이공자님.”
루나는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이유가 어찌 됐든 자신은 명백히 잘못했다. 허락이 없는 한, 일개 시녀가 방 안에 들어오거나 살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루인은 말없이 고개 숙인 루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워낙 차가운지라 루나는 가늘게 몸을 떨었다.
두려웠다.
그리고 이질감이 들었다. 자신이 알던 루인이 아니라는 생각이 머릿속 깊이 파고들었다.
“용서해…… 주세요. 이공자님.”
루인이 말이 없자 더 두려워진 루나는 울먹이며 용서를 빌었다. 하지만 루인은 그녀를 꾸짖을 생각도, 용서할 생각도 없었다.
그의 목적은 단지 아침 식사였으니까.
“식사를 다오.”
“네…… 넷? 아 여기 있습니다.”
루인은 말없이 식사를 받았다. 그리고 가차 없이 몸을 돌려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루나는 넋 나간 표정으로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앞으로 식단에 갖은 채소와 야채를 넣어라. 또 신선한 과일도 좋고.”
“알, 알겠습니다. 루인 이공자님. 그럼 저…….”
고개를 조아리며 머뭇거리는 루나.
“……무슨 일이냐.”
그녀의 모습에 루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표정이 찡그러지자 루나는 화들짝 놀랐다.
“아, 아닙니다. 맛있게 식사하세요, 루인 이공자님.”
루나는 허리를 꾸벅 숙이고 종종걸음으로 복도를 걸어 나갔다. 한시라도 빨리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그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히고 두려움에 몸서리가 쳐졌다.
분위기!
바로 루인 이공자의 분위기가 너무나 달랐다.
차가웠고, 또 흉흉했으며 거칠었다.
“잠깐.”
루인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그녀는 두려운 기색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무슨 일이신지…….”
“너.”
“네, 루인 이공자님.”
루나는 고개를 숙이며 자신이 선보일 수 있는 가장 정중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루인의 얼굴은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그 모습에 루나는 식겁했다.
‘내가 뭘 잘못했나?’
아무리 생각해도 예법에 어긋난 짓은 하지 않았다.
했다면 방을 훔쳐본 것. 하지만 그건 용서한 일이 아닌가.
‘용서하지 않으신 건가?’
루나는 덜컥 겁이 났다.
만약 용서하지 않는다면? 자상했던 루인의 성격상 벌을 주지는 않으리라 생각되지만, 지금의 모습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하지만 루나의 걱정과는 달리 루인은 다른 용무가 있어서 그녀를 부른 것이다.
“너. 앞으로 날 루인이라 부르지 마라.”
“네넷?”
루나는 당황했다. 루인 이공자를 루인이라 부르지, 그럼 뭐라 부르란 말인가? 속마음을 읽었는지 루인은 나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앞으로 루인이 아니다. 앞으로 날 아틸라로 불러라. 나는 아틸라 더 훈이다, 그것이 나다. 나는 아틸라다.”
루인, 아니 아틸라는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