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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 아틸라 1권(14화)
5. 사냥꾼을 사냥하는 야수(2)
아틸라는 던커스가 준 지도를 가지고 천천히 길을 나섰다.
백작가를 나서서 이곳 세상을 접하는 건 처음이다.
아틸라는 본래 호기심이 많은 인물이다. 그가 흑마법을 배운 이유도 다 호기심에서 기인했다.
‘로마보다 문화가 발달한 것 같지는 않다.’
아틸라는 눈을 가늘게 떴다. 분명히 무력이나 전투적인 부분에서는 훈과 로마보다 발달했다. 하지만 백성들의 삶은 아닌 것 같았다. 영주성 인근만 해도 장사를 하거나 농사를 하는 이들에겐 제법 의욕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점점 영주성에서 멀어지자 백성들의 얼굴은 피폐하기 그지없었다.
아틸라는 이 세상의 계급 구조가 이해되지 않았다.
황제!
그리고 그 밑에 영주들이 각자의 성을 다스리는 봉건제.
웃기지도 않는 계급 구조다. 영주는 자기의 성에서만큼 왕과 다름없는 존재고 세력을 기를 수 있다. 그렇게 세력을 길러서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지 않은가?
‘나라의 권력은 모두 한곳에 집중되어야 하거늘.’
훈 제국의 모든 권력을 움켜쥔 아틸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또한 일반 평민과 농노의 계층 차이도 쉽사리 이해되지 않았다. 애초에 훈족은 유목민족이었기에 훈 제국에는 농민이 거의 없었다.
훈족은 약탈과 전쟁으로 자신들이 원하는 것들을 구해 가며 살아갔으니까.
아틸라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앞으로의 행보에 집중했다.
하늘 감옥.
하늘 위 최악의 범죄자들의 감옥.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최악의 범죄자 수용소. 유사시엔 좋은 아군이 되겠군.’
그들은 하나같이 피에 굶주린 살인마들이다.
그들을 죽이기엔 여의치 않다. 워낙 뛰어난 무력을 갖고 있는 존재들이기에 어찌할 수 없다. 하지만 죽인다면 못 죽일 이유도 없다. 그렇지만 제국에서 그렇지 않고 가둬 두는 이유가 있었다.
유사시 전쟁이 벌어질 경우, 저들을 자유를 보장하며 든든한 아군으로 삼을 수도 있을 터였다. 피에 굶주린 저들을 전장에 풀어놓으면 그만큼 위험한 존재들이 또 있을까.
제국은 극도로 위험한 범죄자를 이용할 정도로 큰 그릇을 가지고 있었다.
‘한 나라의 황제라면 암 그래야지.’
아틸라는 그런 황제의 그릇을 칭찬했다. 바츨라브 백작가만 해도 대단한 가문이다. 비록 지금은 처참하게 흔들리고 있지만, 제국은 바츨라브 백작가와 같은 대단한 가문을 품에 안고 있다.
그리안 제국.
현 대륙을 지배하는 사실상의 최강국.
아틸라는 호승심을 느꼈다.
로마는 최강국이었다. 오랜 역사와 함께 천하를 지배하는 최강국, 하지만 아틸라는 훈 제국을 세우고 세상의 지배자를 자처했다.
호승심이 들끓었다.
이 세상의 최강국이라.
‘아니지, 일단 내가 할 일에 집중하자.’
아틸라는 흥분되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머리를 차갑게 굳혔다. 그의 발걸음은 하늘 감옥을 향했다.
크리스티안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달빛 아래 그림자가 일렁였다. 이윽고 허공에서 검은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잘 있었나, 크리스티안.”
“……네놈이 웬일이냐.”
“아아, 동료끼리 왜 이리 차갑게 굴어. 동료를 만나러 오는 데 이유가 필요하나?”
그림자는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크리스티안은 웃을 수 없었다. 눈앞의 그림자가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티안은 정색하며 그림자를 노려보았다.
“백작가를 집어삼키는 일은 어찌하고 날 찾아왔지?”
“이봐, 크리스티안! 그것 나만의 일이 아니라고, 우리들의 임무지. 왜 나한테만 맡기고 그래?”
“동료의 의견을 무시하고 독불장군처럼 구는 녀석을 위한 일이지.”
그림자는 빙긋 웃었다.
“정말 섭섭하네. 좋아, 사실 너한테 부탁할 게 있어서 왔어.”
“부탁?”
크리스티안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자신이 아는 그림자는 누구에게 부탁을 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스스로 힘이 워낙 강력하여 뭐든지 해낼 수 있는 이니까.
