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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 아틸라 1권(5화)
2. 너구리와 기 싸움(1)
고스는 책상 위에 쌓인 서류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모두 내일까지 처리해야 할 서류들이었다.
행정을 총괄하게 되면서 권력을 한 손에 쥐게 된 일은 좋다. 하지만 실제로 자신이 직접 최종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지니 그것도 나름대로 고역이다.
하지만 이내 고스는 음침한 웃음을 지었다.
모든 서류를 최종 심사하고 확신을 내리는 작업은 당연히 백작가의 가주가 행해야 한다.
그러나 가주는 병중인 상태.
그럼 자연 후계자가 그 일을 맡아야 했으나 인물이 없었다. 대공자는 죽었다. 이공자는 벼락을 맞고 방에서 도통 나오지 않는다. 하인과 시녀들을 붙여 봤지만 연락이 없다. 스스로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자연히 이 일을 고스가 하게 됐다.
이 말은 룩스와의 권력 싸움에서 승세를 더 가져갔단 얘기다.
결정적으로 백작가의 제일 기사단, 도미니언 기사단이 자신의 세력에 편입되었다. 이로써 고스를 중심으로 한 세력은 더욱 커졌다.
얼마 안 가 룩스를 완전히 누르고 백작가를 차지하게 되리라.
“흐흐흐. 그 늙은 구렁이 같은 자식. 열 좀 받겠지.”
“물론입니다. 말만 번지르르하게 해서 외부 세력이나 끌어들이는 그런 놈이 화가 끝까지 치솟겠죠.”
방 안에 있는 기사 로엔이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고스는 만족스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 로엔은 비굴하고 돈과 여자, 그리고 권력을 밝히는 전형적인 소인배였다. 그는 기사도를 완전히 무시하는 녀석이었으나 실력만큼은 출중했다. 무엇보다 말로써 사람을 살살 녹이는 재주는 고스의 마음에 쏙 들었다. 그것이 아부임을 안다고 해도 말이다. 하여 고스는 그를 소중히 여겨 자신의 호위기사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즐거운 기분도 오래가지 않았다.
똑똑.
“누구냐.”
“고스 행정 총관님, 카솔라니입니다.”
“바쁘다. 급한 일이 아니면 가라.”
카솔라니는 이공자 곁에 심어 둔 하인이었다. 이공자 곁에서 그를 감시하란 명목이었다. 그렇지만 이공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들어오는 정보도 없다. 자연히 고스 입장에선 아무런 정보도 못 물어오는 카솔라니가 탐탁지 않다.
뿐만 아니라 해야 할 일이 많으니 한낱 하인의 말을 들을 시간이 없었다.
“저…… 그것이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끄응, 들어오지 말고 거기서 말하거라.”
“다름이 아니라 루인 이공자님께서 행정 총관님을 만나겠다고 모셔 오라고 했습니다.”
스슥― 툭!
카솔라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류를 작성해 나가던 고스의 손길이 멈췄다. 자기도 모르게 힘이 잔뜩 들어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스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카솔라니가 한 말이 그만큼 놀라웠기 때문이다.
“뭐라고 했느냐? 루인 이공자가 날 찾아? 그놈이?”
“네, 그렇습니다. 방금 전에 복도에 나와 무작정 행정 총관님을 모셔 오라 했습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네놈은 편히 쉬지 못할 것이다.”
“제, 제가 어찌 행정 총관님께 거짓을 올리겠습니까. 믿어 주십시오.”
고스는 쉽사리 믿을 수 없었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공자 때문에 가문에는 여러 소문이 돌았다. 그가 백치가 되었다느니, 아니면 벼락을 맞아 큰 상처를 입었다느니 얘기들이 많았다. 한데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어 자신을 찾아?
고스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침착하게 생각했다.
카솔라니가 감히 거짓을 고하지는 않으리라.
그렇다면 실제로 자신을 찾았단 얘긴데.
이내 고스가 콧방귀를 뀌었다.
“흥, 웃기는 일이군. 제깟 놈이 뭔데 감히 나를 오가라 한단 말이냐. 아직도 자기가 옛날 그 잘난 새끼 호랑이인 줄 아나 본데, 천만에 말씀이지. 독에 중독되고 벼락까지 맞은 놈을 무서워할 천치가 어디 있겠나!”
고스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는 더 이상 이공자가 두렵지 않았다. 그토록 무서웠던 대공자를 저리 만든 이가 누구인가.
