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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 아틸라 1권(8화)
3. 한 방이면 된다, 로엔(3)


룩스.
바츨라브 백작가의 외무관 룩스는 근래 힘이 났다.
고스의 세력이 너무 커져 이제는 자신이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자신의 파벌에서 하나둘 떠나는 사람이 나타날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 가뭄에 단비가 내렸다.
이공자가 본격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한 일이다.
본래 룩스 또한 이공자를 견제했다. 야수의 핏줄이다. 새끼 호랑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다. 견제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이공자가 고스의 세력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행정을 총괄하며 권력을 움켜쥐던 고스였지만, 대부분의 최종 결의안이 이공자 손에 들어가면서 그 세력이 급속도로 약해졌다.
자연 고스 파벌은 아틸라의 행보에 반대했지만 룩스는 아틸라를 지지하고 나섰다. 고스의 세력이 약해지면 좋은 건 룩스 자신이었으므로.
“왜 그리 웃고 있지, 룩스?”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음침한 목소리에 룩스가 경련을 일으키듯 몸을 떨었다.
“주, 주인님!”
“룩스, 아직도 백작가 하나를 어찌 못 했나?”
“그, 그것이 고스, 그놈이 워낙 잔머리를 굴리다 보니…….”
“이럴 줄 알았으면 네놈이 아니라 고스를 택할 걸 그랬나.”
룩스가 바닥에 몸을 엎드렸다.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런 형체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검은색의 그림자가 일렁일 뿐이었다.
룩스에게 그림자는 공포였다.
어느 날 나타나 백작가를 집어삼키라고 말한 그림자!
그 정체는 알 수 없었다.
감히 알려고 하지도 못했다.
“조, 조만간 백작가를 갖다 바치겠습니다!”
“똑바로 일을 처리하도록 룩스. 난 기다리는 것이 매우 지루하다. 이 지루함을 달래려면 많은 피가 필요하거든.”
순간 허공에 핏줄이 그어졌다.
룩스의 이마에 길게 줄이 그어지더니 피가 콸콸 흘러내렸다. 룩스의 얼굴이 두려움으로 일그러졌다.
“알,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루인 이공자가 최근에 날뛴다며?”
“그, 그렇습니다. 덕택에 너구리 놈의 세력이 약해지고 있습니다.”
“흠, 듣자하니 대공자 같다고 하더군.”
“대공자의 행보와 매우 유사합니다. 대공자가 우선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한 일이 백작가의 모든 일을 서류화해서 자신이 직접 관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연히 힘이 대공자에게 몰릴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 대공자를 죽였지. 그렇지 않은가?”
“그, 그건 고스 놈이……!”
“같이 행해 놓고 뭘 그래.”
그림자가 웃었다.
룩스는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단지 지켜보고만 있으면서 그림자는 모르는 것이 없었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말 그대로 그림자였다.
고스는 그것도 모르고 자신이 백작가를 차지하겠다고 날뛰고 있겠지.
진정 백작가의 주인이 될 사람은 바로 이 앞에 있는데…….
“하여튼 이공자를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야수의 핏줄은 어디로 가지 않으니까.”
“충고 새겨듣겠습니다.”
“조만간 또 나타나지. 룩스.”
그림자는 사라졌다.
그럼에도 룩스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뜨거운 열기가 훅훅했다.

영주성 내에 있는 대장간. 많은 대장장이들이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아틸라가 등장했지만 그 누구도 시선을 주는 이 없었다.
마음에 들었다.
아틸라는 대장장이를 존중했다. 그들의 손에서 나오는 무기야말로 전쟁의 핵심이었다. 대장장이만큼 귀한 인적자원이 또 존재할까.
아틸라는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한 늙은 대장장이가 작업을 끝내고 아틸라에게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이공자님.”
“그래.”
“저번에 주문하신 배틀액스(battle―ax) 두 자루가 모두 완성되었습니다.”
늙은 대장장이는 아랫사람을 시켜 무언가를 들고 오게끔 했다.
쿠웅!
장정 둘이 상자를 내려놓자 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아틸라는 직접 다가가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근사하군.”
