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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혼을 팔았다 1권(7화)
2. 등교(4)
대대적인 망신에 말도 못하고 창백하게 질려 있던 지현은 질끈 입술을 깨물며 돌아갔다. 속으로 몇 번이나 가만두지 않겠다고 되뇌면서.
“눈알 안 돌려?”
자신과 지현에게 쏟아진 시선에 으름장을 놓아 흩어 버린 상실은 오늘 학교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중간에 나갔다 올 능력은 있지만 엄마와 약속했었다. 학교를 잘 다니겠다고. 살아오며 필요하다 생각했던 대부분의 가치가 무너져 버린 지금,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엄마를 기쁘게 하는 것뿐이었다. 잠깐 나갔다 온다고 엄마가 알지는 못하겠지만, 그런 사소한 걸로 속이기는 싫었다.
“지루해.”
그에게만은 지루하기 그지없던 체육시간이 끝나고, 마지막 수업까지 끝마쳐 종례시간이 되었다. 담임은 늘 하던 말과 함께, 상실에게 학교 잘 나오라고 하고, 아이들에게 상실과 잘 어울리라는 말을 덧붙였다.
담임까지 나가자 다들 집으로 돌아갈 준비에 부산한데, 상실이 교실 전체를 향해 말했다.
“어이.”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아무도 무시하지 못했다. 새로운 교실의 권력자인 데다, 그의 음성에서 왠지 함부로 넘겨선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상실은 자신의 책상을 가리켰다.
“낙서한 놈들은 이거 다 지우고 가라.”
가방을 등에 메며 덧붙였다.
“내일 와서 보겠어.”
그가 유유히 밖으로 나가자 낙서를 해 놓았던 아이들이 앞다투어 몰려들었다. 그중에는 칼로 책상을 깊게 파놓아, 울상이 된 정훈도 끼어 있었다.
3. 외출(1)
집으로 돌아와 가방을 내려놓은 상실은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흰 티에 청바지, 운동화 차림이다. 배가 들어가서 허리가 맞지 않았지만, 벨트를 조여서 해결했다. 어차피 엄마도 없는 좁은 집구석에 있을 맘은 없었기에 밖으로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먹을 게 있진 않을까 생각하며 나선 그가 스르륵 그림자에 녹아든다.
빠르게 빛의 사이를 달려 번화가에 도착한 그는 여기저기서 느껴지는 냄새에 즐거워졌다. 여기도, 저기도 맛있는 냄새 천지다. 안 그런 사람도 많기는 했지만, 일 년 내내 이곳에서만 끼니를 해결해도 될 정도로 냄새가 맛있는 인간이 많았다.
“하.”
입에 침이 고이는 느낌에 그는 느긋하게 거리를 돌았다. 먹을 게 너무 많아서 뭘 먹을지 골라야 할 정도였다.
애인과 대화하는 미끈한 청년도, 가게에서 뭐라 성질을 부리는 아가씨도, 카페에 앉아서 주변을 훑는 아저씨도, 음료수를 손에 들고 있는 아줌마도, 깔끔하게 차려입고 걸음을 옮기는 할아버지도, 화려하게 차려입은 할머니도 맛있어 보였다.
역시나 학교가 병아리들만 있어서 식욕을 돋우지 못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어?”
신영 일당들도 같은 것을 느꼈는지 멍하니 상실을 바라본다. 그러다가 대번에 안색을 굳히며 우르르 도망가 버렸다. 소년은 그들에게서 관심을 거뒀다. 학교에서야 먹을 게 없으니, 저나마 감지덕지라 생각했었다만 이곳에 온 이상 음식물로서의 관심도 없었다. 더 자라면 혹시 모르겠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는 멀찍이 움직이는 외제차에서 굉장히 끌리는 냄새를 맡았다.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저걸 먹어야겠다. 결심과 동시에 가까운 건물로 들어갔다. 뒤이어 다른 사람이 들어섰지만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의 곁으로 시커멓게 변해 버린 상실이 그림자를 타고 지나갔다.
그림자를 뛰어넘고, 녹아들어 움직이는 상실의 속도는 굉장했다. 눈에 보이는 그림자로 가고자 마음먹은 뒤엔 이미 그 자리에 도착해 있었다. 건물의 그림자, 사람의 그림자, 도로를 달리는 차량의 그림자까지. 모든 사물의 그림자가 그에게 길을 열어 주었다.