고스는 알았다.
루인 이공자의 몸 상태가 최악이라는 것을.
그에게 독을 먹인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으니까.
고스는 당당했다.
현재 백작가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자신이었다.
“가서 전하라. 현재 이 몸이 해야 할 일이 많아 시간을 내기 어렵다고, 정 급한 일이거든 송구하지만 직접 오시라 하여라.”
“그럴 필요 없다.”
“……!”
호기롭게 외친 다음, 문 밖에서 들려오는 차가운 목소리.
고스는 순간 온몸의 털이 모두 쭈뼛 섰다.
끼이이익.
천천히 열리는 문.
그곳으로 고스의 시선이 돌아갔다. 그곳엔…… 두려운 표정의 카솔라니와 무서울 정도로 무심한 루인, 아니 아틸라가 있었다.
“루, 루인 이공자님!”
이공자를 처음 보는 순간 고스는 정말로 놀랐다.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섰고, 눈빛을 마주하자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마치 자신의 모든 생각을 다 알고 있는 듯한 느낌!
하지만 고스는 노련했다. 오랫동안 백작가에서 굴러먹던 사람이다. 고스는 이내 침착한 표정으로 웃으면서 그를 맞이했다.
“어쩐 일로 이 누추한 곳까지 오셨습니까.”
“바쁘신 몸이라 그대가 직접 올 일이 없으니 내가 직접 올 수밖에.”
“……!”
아틸라는 직설적으로 대답했다. 순간 고스의 페이스가 무너졌다.
‘이놈이 언제 이렇게?’
고스는 당황했다.
아틸라의 말 한마디에 바로 휘둘려 버렸다.
애초에 이공자는 이렇게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하는 인물도 아니었다.
또한 가신들에게도 반 존대를 하는 사람이었다.
한데 지금은 아니다.
너무나 당당했다.
가슴을 쫙 펴고 두려울 게 없다는 듯이 말하는 아틸라의 모습에 고스는 순간 말을 잃었다. 하지만 고스는 너구리였다.
쉽게 휘말릴 인물이 아니었다.
“하하하. 어찌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앉으시지요.”
“…….”
아틸라는 덤덤한 표정으로 고스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내 아틸라의 입가가 비틀어졌다.
“건방지군.”
“……예.”
“네놈, 정말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고스는 당황하다 못해 넋이 빠졌다. 다짜고짜 건방지다고 호통치는 아틸라를 보며 순간적으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그대가 내 위인가? 내가 그대의 아래인가?”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이공자님!”
“그대는 내 아래다. 나는 백작가를 이어 나갈 후계자다. 내가 곧 바츨라브 백작가다. 한데 그대가 상석에 앉고 날 이 자리에 앉혀 내려 본단 말인가?”
“그런……!”
그제야 고스는 이해가 갔다. 당연히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상석에 앉아야 했다. 그것이 손님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굳이 따지자면 이공자가 당연히 상석에 앉아야만 했다. 그것까지 고스가 생각지 못했다.
‘이거 일부러 시비를 거는군, 이공자……!’
크게 호통 치며 차갑게 말하는 아틸라를 보며 고스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지금껏 이공자는 자신을 견제하긴 했으나, 바로 앞에서 이리 호통 치지는 못했다. 그만큼 고스의 힘이 컸었고, 이공자에게는 그렇게까지 할 만큼의 배짱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이 자리에 앉으시지요.”
“미처 생각지 못했다면 평소 나를 존중하지 못했다는 것을 뜻하는군. 정말로 오만하구나. 한낱 가신 주제에 말이다!”
아틸라는 대놓고 시비를 걸었다. 고스는 열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손이 부들부들 떨었다.
이 어린놈이 면박을 주는데 어찌 화가 안 나겠는가. 그것도 누구나 다 알아차릴 정도로 꼬투리를 잡아서 말이다.
그러나 고스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여기서 화를 낸다면 결국 아틸라의 의도대로 상황이 흘러간다. 그는 능글맞은 너구리였다.
고스는 참을 수 있었다. 하나 그가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이 방 안에는 고스와 아틸라를 제외하고도 다른 인물이 있었다.
바로 소인배 로엔이었다.
고스는 참을 수 있어도 로엔은 참을 수 없었다. 누가 봐도 일부러 시비 걸려고 꼬투리를 잡는 모습. 그것도 나른한 표정으로 말하는 아틸라의 모습에 로엔은 화가 치솟았다.
