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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 아틸라 1권(7화)
3. 한 방이면 된다, 로엔(2)
연무장.
많은 기사와 수련생이 연신 땀을 흘리며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휙! 휙! 휙!
“독하군, 독해.”
“그러니까, 어떻게 쉬지도 않고 반나절을 저리 달릴 수 있지?”
기사 몇몇이 서로 모여 속닥거리기 바빴다.
그들의 시선이 도달하는 곳에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달리기를 멈추지 않는 아틸라가 있었다.
아틸라는 비 오는 듯 땀을 흐르고 있었다.
얼굴은 붉게 달아오르다 못해 이제는 창백해지고 있었다.
산소 공급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틸라는 멈추지 않았다. 저렇게 위태롭게 비틀거리는 일이 벌써 반나절째다.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어 무작정 달리기를 시작한 지가 한 달이 지났다.
‘전쟁은 지구력이다.’
아틸라는 미래를 내다보았다.
분명 큰 전쟁이 있을 것이다. 전쟁의 화마가 세상을 뒤덮고 울부짖음이 가득한 지옥이 반드시 오리라.
전쟁에서 평생을 살아온 아틸라는 지구력이 전쟁에서 살아남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라 생각했다.
어차피 전쟁에서 눈먼 칼에 맞아 죽나, 정확한 화살에 맞아 죽나 똑같다. 단지 누가 오랫동안 버티냐에 달려 있다. 며칠 밤을 자지 않고 버틸 수만 있다면 쉽사리 죽지 않는다.
아틸라는 한 달 가까이 자신의 한계를 부쉈다.
루인의 육체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육체가 한계라고 느낀 순간 멈춘다면 성장은 없다.
그렇지만 그 한계를 이 악물고 버텨 내면 새로운 한계가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한 단계씩 한계를 벗어나면 어느새 초인적인 체력을 가지게 된다. 아틸라는 끊임없이 한계를 초월했다.
온몸에 그는 모래주머니를 주렁주렁 달았다.
다리에는 근육이 한 달 전과는 달리 잔뜩 붙었다.
야생마와 같은 탄탄한 근육! 모래주머니를 팔에 달고 뛰기 때문에 어깨와 팔뚝에도 오밀조밀한 근육이 잡혀 있었다.
“헉, 헉, 헉, 헉!”
눈앞이 흐려졌다.
한계가 보였다. 하지만 아틸라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끝내 아틸라는 다시 한 번 한계를 넘었다.
털썩.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쓰러진 아틸라. 그런 그를 보며 많은 기사들이 독하다는 듯 혀를 찼다.
특히 로엔은 눈을 치켜뜨며 지켜보고 있었다.
“웃기는군. 무작정 달리기만 하면 강해질 줄 아나?”
로엔에게 있어서 한 달 전의 일은 수치로 남았다. 다시는 떠올리기는 싫은 기억. 하지만 늘 머릿속에 그때의 잔영이 남아 있었다.
아틸라의 공포!
그 공포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몸서리치고 나면 수치심이 몰려왔다. 그래서 로엔은 아틸라를 볼 때마다 두려움과 동시에 살심이 마구 솟구쳤다. 그의 성격은 전과 달리 많이 포악해졌다.
유창한 언변과 잘생긴 외모로 능글맞았던 그의 성격이 지금은 별일도 아닌 것에 쉽게 화내고, 도통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포악한 성정이 되었다.
그런 이유로 그의 곁엔 점차 사람이 없어졌다.
그렇지만 로엔의 말에 토를 다는 사람도 없었다.
원래 실력이 출중해 젊은 나이에 수석기사까지 된 로엔을 건드려선 좋을 일이 하나도 없었다. 또한 대부분의 기사가 로엔의 말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달리기만 해서 체력이야 기를 수는 있을 터.
하지만 기사라면 모름지기 검술을 익혀야 했다. 대부분의 기사들은 간단한 워밍업으로 체력을 기르고 몸을 푼다. 그 외의 시간들은 검술과 마나연공법에 모두 투자한다.
반나절을 달리기만 하는 아틸라가 우스울 수밖에 없었다.
“또 쓰러지셨네.”
남자만 가득한 연무장에 종종걸음으로 달려오는 여인이 있었다.
루나였다. 루나는 별달리 놀란 표정을 짓지도 않았다. 매우 익숙한 상황인지 한숨을 푹 내쉬며 가녀린 몸으로 아틸라를 부축했다.
처음 아틸라가 쓰러져서 방으로 왔을 때 루나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세상에 수련을 얼마나 격하게 했다면 쓰러질까.
무엇보다 옛날에 격한 수련을 하다가 구토를 하며 쓰러진 적이 있었다. 설마 다시 그러는 것일까 하고 얼마나 걱정했을까.
기우였다.
아틸라는 고작 세 시간 만에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비틀거리는 몸짓으로 다시 연무장을 향했다.
루나가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거려도 소용없었다.
아틸라의 의지는 그 누구도 꺾지 못했다. 다시 연무장으로 간 아틸라는 수련을 계속했다. 그렇게 매일 달리다가 쓰러지고, 깨어나 다시 수련하는 일상이 반복됐다.
자연히 아틸라가 쓰러지면 가장 먼저 달려오는 이는 루나였다.
루나에겐 더 이상 아틸라를 두려워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흉흉하기 짝이 없는 눈빛은 아직도 무섭다.
하지만 그가 계속 정신을 잃는 모습을 보니, 이젠 안타깝고 동정마저 생긴다. 그도 같은 사람이란 생각에 루나는 아틸라를 저번처럼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 물론 아틸라가 눈을 치켜뜨고 미간을 찌푸리는 것만큼 두려운 일은 없었지만 말이다.
