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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혼을 팔았다 1권(2화)
1. 계약(2)
맞고, 괴롭힘당하고, 홀로 밥 먹고, 집에 돌아와 게임만 하는 모습. 한심한 모습들이 줄줄이 지나갔다.
“그렇기에 네 모친 또한 고통 받았다.”
이번엔 영상의 주인공이 바뀐다. 상실의 엄마였다.
새벽부터 일을 나가 고되게 노동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오늘도 닫힌 아들의 방을 바라보며 눈물 섞인 한숨을 짓는다.
“엄마!”
소년이 외쳤지만 영상 속의 엄마는 반응이 없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저녁을 준비할 뿐이다. 장면이 바뀌어 작은 방을 비춘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좁다란 방엔 의자가 쓰러져 있고, 한쪽 벽면에 목매단 소년이 보였다. 상실은 헛바람을 들이켰다.
남자가 손을 털어 영상을 지워 버렸다.
“네게 힘이 있다면, 핍박을 받지 않아도 된다. 네게 힘이 있다면 네 모친도 고통 받지 않아도 되지.”
원한다면 당장이라도 줄 수 있다는 태도에 상실은 여전히 거부감을 느꼈다. 분명 매력적인 제안이지만 떠넘기려는 태도가 미심쩍었다.
“힘이 있으면, 뭘 할 수 있는데요?”
“뭐든지.”
상실은 다시 한 번 남자가 웃었다고 생각했다.
그림자와 같은 그는 손을 들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시뻘건 불덩이가 생겨나 격렬히 타올랐다. 사방으로 탐욕스럽게 혀를 뻗는 불길에서 전해진 열기에 얼굴이 따갑다.
상실이 한 발 물러서자, 남자는 불꽃을 없애 버리더니, 한 걸음 다가섰다.
“이런 것도.”
순식간에 남자의 외형이 바뀐다.
그림자처럼 보이던 그의 외형이 불쑥불쑥 자라났다. 터질 듯 울룩불룩한 근육의 거한으로 변모하더니, 그에 그치지 않고 더욱 덩치를 불렸다.
사 미터는 될 법한 괴물로 변이한 그의 등에서 한 쌍의 거대한 박쥐 날개가 펼쳐지고, 이마에 나선형으로 꼬인 뿔이 치솟는다. 두 눈에서 붉은 영기가 피어올랐다. 쩍 벌어져, 송곳니가 가득한 입으로 불길이 뿜어져 나왔고, 팔꿈치와 어깨에 흉악한 뿔이 솟구쳤다.
상실은 털썩 주저앉아 벌벌 떨었다.
“이런 것도 가능하지.”
악마의 형상이 되었던 남자가 다시 작아졌다. 급속도로 작아진 그는 티브이에서 많이 보던 영화배우와 똑같은 모습으로 변모해 싱글싱글 웃었다.
그가 내민 손을 잡고 일어난 소년은 이 괴상망측한 일에 정신이 없었다. 꿈이라기엔 현실감이 넘치고, 현실이라기엔 말도 안 된다.
하지만 욕심이 일었다. 정말 저런 것이 내 힘이 된다면? 마법이라 불러 마땅한 힘을 부리고, 자유자재로 모습을 변화시킬 수 있다면?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한데 그것을 준다는 자가 나타났다. 스스로를 악마라 칭한 것이 걸리긴 하지만, 이미 자신은 거의 죽은 몸이었다.
실감이 나진 않지만 분명 목을 매달아 발버둥 치며 죽어 가던 기억은 진짜였다.
“시간이 없어. 결정해라.”
어느새 본래의 그림자와 같은 형상으로 되돌아간 남자가 재촉했다.
“네가 죽어 버리면 다음 계약자를 찾기가 힘들어지니, 죽으려면 얼른 죽고, 살려면 빨리 결정해.”
“하, 하나 여쭤 볼게요.”
남자는 대답 대신 손짓했다.
“영혼을 바치면 된다고요?”
“그래.”
“그럼 나중에 죽으면 어떻게 되나요?”
“네 영혼은 아무 데도 못 가고 내 소유가 되지.”
“그럼 살아 있는 동안은요?”
“그동안은 오로지 네 소유다.”
상실은 웃었다.
자신은 영혼이니 어쩌니, 어려운 말은 모른다. 하지만 하나 아는 게 있었는데, 세상엔 살아서 무슨 짓을 하더라도 죽어선 알 바 아닌 것처럼 사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 중 상당수는 매우 잘 살고 있었다.