상자 안에는 양쪽으로 날이 서 있는 커다란 배틀액스 두 자루가 놓여 있었다. 도끼날에는 척 봐도 무서운 예기가 잔뜩 흐르고 있었다.
손가락을 대자마자 피부가 갈라지고 피가 흘러나왔다.
아틸라의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가 지어졌다.
이곳에도 전투 도끼는 많았다. 하지만 아틸라의 마음엔 들지 않았다. 대부분의 전투 도끼가 날이 한 쪽에만 있었을 뿐더러, 휴대하기 편하게 무게가 역시 가벼운 편이었다.
그러나 도끼는 일격필살(一激必殺)의 무기다.
단 한 방에 상대를 짓이겨 죽이지 못한다면 치명적인 약점을 갖게 된다.
아틸라는 이런 도끼의 특징이 마음에 들었다.
굳이 베고 찌르고, 화려한 초식이 필요 없다.
단 한 방!
그 한 방으로 적을 모두 베어 낼 수 있으니 얼마나 매력적이란 말인가.
단 일격에 필살하려면 파괴력이 극에 달해야 했다.
그것을 살리기 위해 아틸라는 무게를 늘렸다. 또한 전장에서 전 방위로 날뛸 수 있게 양날로 새롭게 제작했다.
아틸라는 호기롭게 한 손으로 한 자루를 들어 올렸다.
꿈틀!
“맙소사……!”
“저걸 한 손으로 들었어?”
“대단한 괴력이군!”
지켜보던 대장장이들이 수군거렸다. 특히 제작에 직접 참여했던 늙은 대장장이와 그의 제자 몇몇의 놀라움은 더했다.
본래 배틀액스는 한 손으로도 다룰 수 있는 무기다.
하지만 아틸라의 주문대로 제작하다 보니, 이건 한 손으로는 커녕 양손으로 들 수나 있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무거웠다.
근데 그것을 한 손으로 들어내다니!
‘이거, 아직 죽을 맛이군.’
배틀액스를 들어 올린 아틸라는 쓰게 웃었다.
이 정도 무게라면 과거 자신의 무기에 비해 가벼운 편에 속한다. 한데 들어올리기도 사실 벅찼다. 그렇지만 아틸라는 버텨 냈다. 이제 이것을 가볍게 휘두를 정도로 수련해야만 했다. 아틸라는 이어 나머지 배틀액스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줄을 감아 배틀액스를 등에 X 자로 매달았다.
허리가 끊어질 듯했다.
그동안 팔과 다리를 비롯해 온몸에 전체적으로 골고루 근육이 붙었다. 그러나 배틀액스의 무게는 상상을 초월했다.
‘이 정도로 쓰러지면 안 되지.’
아틸라는 다시 무기를 제작할 의도는 없었다.
이대로 수련한다면 분명 가볍게 다룰 수 있게 되리라.
“아, 그리고 하시온.”
“예, 이공자님.”
하시온이라 불린 늙은 대장장이가 고개를 숙였다. 그는 이 대장간의 총책임자였고, 아틸라가 보기에도 뛰어난 장인이었다.
“젊고 실력이 좋은 대장장이 셋을 선별해 달라고 했는데…….”
“예, 선별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
“그건 묻지 마. 그들에게도, 나에게도 좋은 일이니.”
아틸라는 뒤에 있던 젊은 대장장이 셋을 이끌고 대장간을 나갔다.
그가 향하는 곳은 백작가 뒤에 위치한 마구간이었다.
마구간에 도착하자 마구간지기 노린이 빠르게 뛰어왔다.
“오셨습니까, 이공자님.”
“노린, 내가 저번에 해 놓았던 말 기억하지?”
“물론입니다.”
노린은 머리가 반쯤 벗겨진 중년인이었다. 백작가에서 그만큼 말에 대해 아는 이는 없을 정도로 말과 친하고 말을 다루는 재주가 몹시 출중했다.
“이자들에게 매일 아침마다 말 타는 법을 가르쳐 주게.”
“예, 알겠습니다.”
그 말에 놀란 건 대장장이들이었다.
세상에 어떤 대장장이가 승마술을 배운단 말인가?
승마술은 기사만의 전유물이다.
“저, 저희가 승마를 배운단 말입니까?”