“이공자님, 이제 그만하셔요. 왜 이리 몸을 혹독하게 다루시는 거예요?”
루나는 아틸라를 부축하며 울상을 지었다. 그러나 가녀린 루나가 부쩍 근육이 붙고, 땀 때문에 무거워진 아틸라를 부축하기란 쉽지 않은 일. 그렇게 루나가 힘겨워할 때, 별안간 루나의 어깨가 가벼워졌다.
“내가 도와주겠다.”
번쩍.
루나는 눈을 크게 떴다. 한 젊은 기사가 아틸라를 들어 올리더니 등에 업었다. 루나는 고맙다는 의미로 고개를 숙이고는 길을 안내했다.
로그리스.
젊은 기사의 이름이었다.
요 며칠 동안 로그리스는 아틸라의 수련을 쭉 지켜봐 왔다.
아틸라를 보면 가슴이 뛰었다. 미친 듯이 노력하는 그의 모습에 로그리스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로그리스는 대표적인 노력파였다. 로그리스와 또래인 로엔이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어 출중한 실력을 갖게 된 반면, 로그리스는 재능이 없었다.
그렇다고 둔재라고 하기도 뭐했고, 단지 평범했다.
그러나 로그리스는 그것을 노력으로 극복했다.
어린 시절부터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로엔이 한두 번 검을 휘두를 때, 로그리스는 열 번, 백 번 휘둘렀다. 처음엔 그렇게 로엔과 비슷한 선상에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재능의 차이는 더욱 커져만 갔다.
자신은 정체되어 있는데 로엔은 저 멀리 나아가 있었다.
그 기분을 알까?
누구는 자신보다 게으른데 단지 재능만으로 앞선 간다. 마치 당연한 것처럼.
그토록 비참한 기분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일까? 얼마 전부터 도저히 늘지 않는 실력에 로그리스는 좌절을 맛봤다.
결국 노력으로 천재적인 재능은 이길 수 없음일까?
로그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해 왔다.
하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노력, 내가 한 것이 진정한 노력이었던가?’
아틸라의 모습은 로그리스에게 충격이었다.
자신의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그 무식한 수련.
죽을 때까지 뛰고 또 뛰고, 끝내 한계를 넘고 쓰러지는 것을 반복하는 아틸라.
하루하루가 지날 때마다 한계는 깨졌다.
매일 아틸라는 자신이 전날 뛰었던 거리의 두 배 가까이를 뛰었다. 더 이상 안 되리라 생각되어도 아틸라는 그것을 무시하듯 한계를 넘었다. 새로운 한계가 만들어지고 그것을 다시 넘고…….
처음 로그리스는 아틸라를 우습게 생각했다.
되지도 않는 것을 행하려는 바보라고. 그래서 보여 주려고 아틸라가 뛸 때 같이 뛰었다. 처음엔 로그리스가 확실히 우세였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로그리스는 아틸라를 이길 수 없었다. 근래에는 체력으로 아틸라를 쫓아가기란 절대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말았다.
자신이 두, 세 시간이면 헐레벌떡하여 쓰러지는 반면, 아틸라는 반나절을 넘게 뛰었다. 어느새 격차가 그만큼 나 버렸다.
그것이 진정한 노력이다.
로그리스는 드디어 깨달았다.
자신이 행한 것은 단지 노력을 표방한 수련일 뿐, 진짜 노력은 아니었다.
‘이공자…… 백작가의 새끼 호랑이. 나는 처음에 그가 재능을 타고난 천재인 줄만 알았다. 한데, 아니었구나. 진정 노력만으로 그는 새끼 호랑이라 불리는 것이었어.’
아틸라를 생각하는 로그리스의 얼굴엔 존경의 빛이 어렸다.
* * *
“크윽…….”
온몸이 무거웠다. 팔과 다리가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몸만큼은 상쾌했다. 온몸의 땀을 다 흘려버리자 그것만큼 기분 좋은 일이 없었다.
아틸라는 탁자 위에 떠 놓은 냉수를 마셨다.
벌컥벌컥.
“흐……후우.”
시원하다.
아틸라의 정신이 맑아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팔과 다리에 매달았던 모래주머니가 벗겨져서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흠…….”
누가 그랬는지 짐작이 온다.
바로 루나이리라. 자신이 시키지 않아도 연무장에서 기다리다 쓰러지면 맨 먼저 달려와 이곳으로 옮겨 놓고, 이렇게 모래주머니까지 벗겨 놓고 물을 떠다 놓는다.
“기특하군.”
속내를 잘 비치지 아틸라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사실 아틸라는 이곳에서 루나를 가장 신뢰했다.
다른 하인과 시녀는 그저 감시자일 뿐이었다.
루나만이 진정 순수한 마음으로 자신을 챙겼다. 아틸라가 루나를 신뢰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하기야, 원체 이 몸뚱이가 미남이어야지.”
아틸라가 쓴웃음을 지었다.
루나가 루인을 흠모했단 사실은 연애경험이 별로 없는 아틸라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루인은 무척이나 미남이었다.
윤기가 흐르는 금발 아래 드러난 날렵한 턱 선과 짙은 송충이 같은 눈썹은 강렬했고 시원시원했다. 이목구비가 아주 뚜렷했다.
‘정말 다르군.’
문득 든 생각이다.
과거 아틸라는 쉽게 말해 무섭게 생겼다.
처녀 허리통만 한 팔뚝에 고목의 뿌리줄기처럼 억세기 그지없는 허벅지. 수많은 상처로 도배된 얼굴과 몸통!
그에 반해 루인의 얼굴은 곱상하기까지 하다. 그것이 계집애 같다 하며 비하했지만, 지금은 루인의 외모가 은근히 마음에 드는 아틸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