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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 아틸라 1권(23화)
9. 너에게 맡기겠다(3)


아틸라는 계단을 내려갔다.
작은 횃불이 밝히는 지하는 어두컴컴하기 짝이 없었다.
백작가에 위치한 지하 감옥은 그간 반역도에 준하는 범죄자들을 가둬 놓은 곳이다. 제대로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아 이곳에서 죄인들이 죽는 경우가 허다했다.
“끄으으으.”
“살려 줘. 제발 살려 줘! 날 여기서 내보내 줘!”
살려 달라는 외침을 뒤로하고 아틸라는 계속 걸었다.
지하 감옥의 가장 끝.
그곳에 도달한 아틸라의 입에서 무심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날 원망하는가? 던커스.”
“…….”
“원망하거라. 마음껏 원망하거라. 나 역시 그럴 수밖에 없던 내가 너무나 저주스럽다.”
아틸라는 솔직하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놨다.
감옥 안에 수감했던 던커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에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지독한 슬픔은 무심(無心)에 도달한다. 현재 던커스가 그런 상태였다.
“난 수하들을 버렸다.”
“어찌…… 왜 그리하셨습니까.”
“그것이 너와 내가 사는 길이다.”
“제자들이 죽으면 저 또한 산 것이 아니고, 수하들이 죽으면 주군 또한 산 것이 아닙니다.”
“아니, 사는 것이다.”
“주군……!”
“나는…… 복수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
“백작가? 상관없어. 그깟 백작가가 무너진다고 한들 난 상관없다.”
던커스의 눈동자에 놀람이 서렸다.
백작가의 이공자가 할 말이 아니었다.
어찌 백작가가 무너져도 상관없다 말하는가?
“내가 너희를 거둔 것은 백작가를 위함이 아니다. 내가 사는 것은 백작가를 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단지…… 복수를 위해 살 뿐이다. 난 당하고는 못 사는 성격이다.”
“…….”
“날 원망해도 좋다. 아니, 원망해야 한다. 하지만…… 나만을 원망치 말라. 이 모든 일을 계획한 건 그들이고, 일을 이렇게 만든 것도 그들이다.”
“…….”
“그들을 찾아내 죽여라. 너의 복수를 하란 말이다. 네 제자들을 궁지에 몰아넣은 그들을 죽이고, 그다음에 나를 죽여라. 그리해서 너의 복수를 완성해라.”
던커스는 말이 없었다. 아틸라는 무심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실 아틸라의 가슴도 터질 것처럼 부글부글 끓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제대로 한 방 먹었군.’
너무나 안일했다.
고스 파벌을 처단하면서부터 일은 일사천리였다.
그들의 실체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었다. 또한 어떤 위협이 닥치든 어쌔신들을 해치운 것처럼 수월하리라 생각했다.
너무 안일했던 것이다.
아틸라는 이번 일을 계기로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됐다.
세상에서 지존을 자처하는 자라면 실낱같은 방심도 용서될 수 없다.
이건 자존심이었다.
아틸라의 자존심!
‘그렇다고 해서 변치 않을 것이다. 이 복수극에서 웃는 자는 내가 될 터이니.’
생각을 마친 아틸라는 던커스를 다시 쳐다보았다.
“이번 일은…… 너에게 맡기겠다.”

그리고 그날.
던커스는 탈옥했다.



10. 뒷골목의 스콜피온(1)