“소식은 들었을 거야. 이공자, 그 새끼 호랑이가 미쳐 버린 거.”
“들었다. 고스와 도미니언 기사단을 숙청시켰다지?”
“응. 나도 깜짝 놀랐다니까. 새끼 호랑인 줄만 알았는데 어느새 흉포한 야수가 되어 있어서.”
“그래서 무슨 부탁이지?”
“이공자가 지금 자리를 비웠다.”
“……?”
“던커스 그 냄새나는 흑마법사 놈이 대역하고 있다지만 내 눈을 속일 수는 없지.”
“그래서 이공자를 죽이라는 건가?”
“응. 반불구로 만들어 줘. 하지만 힘들 것 같으면 죽여도 상관없어.”
크리스티안은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가 거느리고 있는 어쌔신들의 능력이면 이공자는 충분히 제거할 수 있었다. 대공자, 아니 바츨라브 백작이 정정한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한들 충분히 제거할 수 있다.
그런데 불구로 만들거나 여의치 않으면 죽이라?
자신이 거느린 어쌔신들을 무시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만큼 이공자를 높이 평가하는 것인가?
“너라면 간단히 일을 끝낼 수 있을 텐데.”
“난 못 해.”
“어째서?”
“위에서 나를 좀 찾더군. 본 서클에 다녀와야 해.”
크리스티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자의 능력이라면 상부의 명쯤 눈치껏 무시할 수 있다. 하지만 그림자가 속해 있는 집단은 달랐다.
블러드 서클(Blood Circle)!
피에 미친 악귀들이 도사리는 곳!
그곳이 떠오르자 크리스티안은 몸서리쳤다. 자신이 속한 그룹도 만만치 않은 곳이지만 블러드 서클은 정말 말 그대로 미친놈들만 존재하는 곳이었으니까.
“내가 아니더라도 그놈이 있잖나?”
“그 먹물 냄새나는 놈은 그냥 싫어.”
“…….”
“그러니 부탁 좀 할게.”
“이공자가 경계할 만큼 위험한가? 대공자 정도인가?”
“그래. 어쩌면 대공자 이상일지도 몰라.”
“그런……!”
대공자는 까다로운 상대였다. 거침이 없었고, 자신들의 존재를 알아채고 파헤치기까지 했던 이다. 결국 백작가를 차지하기 위해 그를 죽이게끔 유도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림자의 평가는 냉정하고 정확하다.
그가 말한다면 그런 것이리라.
“좋아, 그가 어디로 가고 있지?”
“하늘 감옥.”
“……무슨 속셈인 거지, 이공자.”
“모르겠어. 괜히 긁어 부스럼 생기기 전에 어떻게 해야 할 거야. 룩스 놈이 워낙 간이 작아야지. 룩스 놈을 믿고 있기엔 불안해. 이공자를 제거해야 돼.”
“알겠다.”
“그럼 부탁할게.”
그림자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달빛 아래 암흑이 일렁였다.
갔다. 그림자는 이곳을 떠났다.
“후, 준비해야겠군.”
크리스티안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있는 곳은 바츨라브 백작가의 클리닉 센터였다.
“아, 그걸 말 안 해 줬네.”
허공을 가르던 그림자가 멈칫했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주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루인이 아닐지도 모른단 사실, 말 안 해 줘도 되겠지? 그가 기르는 어쌔신들의 능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니까.”
그림자는 웃으면서 다시 어둠에 동화됐다.
* * *
대상: 루인 이공자.
불구로 만들 것, 하지만 여의치 않으면 반드시 필살(必殺).
주의점: 수석기사 로엔을 일격에 죽임. 도미니언 기사단장 네크로를 죽인 이가 던커스가 아닌 이공자라는 소문이 있으나 진위 여부는 확인 불가.
어쌔신 삼호는 내려온 명령서를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수석기사 로엔은 젊은 나이에 출중한 재능과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 이를 일격에 죽였다.
그렇다면 능력이 파악 불가였다.
일격으로 죽일 만큼 압도적인 능력의 차이가 있단 말인가?
무엇보다 기사단장 네크로를 죽였다는 소문.
진위 여부를 떠나서 그런 소문이 돌 정도라면 범상치 않은 실력을 갖고 있을 터.
삼호는 자신을 따라온 오호, 칠호, 팔호, 구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말도 하지 않고 삼호의 뜻을 알아들었다.
방심하지 말 것!
