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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 아틸라 1권(12화)
4. 너구리 사냥(3)
회의장은 폭풍이 몰아친 듯했다.
아틸라는 조용해진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관을 열어라.”
쿠르르―!
육중한 소리가 울리며 관이 열렸다.
관이 열리자 시체 썩은 내가 회의장에 진동을 했다. 가신들이 인상을 찌푸리고 코를 막았다.
“너희들은 이것이 형님의 시신이라 생각되느냐?”
아틸라는 존대를 하지 않았다. 지금 제왕의 기세를 내보이고 있는 아틸라였다. 어떤 제왕이 수하들에게, 아니 반역도와 같은 죄인들에게 존대를 하겠는가.
아틸라가 반말을 함에도 그 누구도 깨닫지 못했다.
너무나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그건 대공자의 시신이 맞소.”
“아니다.”
아틸라가 짧게 대답했다. 고스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대공자의 시신이 아니라고 우길 속셈이시오? 그것으로 날 죽이려고? 푸하하! 웃기는군!”
고스의 눈동자에 독기가 번들거렸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그도 더 이상 잃을 게 없었다. 여차하면, 정말 일이 더 틀어진다면 네크로와 함께 검을 뽑을 생각이 있었다.
“던커스!”
아틸라가 소리쳤다. 그러자 지금껏 한 마디도 없이 침묵을 지키던 마법사 던커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스의 눈동자가 급격히 확대되었다.
던커스.
그는 백작가에서 가장 강한 마법사라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대외적인 활동을 하지 않아 그에 관해 잘 아는 사람 또한 없었다.
그런 던커스가 아틸라의 부름에 움직인다.
그 말은 곧…….
‘던커스를 포섭했다는 것인가?!’
고스는 믿을 수 없었다.
던커스는 마법사들의 대표다. 던커스를 포섭하면 결국 백작가에 상주하고 있는 열하나의 마법사 모두를 품 안에 들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고스가 황금을 쓰고 권력을 써도 안 되는 일이 있었다.
바로 던커스를 포함한 마법사들을 포섭하는 일이었다.
고스는 입술을 잘게 씹었다.
고스만 놀란 것이 아니었다.
룩스 또한 놀랐다.
‘도대체 언제?’
아틸라에게 붙어 있는 감시자는 한둘이 아니다. 물론 접근이 쉽지 않아 정보를 얻어 내기란 어렵더라도, 낌새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처음 알았다. 진실로 던커스가 아틸라에게 붙었단 말인가?
“던커스, 시신을 확인하라.”
“알겠습니다.”
던커스는 더없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회의장의 가신들이 연이어 놀랐다. 마법사란 족속들이 저리도 예의 바를 수 있었단 말인가.
던커스는 남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시신을 살폈다.
뼈밖에 없는 시신에서는 연신 독한 냄새가 올라왔지만 던커스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꿀꺽.
고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손에 식은땀이 흘렀다.
던커스만큼 여기서 마나와 친한 이가 누가 있으랴.
그가 살핀다면 마나폭주의 흔적이 없음을 확인할지도 모른다.
고스와 네크로는 서로 눈빛을 나누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시신을 살피던 던커스가 허리를 폈다.
“마나스캔 결과 마나폭주의 흔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헛소리!”
고스가 발악하듯 소리쳤다. 그러나 던커스는 흔들리지 않았다. 아틸라가 물었다.
“확실한가?”
“반년이 넘은 시신입니다. 하지만 마나폭주에 사망했다면 마나의 기운이 남아 있어야만 합니다. 마나를 익힌 흔적은 있으나, 마나는 모두 자연의 품으로 돌아간 상태입니다. 마나폭주의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마나폭주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대공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억지요!”
이번엔 네크로가 나섰다.
“억지? 내가 지금 거짓된 증언으로 억지를 부리고 있단 말인가? 내가?”
“그렇소. 반년이 넘었소. 마나는 원래 자연에 귀의하려는 성질을 갖고 있소. 마나폭주로 인해 죽었다지만, 마나가 지금까지 뼛조각에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소!”
“그럼 내가 형님의 유골로 형님의 죽음을 욕보이고 있단 말인가?”
아틸라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신들이 술렁였다. 대공자와 이공자의 우애가 깊은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이공자가 대공자의 시신을 욕보이면서까지 거짓을 할까?
고스와 네크로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그래, 더 확실한 걸 보여 주지. 네크로.”
아틸라는 깊게 침전된 눈빛으로 앞으로 걸어 나왔다.
