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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 아틸라 1권(11화)
4. 너구리 사냥(2)
모두가 기다렸다.
그리고.
터벅, 터벅.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소란스러웠던 회의장에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요 근래 아틸라의 행보는 파격적이었다.
최근에 로엔이 죽은 것이 유효했다.
로엔의 죽음은 큰 파장을 일으켰다. 누구나 로엔이 백작가의 젊은 기사들 중 제일의 실력을 갖고 있단 사실에 동의를 한다.
그런 로엔을 단 일격에 죽였다고 소문났다.
믿기 힘들지만, 거짓을 고하지 않는 기사들의 증언이 잇달았다.
일각에서는 야수의 핏줄이 눈을 떴다고 수군댔다.
야수의 핏줄!
바츨라브 백작의 철혈정치!
그것을 떠오르자 룩스와 고스뿐만 아니라 모든 가신들이 몸을 떨었다.
감히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감히 고개를 들고 떳떳하게 소리칠 수도 없었다. 그만큼 바츨라브 백작의 철혈정치는 두려웠다.
그것을 떠올리자 회의장엔 침묵만이 가득했다.
“모두들 모였소?”
아틸라가 등장했다.
아틸라는 한결 무심한 표정이었다. 상석에 앉은 아틸라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가신들 한 명, 한 명 면밀히 살폈다. 그리고 고스를 바라보는 아틸라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지어졌다.
“……!”
순간 고스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불안함이 갑자기 몰려왔다. 아틸라의 웃음은 너무나 불길했다.
“내가 가주 대행으로서 회의를 소집한 데에 의문이 많을 것이라 생각되오.”
“그렇습니다. 무슨 급한 일이 있기에 이 많은 사람들을 한자리에 불려 모았습니까?”
룩스가 조용히 말했다.
말에 가시가 있었다.
감히 네까짓 게 뭔데 우리들을 이리 모이게 하였느냐.
아틸라는 속으로 웃었다.
고스는 늙은 너구리인 반면, 룩스는 뱀이었다. 독을 숨겨 두고 언제든지 물어뜯을 준비를 하는 늙은 뱀.
아틸라는 곧 죽을 뱀과 너구리를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나는 몇 달 전 죽은 우리 형님에 대해 다시 조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소.”
“……그, 그 무슨!”
“이공자님!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공자께선 마나폭주로 안타까운 목숨을 잃은 것이 드러났거늘……!”
“내 그것이 이상하단 말이오.”
아틸라의 목소리엔 고저가 없었다. 그 목소리에 가신들은 순간 두려움을 느꼈다.
무엇보다 고스의 두려움은 더욱 컸다.
‘이공자, 이놈이 끝내 나를 죽이려는구나!’
가신회의를 소집한 이유를 알았다.
이 자리는 자신이 죽을 자리였다. 이공자는 간악하게도 모든 이가 보는 앞에서 고스가 행한 짓을 낱낱이 공개하고 처리할 생각이었다.
빠져나갈 구멍도 없이 말이다.
“내 형님은 이미 검으로서는 상승의 경지에 올랐고, 우리 가문의 마나연공법은 순수하기 그지없어서 마나폭주를 일으킬 만한 구석이 하나 없소. 무엇보다 형님처럼 경지에 오른 이가 어찌 마나폭주로 목숨을 잃겠소? 이상하지 않소이까? 고스 행정 총관?”
아틸라는 고스를 콕 집어 물어보았다. 고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옆에서 지켜보던 네크로는 일이 어렵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고 나섰다.
“신이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말씀하시오, 네크로 단장.”
아틸라는 이 자리에 모인 가신들의 이름과 직위를 모두 알았다. 그동안 루인의 일기장과 루나의 말로 가신들의 인적사항을 알아냈던 터였다.
네크로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아무리 뛰어난 기사라고 하더라도 마나폭주로 목숨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동안의 문헌에도 이런 기록이 많고, 실제로 저 또한 그런 경우를 수없이 많이 봐 왔습니다.”
네크로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마나는 섬세하다. 아무리 뛰어난 기사라고 하더라도 마나폭주로 목숨을 잃을 수 있었다.
문제는 그것이 정말로 희박한 확률이라는 부분이었지만.
아틸라가 웃으며 말했다.
“알고 있소. 그래서 다시 한 번 조사하자는 것이오. 형님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아우의 마음이라 생각하고 이해해 주시오. 조사해서 별문제가 없으면 그만 아니겠소.”
“그리 행하시지요. 이공자님.”
고스가 어느새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런 모습에 룩스가 눈을 빛냈다. 대공자의 죽음에 가장 깊게 관여한 자는 바로 고스였다. 비록 룩스 자신도 관여하지 않았다고는 말 못 하지만, 모든 일을 주관한 이는 바로 고스였다.
그런데 저리 태연한 표정을 짓다니?
‘너구리 자식, 무슨 수가 있군.’
당연히 고스에겐 준비한 방도가 있었다.
조사라고 해 봤자, 일단 무덤을 파헤쳐서 시신을 재 부검하는 방법뿐일 것이다. 고스는 만일을 대비해 무덤에 다른 이의 시신을 묻어 놓았다.
대공자와 유사한 체격의 시신.
또한 마나를 수련했던 기사의 시신이었기에 마나의 흔적 역시 많이 남아 있었다. 아무리 아틸라가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해도 증거가 이렇다면 어쩔 수 없으리라.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놓이는 고스였다.
“그럼 조사단을 편성하도록 하지요.”
고스가 오히려 한발 나섰다. 고스는 고개를 들어 아틸라를 보았다.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아틸라의 얼굴을 본 순간, 이유 모를 불길함에 휩싸였다.