그들은 일급 어쌔신이다. 마음만 먹으면 기사단장 네크로도 가뿐하게 제거할 수 있다.
그들은 실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어떤 목표물이든지 절대 방심하지 않고 임무에 최선을 다했다. 그것이 일급 어쌔신이라는 등급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삼호는 자신의 능력을 믿었다.
비록 특급인 일호와 이호에 비해 손색이 있으니 그 혼자서도 네크로를 암살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으니까.
삼호는 몸을 움직였다.
‘일단 이공자의 경로를 확실하게 파악한다. 하늘 감옥으로 간다고 하나 확실하게 해야지.’
오호, 칠호, 팔호, 구호가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의 능력은 바람을 탈 수 있다는 것이다.
바람에 몸을 맡겨 움직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지나가도 알아차리는 사람이 없었다. 갑자기 바람이 불었다고 생각할 만큼 그들의 능력은 은밀하고 대단했다.
바람을 타고 움직이자 속력이 빨랐다.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공자의 흔적을 찾았다.
‘직선 경로다. 하늘 감옥으로 가기 위한 가장 빠른 길이다. 발자국의 깊이가 깊다. 빨리 걷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곧 따라잡을 수 있겠군.’
삼호는 눈짓을 줬다. 그들은 서로가 끈끈한 심령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동료의 눈을 통해 보고, 동료의 귀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왜 크리스티안의 어쌔신들이 대단하다고 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똑같은 장소와 수련법으로 평생을 살아왔다.
그들만큼 손발이 잘 맞는 어쌔신들이 또 있을까.
‘앞서 나가서 이공자를 기다린다.’
삼호는 곧바로 몸을 움직였다.
바람처럼 내달리기 얼마나 지났을까.
삼호의 움직임이 멈추어졌다.
‘흔적이……?’
하늘 감옥으로 향하던 아틸라의 흔적의 경로가 바뀌어 있었다.
수목이 울창한 숲 속으로 흔적이 이어져 있었다.
삼호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추적을 눈치챘다.’
추적을 눈치채지 않고서야 경로를 바꿀 리는 없다.
삼호의 표정이 더없이 진지해졌다. 그렇지만 바뀌는 건 없다.
다만 추적을 눈치챘으니 상대의 반항이 심해질 것이라는 사실뿐이다.
오히려 그것이 목숨을 잃게 만들지도 모른다.
불구로 만드는 일이 불가능하다면 그들은 반드시 아틸라를 죽여야 했으므로.
삼호는 곧바로 흔적을 쫓아 숲으로 들어갔다.
얼마 되지 않아 다시 흔적이 발견되었다. 흔적으로 보건대 고작 십 분이 지났다.
‘더 깊숙이 들어가는군.’
어쌔신들의 움직임 더욱 기민해졌다.
흔적을 쫓던 삼호의 눈빛이 별안간 흔들렸다.
계속해서 오 분, 십 분 간격으로 흔적이 발견되었다.
문제는 흔적이 한 장소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한자리를 살피듯이 뺑뺑 돌고 있었다. 그걸 알아챈 삼호의 눈빛이 거세게 흔들렸다. 다른 어쌔신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릴 감시하고 있다!’
자신들이 쫓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상대는 자신들을 파악하고 감시하고 있었다.
일부러 흔적을 남기면서 자신들을 유인했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삼호는 소름이 돋았다.
임무를 맡은 이래 처음 일어난 일이다.
‘어떻게?’
이공자가 설마 자신들을 미리 예측했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다. 애초에 추적을 눈치챈 일부터 이상했다.
자신들은 바람을 탄다.
바람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면 그 어떤 흔적도 남지 않는다.
추적을 눈치챌 수가 없다.
한데 추적을 눈치채고 오히려 유인하면서 지켜보기까지 한다.
‘모두 다른 방향으로 흩어진다.’
삼호는 심령으로 명령을 내렸다. 한곳에 뭉쳐 있으며 감시받을 바에야 흩어져서 목숨을 노리는 것이 좋다 판단한 것이었다.
삼호를 비롯한 오호, 칠호, 팔호, 구호가 순간 사방으로 흩어졌다.
‘반드시 죽겠군.’
그들은 각자가 움직여도 충분히 위협적이다. 암살은 실패할 리가 없으리라. 단지 원래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반드시 죽여야만 할지도 몰랐다.
기감이 보통이 아니다.
추적을 눈치채고 유인까지 하는 모습을 보니 배짱도 두둑하다.
‘그렇지만 변한 건 없다.’
삼호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