“형님이 내 나이만 했을 때, 그러니까 십 년 전쯤 그대는 형님과 친선 결투를 했었다.”
“……그렇소.”
네크로는 과거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때 너의 실수로 형님의 어깨에 깊은 상처가 남았다는 것을 기억하나?”
“……!”
네크로의 얼굴에 경악이 번졌다. 그랬었다. 당시 대공자와 친선 결투를 벌이던 중 대공자의 뛰어난 실력에 놀라 네크로는 자신도 모르게 모든 힘을 다해서 공격한 적이 있었다.
대공자는 어깨에 깊은 검상을 입었다. 평생 지워지지 않는 끔찍한 검상이!
“이 유골의 어깨에 그런 검상의 흔적이 보이나?”
“하지만 뼈가 재생되었을 수도 있지 않소?!”
“오러로 인한 상처는 회복할 수 있으나 지워지지는 않는다는 사실. 설마 기사단장인 네가 모를까?”
쿵!
끝내 네크로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더 이상 어찌할 방도가 없다.
상황은 완벽하게 아틸라가 주도하고 있었다. 고스는 더 이상 변명할 구석이 보이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룩스는 이 사태에 어찌 대응할까 궁리 중인 듯했다.
“진짜, 행정 총관이 대공자님을 어찌한 건가?”
“그런 것 같은데…….”
“말도 안 돼, 어찌 그런 일이?”
회의장이 술렁였다.
고스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자신의 파벌에 속해 있는 가신 몇몇도 충격에 빠진 표정이었다.
고스는 아틸라를 바라보았다.
아틸라는 말하고 있었다.
‘이제 어찌하겠느냐?’
패배다.
아틸라는 어느새 증거를 모아 왔고, 자신도 모르게 세력을 키워 단숨에 자신의 숨통을 쥐고 있었다.
“그래서 어쩌겠다고 이공자!”
끝내 고스가 본색을 드러냈다. 고스의 눈동자가 탐욕과 공포, 그리고 살기로 번들거렸다. 고스의 외침과 동시에 아틸라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너의 패배다, 고스.”
“닥쳐라, 이노옴!”
“도미니언 기사단! 반역을 꾀한 행정 총관 고스를 포박하라!”
아틸라는 네크로를 바라보며 똑바로 외쳤다.
하지만 네크로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미 자신은 고스를 끝까지 변호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완전히 틀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네크로는 움직이지 않았다.
회의장이 시끄러워졌다.
반역, 반역이다!
“그렇군, 네크로. 도미니언 기사단도 고스와 같은 꿍꿍이구나.”
“이공자, 우리는 바츨라브의 핏줄 아래서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소.”
네크로는 침전된 목소리로 말했다. 아틸라가 비웃었다.
“기사는 주인을 섬기는 것이 가장 참된 도리가 아니었는가. 하하하! 웃기는 일이로구나!”
“시끄럽다, 이공자! 새끼 호랑이란 별명 때문에 네놈이 유세를 부리는데, 됐다. 우린 여기서 너를 베고 바츨라브 백작가를 새로 세우겠다!”
아틸라는 여전히 웃었다. 고스는 악에 받쳤다.
채채챙―!
고스의 뒤로 네크로가 섰고, 안으로 도미니언 기사단이 들이닥쳤다. 오십여 명의 기사들이 모두 고스의 편에 섰다.
아틸라는 슬쩍 룩스를 바라보았다.
룩스는 지금 돌아가는 사태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
누구의 편을 들어야만 한단 말인가?
대공자의 독살엔 자신도 일조했다. 고스에게 사막의 극독에 대한 정보를 넘긴 사람은 자신이 아닌가?
보아하니 아틸라는 그 사실마저 알고 있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밝히지 않았다. 그 말은…….
‘고스를 내치고 나는 우선 살리겠다는 것인가?’
룩스의 머리가 맹렬하게 회전했다.
지금 고스의 편을 들면 살 수 있을까?
일단 고스에겐 도미니언 기사단이 있다. 그에 반해 아틸라에게는 열한 명의 마법사가 있다. 어느 한쪽의 우세를 점칠 수 없었다.
“그래, 제대로 하지. 난 지금 반역도들을 제거할 생각이다. 고스와 함께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내 뒤로 서도록 하라.”
아틸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던커스와 열 명의 마법사가 모두 아틸라의 뒤에 섰다. 고스의 눈가가 살짝 실룩였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회의장에 일단의 무리들이 들어섰다.