폭풍이 지나간 자리는 고요했다.
딸그락.
“이번엔 홍차를 한번 갖고 왔습니다.”
루나가 조심스런 기색으로 탁자 위에 차를 내려다 놓았다. 그리곤 흘깃 아틸라를 바라보았다. 아틸라는 무심한 표정으로 서류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 차가운 분위기에 루나는 더 이상 말을 않고 조용히 방을 나갔다.
서걱서걱.
루나가 나간 방에는 펜 놀리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한 방 먹었군.”
아틸라가 펜을 놀리며 조용히 읊조렸다.
제대로 한 방 먹었다.
그것도 치명적인 한 방이었다.
던커스를 필두로 한 마법사들은 아틸라에겐 더없이 소중한 전력이다.
한데, 이번 사건으로 단박에 무너졌다.
이건 아틸라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었다.
“흑마법사는 세상에서 절대적으로 없어야 하는 존재군.”
로마에서도 흑마법사는 경멸의 대상이다.
하나 단지 경멸과 천대의 대상일 뿐이지, 이곳에서처럼 세상에서 없어야 하는 절대적인 악(惡)은 아니었다.
아틸라는 그 점을 놓쳤다.
하기야 그럴 수밖에 없을 법도 했다.
로마와 훈에서의 흑마법은 아틸라와 같이 주술적인 성격이 강했다. 직접적으로 무언가를 파괴한다거나 부수는 힘은 없었다.
하나 이곳의 흑마법은 달랐다.
강력하고 파괴적이었다. 철벽을 일거에 부수고 사람의 목숨을 단숨에 앗아 가는 치명적인 공격력을 지니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흑마법사들은 위험한 존재다.
이들이 반란을 획책하고 마왕의 하수인을 자처한다면 어쩌겠는가.
어찌하여 대륙에서 흑마법사라면 치를 떠는지 알만 했다.
“용서치 않겠다.”
뚜욱.
아틸라의 손에 힘이 들어가자 펜이 부러졌다.
부릅떠진 아틸라의 두 눈은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분노!
아틸라의 입가가 실룩였다. 진한 분노가 가슴에서 터질 것처럼 몸부림쳤다.
아틸라는 냉정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파괴적이고 야만적이고 잔혹하기 짝이 없다. 모든 일을 냉정하고 침착하게 하면서도 원한다면 무섭도록 잔인해지는 인물이었다.
“지금은 침착해야 할 때.”
아틸라는 숨을 가다듬었다.
던커스에게 이번 일을 맡겼다.
분노와 복수심으로 점철된 던커스라면 이번 일의 배후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일은 단지 룩스가 행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누가 룩스 뒤에서 조종하지도 않았다.
신성마법사 홀렌.
그는 지금 이번 공로를 인정받아 황실로 들어갔다.
데이비드 자작가에 있을 때도 그는 룩스가 쉽게 움직일 수 없는 거물이다. 그런 거물을 단번에 움직이게 한 배후가 분명 존재한다.
또한 던커스를 비롯한 마법사들이 흑마법사임을 아는 사람은 아틸라와 로그리스뿐이었다. 백작가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모른단 얘기였다.
“최소한 백작가 내에 있는 인물이다.”
아틸라의 두 눈이 흉흉하게 빛났다.
“누구냐. 고스도, 룩스도 아닌 누가 이 일들을 벌였는가.”
부족했다.
정보가 부족하니까 결과가 도출이 되지 않는다.
루나와 던커스를 통해 얻는 정보는 한계가 있다.
아틸라의 머릿속에 정보의 필요성이 강력하게 대두되고 있었다. 동시에 또 다른 계획이 세워졌다.