남들도 그렇게 사는데, 자신이라고 못 살 건 없었다. 어차피 그들도 죽으면 지옥으로 갈 거다. 그렇다면 저 불가해한 힘을 받고 다시 살아나는 것은 매우 좋은 선택이었다.
솔직히 죽은 다음에 일어날 일 따윈 알 바 아니다. 자신과 엄마만 잘살 수 있다면, 그깟 영혼 따위 줘 버릴 수 있다.
“하겠어요.”
“진심이겠지?”
“예.”
그러자 남자가 손을 뻗었다. 길게 늘어난 그의 손이 단번에 소년의 가슴을 파고든다. 갑작스런 사태에 상실이 어어 하고 있는 사이, 남자가 손을 뽑아냈다.
그의 손아귀엔 하얗게 번쩍이는 어떤 것이 쥐어져 있었다.
남자의 입이 있을 것이라 여겨지는 부위가 쩍 벌어지며 상실에게서 빼앗은 것을 꿀꺽 삼킨다.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는 흡족하게 웃었다.
“너는 후회할 것이다.”
남자의 말이 철퇴처럼 상실을 후려쳤다.
그에게 꿰뚫린 가슴속에서 허전함이 느껴졌다. 깨어진 독처럼 뭔가가 계속 빠져나가는 듯한 감각이 일었다. 전신에 힘이 빠져 나른해진 그는 바닥에 쓰러졌다.
감겨 오는 시야 사이로, 남자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상실이 눈을 떴다.
“으으으.”
벽에 박아 넣었던 콘크리트 못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뽑혔는지, 제대로 박히지 않았던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때문에 소년은 아직 살아 있었다.
“아, 아아. 아아아!”
하지만 살아 있음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인지 소년은 비명을 질렀다. 바닥에 널브러져 몸을 뒤틀었다.
아프다. 가슴 깊은 곳의 무언가가 계속 빠져나간다. 매우 중요한 것이 막을 수도 없이 흘러 나가는 감각.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고통에 몸부림치는 상실로서도 하나는 알 수 있었다. 절대 빠져나가지 말아야 할 것이 새어 나가고 있었다.
“으아아아.”
어두운 방에서 홀로 울부짖는 소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너무나 아프다. 심장이 녹아내리는 것 같은 통증이 계속해서 인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어떤 시커먼 것이 채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년은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울며 발버둥 치는 수밖에.
비어 버린 공간을 침탈한 검은 무언가는 금세 텅 빈 곳을 메웠다. 그러자 눈물이 멎었다. 고통이 옅어졌다. 대신 극심한 허기와 충동적인 본능이 대신 자리한다.
“흐으, 흐으.”
거친 숨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살색의 피부가 검정으로 물들어 갔다. 생물이 아닌, 그림자에게나 있을 법한 어둠으로 전신이 물든다. 순식간에 시커멓게 변한 소년의 모습은 인간이라기보다 그림자에 가깝다.
“그흑, 그흐윽.”
괴이한 숨을 토해 내던 소년이 일어섰다.
몸에 걸친 옷자락을 투과해 맨몸이 된 그는 인간의 형상이었으나, 인간이 아니었다. 방에 가득한 어둠 속에서도 유독 검은 외곽선이 두드러졌다. 상실의 얼굴은 검게 덧칠된 듯 형상을 알아볼 수 없다.
“하아.”
배가 고프다. 상실은 극도의 허기와 어떤 충동에 휘말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하지만 좁고 어두운 방엔 먹을 것이 없었다. 하여, 그는 밖으로 나갔다. 검은 육신이 어둠에 녹아들었다.
문의 좁은 틈을 통과해 본래의 형상으로 돌아온 그가 집 안을 훑었지만 아무도 없었다. 엄마는 아직 안 돌아왔다.
다행이다. 동시에 다른 생각이 든다. 아깝다.
입맛을 다시며 그는 냉장고의 문을 열었다. 잡다한 반찬들이 있었지만 생각이 없는지 도로 닫는다.
저런 게 아니다. 더 따뜻한 것, 더 생명력 넘치는 것, 더 시커멓고 부패한 것이 필요하다.
“하아.”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풍겨 온다. 밖이다. 상실은 현관으로 나섰다. 문을 열 필요는 없었다. 어둠과 그림자가 그의 길이었으니.
집을 나서자 햇볕이 내리쬔다. 피부가 따갑다. 불쾌감이 생겨났다. 빛과 마주보긴 싫었지만, 허기가 더 강렬하다.
소년은 그림자를 통해 움직였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상관없다. 그림자가 있기만 하면 그는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었다. 다행히 대낮에도 그림자는 많았다. 도중에 끊기는 일도 있었지만 그 또한 큰일이 아니다.