“왔습니다, 이공자님.”
로그리스를 필두로 한 서른 명의 기사와 수련생이었다.
룩스의 머리가 더 빠르게 회전했다.
‘마법사와 기사의 조합은 최상! 이로써 비등한 것인가?’
룩스는 고심하고 또 고심했다.
그리고 룩스의 선택은…….
“루, 룩스!”
고스가 소리쳤다. 룩스 파벌이 이동한 곳은 고스 쪽이 아니라 아틸라였다. 고스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아무리 고스와 룩스가 서로 숙적이라 하지만, 지금은 같이 뜻을 모아야 했다.
지금이 아니면 바츨라브가의 핏줄을 지울 기회가 없었다.
‘저 멍청한 자식! 진정 위험한 놈은 이공자다. 저놈이야말로 바츨라브가의 진짜 핏줄이야!’
고스는 눈을 치켜뜨며 외쳤다.
“룩스! 네놈이 어딜 가느냐! 이 간악한 놈아! 이공자여, 모르는가? 대공자를 독살한 건 나뿐 아니라…….”
슈수수숭!
퍼어억!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 누구도 파악 못했다.
거센 파공음이 들리더니 고스의 머리가 수박처럼 터져 나갔다. 바로 옆에 있는 네크로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
거대한 크기의 배틀액스.
그것이 고스의 머리를 처참하게 부숴 놓았다.
‘어, 어느새……!’
네크로의 시선이 아틸라에게 향했다.
무섭다.
자신이었으면 막을 수 있었을까?
답은 아니다. 절대 막을 수 없었다. 너무 빨랐고, 그리고 파괴적이었다. 마나를 잔뜩 긁어모아 오러를 생성했다고 해도…….
못 막았을 것 같은 예상이 들었다.
그때, 아틸라가 말했다.
“너구리 사냥을 시작하지.”
그 말을 끝으로 아틸라는 배틀액스를 꺼내 들고 뛰어들었다.
“이공자! 네놈이 어디까지 날뛸 수 있나 보자!”
네크로는 검을 꺼내 맞섰다. 그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이공자를 죽일 수 있으리라. 로엔이 일격에 죽었다는 소문은 불안했지만, 자신이야 로엔보다 월등하니 이공자를 못 죽일 리 없었다.
네크로의 검이 빛살을 토해 냈다.
오러(Aura)!
마나가 극성에 달하면 세상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는 절대의 기운이 검에 서린다.
그것이 바로 오러였다.
네크로의 오러가 섬광처럼 쭉 늘어서면서 아틸라를 향해 쇄도해 갔다.
아틸라도 마찬가지 배틀액스를 휘둘러 왔다.
‘이대로 맞선다!’
배틀액스를 단숨에 부수고 심장을 가른다!
검과 도끼가 맞닿았다. 네크로는 그대로 베어 나가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한데…….
콰지직!
네크로의 두 눈이 크게 커졌다.
아틸라의 배틀액스에 덧씌워진 저건…….
“오러……?!”
강렬한 스파크가 뭉쳐져 있는 듯한 오러를 보라!
맞닿는 순간 검을 통해 아틸라의 가공할 뇌기가 침투해 들어왔다.
네크로는 그대로 심장이 멈췄다.
그리고…….
푸아악!
일격.
도미니언 기사단 네크로 단장 즉사.
“어디 제대로 싸워 보자고!”
아틸라는 피가 끓었다. 온몸에 아드레날린이 폭발적으로 분비되었다. 아틸라는 모든 힘을 끌어 올렸다. 자신의 몸 전체에 뇌기를 가득 움직였다. 그의 몸은 벼락처럼 빨랐으며 파괴적이고 강렬했다.
뇌기를 가득 담은 그의 배틀액스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네크로도 단 한 방에 나가떨어졌다. 막을 수 없다.
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처참하게 부수어 놓은 아틸라의 무력(武力)!
오로지 일격의 초식으로만 이루어진 아틸라의 무술이 깨어났다!
그날은 지옥이었다.
고스 파벌이 영영 사라지는 그날.
룩스는 아직도 그날을 떠올리면 몸서리를 쳤다.
피를 흘리며 처참하게 쓰러지는 도미니언 기사단.
기사의 명예를 버리고 살려 달라 울부짖던 그들.
그것을 가볍게 무시하며 한 번에 한 명씩 저세상으로 인도하던 사신!
아아.
백작가에 악마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