* * *

“크악!”
“낄낄낄낄낄! 정말 형편없구나. 너희들이 정녕 바츨라브 백작가의 기사들이란 말이냐?”
또 한 명의 기사가 피투성이 된 채로 나가떨어졌다.
칠 척 거구의 바스티안이 괴소를 터뜨렸다.
그의 주위로 피투성이가 된 기사 이십여 명이 쓰러져 있었다. 벌레처럼 꿈틀거리긴 했지만 대부분이 의식을 잃었다.
“크윽…….”
로그리스는 분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몸엔 수많은 상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미 몸도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그만큼은 악착같이 버텨 내고 있었다.
“십 년 전만 해도 바츨라브의 기사들이라면 최강을 다투었건만…… 낄낄낄, 세월이 무상하구나.”
바스티안은 그들을 조롱했다.
로그리스를 필두로 한 기사와 수련생의 자존심이 처절하게 짓밟혔다.
할 말이 없다.
벌써 일주일째다.
일주일 전, 아틸라와 같이 나타난 바스티안은 자신들의 교관을 자처했다.
그리고 동시에 기사들에겐 지옥이 시작됐다.
바스티안은 봐주지 않았다. 무작정 검을 휘둘렀고 눈만 마주쳐도 공격해 들어왔다.
몸에 상처를 내는 것에 두려움이 없었다. 단지 죽지 않게끔만 조절할 뿐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전부 일주일 전에 진작 죽었으리라.
문제는 상처를 입어도 다음 날이면 말짱해진다는 사실이다. 아틸라는 최고급에 달하는 포션을 매일같이 이들에게 사용할 것을 지시했다.
빈사 상태에 빠지더라도 다음 날이 되면 대부분 멀쩡한 상태에서 다시 바스티안에게 당하고 만다.
이것이 일주일 반복되자 로그리스의 가슴엔 독기가 가득 찼다.
억울했다.
자신들이 약한 것이 죄란 말인가.
“그래, 너희들이 약한 것은 죄다. 이 멍청이들아.”
로그리스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바스티안이 똑바로 쳐다보며 웃었다. 싸우기를 좋아하고 강해지는 것을 즐거워하는 바스티안에게 있어서 약함은 죄였다.
“너희들은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근데 너희들은 상대적으로 약자다. 너희들이 상대해야 할 놈들은 강자야. 그럼 잡아먹힐 수밖에 없는 논리가 아니겠느냐.”
“우리가 약하고 싶어서 약한 것은 아니오!”
“웃기지 마라. 그럼 아틸라 그놈이나 나는 태어날 때부터 강했느냐? 낄낄낄낄.”
“우리도 노력하고 있소. 매일같이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고 있소. 하지만…….”
“우스운 변명 마라.”
슈웅!
바스티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검이 쇄도해 들어왔다.
“끄악!”
로그리스는 미처 반응할 틈도 없었다. 바스티안의 검 끝이 로그리스의 어깨를 단번에 뚫고 뼈까지 박살을 내 버렸다.
로그리스는 비틀거렸다.
“보라.”
“……뭘 보라는 것이오. 또 내가 죽을 뻔했다는 것을?”
“난 심장을 찔렀다.”
“……!”
“이런 미친 싸움을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몸이 반응한다. 그것이 굳어지면서 결국 자신의 능력과 실력이 된다. 너희들은 충분히 강해질 수 있다.”
로그리스의 두 눈이 커졌다.
그랬다. 분명 바스티안의 검 끝은 왼쪽 가슴을 향해 찔러 왔다. 너무나 빨랐고 강맹한 위력이 담겨 있어서 막을 수도, 제대로 피할 수도 없었다. 단지 몸이 살고자 반응했을 뿐이다.
예전 같았으면 그런 반응조차 못 했을 것이다.
“물론 아직 약하기 짝이 없지만, 낄낄낄!”
푸아악!
바스티안이 고무줄처럼 쭉 늘어남과 동시에 로그리스의 가슴팍이 쩍 벌어졌다.
너무나 빨라서 시각적으로 그렇게 보였다. 로그리스는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남은 아홉의 기사도 촌각에 모두 가슴이 벌어지면서 쓰러졌다.
“쯧쯧쯧, 아직 한참 부족해.”
“그렇군.”
아틸라가 무심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바스티안의 옆에 서자 상대적으로 왜소해 보였다. 하나 풍기는 분위기만큼은 바스티안을 압도했다. 바스티안은 웃음을 멈추고 아틸라를 바라보았다.
“이들은 한없이 약해. 차라리 룩스 놈이 데리고 있는 녀석들을 친위대로 삼는 것이 어떠냐.”
“이미 한 번 주인을 문 개는 어쩔 수 없다. 이들은 적어도 주인을 물지는 않았으니까.”
바스티안이 말하는 녀석들은 넬리오 기사단이다. 제1기사단 도미니언 기사단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하다고 평가받는 제2기사단이다. 도미니언 기사단이 고스 파벌에 붙어서 피의 숙청을 당했지만, 넬리오 기사단은 룩스와 함께함으로써 현재 백작가의 당당한 제1기사단이 되었다.
적어도 로그리스를 필두로 한 기사와 수련생보단 그들이 훨씬 나았다.
바스티안은 그것을 지적한 것이다.
“하나 이 녀석들은 정말 약해. 네가 말한 그놈들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강해.”
“나하고 비교하면?”
“…….”
바스티안이 호기심에 찬 눈빛으로 아틸라를 바라보았다. 아틸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그도 제대로 알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너보단 강한 놈들이 여럿 있을 것이야.’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바스티안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눈에 훤했기 때문이다.
“일단 이 녀석들을 최대한 키워라. 적어도 자신만큼은 지킬 수 있게.”
“낄낄낄, 그렇다면 시간이 오래 걸릴지도 몰라.”
“상관없다. 설령 누가 죽더라도 상관없어. 살아남는 놈이 강할 테니까.”
“좋아, 좋아. 낄낄.”
바스티안이 맘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써 내일부턴 사망자가 발생할지도 모를 만큼 격한 수련이 시작되리라.
“그리고 나랑 갈 곳이 있다.”
“무슨 일이지?”
“약간만 무력시위를 하면 돼. 별것 아니야.”
아틸라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