소년의 몸이 그림자와 그림자의 사이를 뛰어넘는다. 징검다리 건너듯, 시야에 그림자가 보이는 순간, 상실은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림자를 거쳐 움직이는 그가 입맛을 다셨다. 냄새가 가까웠다.
윤석은 낮부터 술과 담배에 찌들어 있었다. 너저분한 집 안은 어둡다. 커튼을 쳐 빛을 막은 그는 맥주를 마시며 옆에 놓인 현금을 보다 히죽 웃었다.
어제는 제법 수입이 괜찮았다. 웬 얼간이가 만취해서 비틀거리는 걸 몰래 따라갔더니, 이게 웬 걸. 지가 알아서 으슥한 길로 가는 게 아닌가. 이런 횡재를 놓칠 수 없기에 남의 담벼락에 오줌을 싸고 있는 걸, 가방에 담아간 벽돌로 찍었다.
그 멍청이는 자기가 싼 오줌에 거꾸러졌고, 석은 품을 뒤져 지갑에서 현금과 카드를 꺼냈다.
최소한 이틀은 지나야 정신을 차릴 테니, 다음날 멀리 가서 사용할 심산이었다. 운이 좋았는지, 오만 원짜리 지폐 여섯 장과 만 원짜리도 있었다. 이걸로 당분간은 놀아도 되겠다 싶었다.
한두 번 한 일도 아니었기에 죄책감 따윈 들지 않았다. 그렇게 취해 가지고선 일행도 없이 위험하게 돌아다니는 놈이 나쁜 거다. 그래서야 바닥에 떨어진 지갑과 다를 바가 없잖은가. 자신은 그냥 길바닥에 떨어진 돈을 주웠을 뿐이었다.
“아, 오줌 마려.”
비척대며 일어난 그는 꼬이는 걸음으로 화장실로 향했다. 불을 켜고 졸졸졸 소변을 눈 그는, 화장실을 나와 불을 끄는 순간 기이한 감각을 느꼈다.
뭔가가 자신을 바라보는 느낌.
혼자 살면서 간혹 느끼곤 하는 흔한 착각이었지만, 이번엔 다르다. 정말 누군가가 뚫어져라 뒤통수를 바라보는 섬뜩한 느낌에 홱 돌아섰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커튼으로 창문을 가려, 채광이 희미한 거실만이 눈에 들어올 뿐이다.
“몸이 허한가?”
으쓱이며 방으로 돌아가려던 그의 시야에 시커먼 것이 휙 지나가는 게 걸렸다. 화들짝 놀라 돌아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거실은 누군가 지나간 흔적 하나 없이 고요했다.
어째 소름이 돋았다.
그는 손을 더듬어 화장실의 불을 켰다. 주홍색 빛이 문 앞을 감싸자 그제야 좀 안심이 된다. 그래도 혹시나 몰라서 거실에 둔 재떨이를 손에 쥐었다. 만약 도둑이라도 들었다면 그걸로 후려칠 속셈이었다.
긴장하고 있는데, 뭔가 몸을 스쳐 가는 느낌이다. 누군가의 숨소리가 바로 귀 옆에서 느껴졌다.
술이 확 깬다. 즉각 재떨이를 휘두르며 주변을 살폈지만 역시나 아무도 없었다.
“하아.”
재차 귀에서 숨소리가 들렸다. 착각이 아니다. 석은 발작적으로 재떨이를 마구 휘둘렀다. 하지만 걸리는 건 없었다.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불안한 시선으로 사방을 훑으며 그는 거실의 불을 켰다. 그러자 사방이 환해졌다. 밝아진 거실엔 아무도 없었다.
안도하고 있는데, 갑자기 불이 꺼졌다.
“저, 정전인가?”
스위치를 누르자 다시 빛이 들어온다. 누가 누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애써 고개 저었다. 제대로 누르지 않았었겠지. 간혹 있는 일이니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달칵.
스위치 누르는 소리와 함께 전등이 꺼졌다. 등골이 오싹하다.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이 치솟았다. 유령이나 귀신보다 돈이 더 무섭다 생각하던 사내는, 오늘 그 생각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재차 스위치를 누른다. 그는 조명으로 환해진 거실에서 스위치에 손을 떼지 않고 사방을 살폈다. 역시나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의 그림자 외에는.
“흐으.”
또다시 귓가에 숨소리가 들렸다. 웃음 섞인 한숨에 재떨이를 휘둘렀지만 이번에도 헛방이다.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