놀란 대장장이가 소리쳤다. 아틸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단순한 승마가 아니다. 너희들은 말을 타고 초원을 내달려야 한다.”
“저, 저희들은 기사가 아니라 단지 대장장이일 뿐인데.”
“그렇다. 너희들은 장인이다. 나는 너희들을 기마장인(騎馬匠人)으로 만들 셈이다.”
“기, 기마장인이요?”
기마장인!
그것은 훈족에게만 있었던 독특한 직업이었다.
걸음을 떼고 훈족 사람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은 언어도, 전투도 아닌 바로 승마였다. 훈족만큼 세상에 말과 친한 사람들이 또 있을까.
자연히 무기를 수리, 제작하는 장인들도 말 타는 실력에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보통 훈족은 전투를 치를 때 약 300명 내외로 공격대를 구성한다. 그들은 말을 타고 빠르게 움직인다. 공격대가 지나가는 자리에는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을 정도로 파괴적이다.
한데 그렇게 날뛰다 보면 그들의 활, 도끼, 검 등 많은 병장기들이 부서지거나 날이 나가는 일이 빈번했다. 그렇지만 곧바로 수리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로마인들의 전쟁처럼 대장장이를 끌고 다니려면 공격의 최장점인 기동력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고안된 것이 바로 기마장인이다.
수많은 연장을 등에 가득 메고 말을 타고 내달리는 기마장인!
병장기가 부서지거나 날이 나가면 즉시 그 자리에서 수리를 한다. 그렇게 한 공격대에는 세 명이 한 조가 되어 기마장인이 투입되었다.
활에 능하고 전투에 귀신이 된 자, 인간병기들이 공격을 맡고 뒤에서 기마장인들이 따른다!
그 강력했던 로마제국을 무너뜨리던 훈족만의 힘이었다.
“또한 누가 승마가 기사들만의 전유물이라 했는가?”
“그, 그것은…….”
대장장이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사실 사내로 태어나 말을 타고 질주하는 꿈을 그 누가 생각해 보지 않았겠는가.
다만 할 수 없었을 뿐이다.
기사들의 전유물이란 인식이 박힌 상황. 평민 출신인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대장장이 짓밖엔 없었다. 그런데 지금 말이 기사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한다. 자신들도 말을 탈 수 있다고 한다. 그들의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흥분으로, 그리고 기대감으로.
“말은 우리 인간들의 친구요, 전우요, 평생을 함께할 존재들이다.”
그 말에 대장장이들 아닌 노린이 감명을 받았다.
그 역시도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대 때부터 인간들과 역사를 써 온 말들. 그리고 그런 말들을 관리하는 자신에게 노린은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아틸라의 말을 들으니 자부심은 더 커졌다.
“너희들은 기사들보다 말을 더 잘 다룰 생각으로 배워야 할 것이다. 여기 노린이 가르쳐 줄 터이니 배우라. 아침에 말 타는 법을 배우고 오후부터 하시온 슬하에서 열심히 대장장이의 길을 걸어라. 난 너희를 존중한다. 노린 너도.”
아틸라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대장장이들과 노린을 바라보았다.
꿈틀.
대장장이들과 노린의 가슴이 순간 뛰었다.
어떤 이가, 어떤 귀족이 한낱 마구간지기에게, 그리고 대장장이들에게 저런 말을 한단 말인가? 아틸라의 말은 사탕발림도 아니었다. 진심이 느껴졌다.
실제로 아틸라는 진심이었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뛰어난 전사?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훈족은 태생적으로 모두가 뛰어난 전사들이었다.
훈족에게 부족한 것은 장인들이었다. 그들이 없으면 애초에 전쟁은 힘들다. 또한 훈족의 전투에선 말이 절반 이상은 차지한다. 그런 말들을 관리하는 마구간지기를 어찌 가벼이 여기겠는가.
아틸라에게 있어서 눈앞의 노린과 대장장이들이 허영심만 잔뜩 든 기사들보다 훨씬 중요한 존재들이었다.
“노린, 넌 성심성의껏 저 녀석들을 가르쳐라. 아, 물론 말에 빠지는 일은 좋은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장인의 길에 소홀히 해선 안 된다.”
“예, 알겠습니다!”
노린과 대장장이들이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존경의 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