로엔은 잘 알고 있었다.
이공자가 새끼 호랑이라 불리던 시절이 아님을.
이공자가 먹은 독은 몸을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혹사시키면 혹사시킬수록 더욱 빠르게 퍼져 나간다.
천천히 생명령을 고갈시켜 가는 독!
자연히 근육이 빠지고 살이 빠지고 피부가 메말라 간다.
생기를 잃어 가는 것이다.
로엔은 자신만만했다. 눈앞의 이공자는 현재 한심한 수준이었다.
“말이 심하십니다, 이공자님!”
“자네는 뭔가?”
“도미니언 기사단의 수석기사 로엔입니다. 저는 실수를 인정하고 용서를 비는 행정 총관님께, 이공자님이 부당하게 사내답지 못한 행동을 하고 있음에 기사 된 자로서 참을 수가 없습니다!”
말은 청산유수였다. 하지만 그걸 지켜보던 고스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지금 로엔의 저런 행동이 애초에 아틸라가 원하던 바였다.
‘저, 저 멍청한 자식!’
고스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자신이 극도의 인내심으로 참았건만 저 멍청한 소인배 자식이 사고를 치고 있다!
그 순간 아틸라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어서 행정 총관님을 용서하시고 저분의 짓밟힌 위신을 살려 주시지요!”
“내 눈을 똑바로 보라, 로엔.”
침을 튀기며 강력히 주장하던 로엔은 아틸라의 눈을 마주하는 순간 혼을 빼앗기는 기분이었다.
‘몸, 몸을 움직일 수 없어!’
너무나 두려워서 몸이 완전히 경직되었다. 근육이 놀랐다. 정신이 놀랐다. 그리고 심장이 터져 나갈 듯 부풀었다.
실제로 혼을 빼앗겼다.
흑마법, 탈혼안(奪魂眼)!
눈빛으로 상대의 영혼을 뺏고 지옥의 공포를 뇌리에 직접 작렬시키는 강력한 흑마법!
그것이 아틸라의 눈을 통해 펼쳐졌다.
“으……어어.”
로엔은 마나홀에 있던 마나를 회전시켰다. 탈혼안을 이겨 내기 위해 몸이 반응한 일이었다. 순간 방 안에서 강렬한 기운이 터져 나왔다.
공포!
지독한 공포가 로엔에게 쏟아졌다.
‘이, 이대로는 죽는다!’
탈혼안은 분명히 무서운 흑마법이다.
극성에 달하면 세상 그 누구도 탈혼안을 벗어날 수 없다. 아틸라의 흑마법은 환혹과 환상에 가깝다. 그러나 루인의 육신은 그런 환혹과 환상을 펼쳐 내기에 아직 한참이나 부족했다.
현재 펼쳐지는 탈혼안은 본래 아틸라가 펼치는 능력에 십 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 때문에 로엔은 탈혼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죽기 싫으면 내가 죽여야 해!’
뎅뎅뎅뎅뎅!
로엔의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
뎅뎅뎅뎅!
죽음의 공포에 도달한 순간, 아드레날린이 폭발적으로 분비됐다.
로엔은 자신도 모르게 오른손을 검집에 가져갔다.
단 한 칼에! 로엔은 진심으로 아틸라를 죽이고자 마음먹었다. 탈혼안의 영향이 너무 컸다. 탈혼안의 공포는 지옥이 도래하는 공포와 같다. 평범한 사람은 평생을 살아도 느끼지 못하는 초월적인 공포!
그것을 받아 낸 로엔은 그저 상대를 죽여야만 자신이 살 수 있다는 맹목적인 생각에 빠졌다.
로엔이 검을 뽑아내는 순간.
“어딜……!”
파지직!
아틸라는 벼락과도 같이 움직였다. 왼손으로 뽑으려는 로엔의 검을 다시 밀어 넣었다. 동시에 오른손으로 얼굴을 후려쳤다.
‘이, 이 무슨……!’
너무 빠르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주먹!
마치 뇌전을 손에 움켜쥔 듯 튀는 스파크!
위험하다는 신호가 머리에서 울렸다.
하지만…… 피할 수 없었다.
정말 그의 움직임은 벼락이었다. 하늘에서 내리꽂히는 벼락!
그것이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