아틸라는 웃고 있었다.
‘다 그럴 줄 알았다’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럴 필요 없소. 내 미리 조사를 했소.”
“그, 그렇습니까? 하지만 가신들의 의견 통일도 없이…….”
고스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곧바로 반발하고 나섰다.
“고스!”
쾅!
아틸라가 순간 표정을 굳히며 탁자를 강하게 내려쳤다.
그 박력에 가신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네놈은 형님을 중독시켜 죽이고, 그 시신까지 욕보였다. 그런데 네놈이 뻔뻔하게 얼굴을 들고 이 자리에 있는 것이더냐!”
쾅!
직격탄이었다.
아틸라는 박력 넘치는 목소리로 고스를 호통 쳤다.
순간 고스의 몸이 굳어졌다. 아틸라의 박력도 박력이었지만 설마 여기서 저렇게 적나라하게 까발릴 줄 어찌 알았겠는가!
조용히, 그리고 은밀히 압박하리라 예상했다.
한데 이건 예상 못 했다.
“그, 그 무슨!”
“고스 행정 총관이 대공자님을 죽이다니?”
“그게 사실이오?”
회의장은 시장바닥처럼 소란스러워졌다.
그 말의 파급력은 어마어마했다.
그것은 충격이었다. 사건의 전말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고스의 파벌 중에서도 대공자를 저리 만든 이가 고스임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파벌 내에 핵심 몇몇만이 알 뿐이다.
회의장엔 혼란이 가중되었다.
“그 무슨 망발이시오, 이공자!”
고스가 소리쳤다.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씌워 소인을 죽일 생각이시오?!”
“나 도미니언 기사단장 네크로도 지금 이공자께서 한 말에 책임을 묻겠소.”
네크로도 가세했다.
하지만 아틸라는 물러섬이 없었다.
“죄인들이 감히 말이 많구나.”
“우리들을 죄인 취급하지 마시오. 만약 이공자께서 자신이 한 말에 대해 책임지지 못하신다면 나 또한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고스가 흥분된 얼굴로 소리쳤다. 여기서 밀린다면 끝장이었다. 그건 네크로도 마찬가지였다. 네크로는 기사다. 명예를 중시하는 기사다.
그런 기사에게 주군을 독살했단 사실이 밝혀지면 얼마나 치명적이겠는가.
네크로도 절박했다.
“푸하하하! 웃기는구나!”
아틸라가 별안간 대소를 터뜨렸다. 고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공자, 이공자가 정녕 미친 것이오?”
“하하하하! 고스, 너는 정말 건방지구나. 여전히!”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아니었다.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눈을 마주한 순간 고스는 심장이 멈추는 착각이 들었지만 그도 악에 가득 차 있었다.
“어디 한번 해 보시오. 나 또한 가만있지 않을 것이오.”
“나는 고스 행정 총관을 막역한 친우라 생각하오. 그런 고스에게 이런 누명을 씌운다는 것은 나에 대한 모욕이라 생각하오. 이공자께선 자신이 한 행동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를 곧 깨닫게 되고, 책임을 져야 할 것이오!”
“우습구나. 죄인들이여, 죄인들이 호통을 칠 정도로 바츨라브 백작가가 우습게 보였는가?”
아틸라는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거기서 느껴지는 박력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틸라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이 담겨 있었다.
“여봐라, 들고 오너라!”
아틸라가 소리치자 밖에선 건장한 장정 넷이 큰 관을 들고 왔다. 일견에도 화려하고 웅장하기 짝이 없는 관이었다.
관을 확인한 고스의 입가에 비웃음이 맺혔다.
바로 대공자의 관이었다.
하지만 시신은 대공자가 아니니 어찌하겠는가?
또한 시신이 모두 썩어서 사라졌을 텐데 어찌 확인하겠는가.
그럼에도 고스는 슬금슬금 치솟는 불길함을 완전히 떨치진 못했다.
“이것은 내 형님의 무덤에서 나온 관이오.”
“어찌 가신들의 의견도 없이 대공자의 무덤을 파헤쳤단 말이오?”
“시끄럽다, 죄인.”
아틸라는 반발하는 고스의 말을 끊었다. 하지만 반발은 고스뿐만 아니었다. 고스의 파벌들은 모두 일제히 반발했고, 룩스 파벌도 불만스런 기색이 가득했다.
그들로서는 지금의 자유가 만족스러웠다.
백작의 철혈정치에 숨도 못 쉬던 때에 비해 자신들의 힘은 강해졌고, 입지도 깊어졌다. 그런데 자신들의 의견을 듣지도 않고 자기 맘대로 행동하는 아틸라의 모습이 좋게 보일 리가 없다.
그런 분위기를 파악한 아틸라가 소리쳤다.
“나는 바츨라브 백작가의 핏줄이다. 여기는 나의 가문이다. 나는 가주 대행으로서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를 수 있다. 여기서 최고 높은 이가 누구인가? 나다! 가장 높은 이가 어찌 아랫사람의 허락을 받아야겠는가!”
“그것은 독재요, 이공자!”
“닥쳐라, 죄인이여. 여긴 나의 가문이다.”
아틸라는 차가운 눈빛으로 고스를 쏘아보았다.
궤변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당당하게 나서 반박할 수 없었다.
아틸라는 자신의 기운을 모조리 뿜어내고 있었다.
교황의 권위를 짓밟고 로마 황제를 내려다보던 그 오만함!
제왕만의 오만함이 회의장에 가득했다.
꿀꺽.
누군가 침을 삼켰다.
그들은 보았다. 철혈정치를 펼치던 바츨라브 백작의 모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