점찍어 두었던 차는 어디론가 가 버려 보이지 않았지만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그것에서 흘러나온 입맛 당기는 냄새가 그림자로 화한 소년을 저절로 이끌었다.
도달한 곳은 모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내부의 그림자에 숨어든 그는 인공적인 조명쯤은 무시하며 냄새가 흘러나오는 방의 입구에 당도했다.
“하아.”
배 속에서 먹을 것을 달라 아우성쳤다. 상실은 기대감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이 안의 인간들은 얼마나 맛있을까? 어제의 그 아저씨보다 맛있을까? 정말 기대된다.
그가 문틈으로 스며들었다. 식사시간이었다.
침대에 누워 샤워하러 들어간 여자를 기다리는 이형헌은 아주 기분이 좋았다. 그는 남에게 말할 직업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정말 직업이 없느냐 하면 아니다. 형헌은 자신의 업을 공정거래업자라고 생각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제비, 사기꾼, 여자 등쳐 먹는 놈이라 명명할 수 있겠다. 그러나 남들은 그렇게 부를지 몰라도 최소한 그 자신만은 정말 공정거래업자라 여겼다.
외로운 여인에게 사랑과 쾌락을 주고 돈을 받는다. 이 얼마나 정직하고, 정당한 거래인가?
그는 준수한 얼굴과 다년간의 관리로 단단한 몸, 타고난 유창한 언변을 무기 삼아 여러 여자들과 사랑을 나눴다. 그리고 돈을 받아 냈다. 그 뒤엔? 당연히 내뺐다. 거래가 끝났으니 지저분해지기 전에 끝냄이 옳지 않은가. 말도 없이 이별했지만, 원래 이별이란 소리 없이 떠나야 아쉬움이 크고 후일, 좋은 추억으로 남는 법이다.
그에게 몸 주고, 마음 준 것도 모자라서 돈까지 떼인 여자들이 듣는다면 목 졸라 죽이려고 들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형헌은 할 말이 있었다. 떠나간 남자를 향한 추한 질투라고. 아니면 죽여서라도 곁에 두고 싶은 극도의 소유욕이라거나.
그가 떠난 뒤에 시름에 잠겨 자살하거나 패가망신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것 또한 어쩔 수 없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법이다. 그런 인생의 굴곡을 즐기지 못하고 무너져 버리는 사람은 어차피 언젠가 다른 이유로 무너지기 마련이었다. 그게 꼭 자기 탓만은 아니지 않은가? 설령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온 돈을 가로챘어도, 당사자가 정신 똑바로 차리고 갚았으면 될 일이었다.
“흐흥.”
남자는 단추를 하나하나 풀며 콧노래를 불렀다.
이번 여자는 제법 작업 시간이 오래 걸렸다. 꼬시는 것까지야 별로 안 어려웠는데, 정당한 거래의 대가를 받아 내기 위한 신뢰를 쌓는 과정이 더뎠다. 저항과 의심이 좀 있었다만, 그래 봤자 낚싯바늘을 문 물고기였다. 이런 경우를 어찌 요리해야 하는지는 이미 진작 체득했고, 보다시피 저 여자는 돈을 가져오기로 약속하고 이렇게 모텔에 오게 된 상황이다.
“오천? 육천? 아니, 한 일억만 받을까?”
얼마나 긁어낼지를 생각하니 즐거워졌는지,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다. 집이 부자라니까 잘 하면 더 받아 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 돈으로 뭘 할까 생각하니 앞으로의 일이 기대됐다. 역시 인생은 즐거운 거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졌다. 뭐가 방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 그는 즉시 문을 살폈지만, 아무도 없었다.
“바람인가?”
창문도 살폈지만, 얼굴만 간신히 내보일 수 있는 그것은 굳게 닫혀 있었다. 형헌은 다시 주변을 살폈다. 아무래도 불길한 냄새가 났다. 과거, 그가 떠날 것을 짐작한 어떤 독한 여자가 남자들을 불러서 무참히 두들겨 맞던 날. 숨어 있던 그자들이 뛰쳐나오기 전의 느낌과 비슷했다.
어째 상황이 안 좋게 흘러간다고 생각했지만, 들려오는 건 샤워기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와, 곧 있을 열락의 시간을 기대하는 여자의 콧노래뿐이었다. 아직 본격적인 작업은 시작도 안 했으니 여자를 의심할 이유는 없었고, 흔적을 잘 지웠기에 옛 여자들의 추적을 우려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고민하고 있는 그의 등 뒤에서 그림자가 몸을 일으켰다.
골몰하는 남자를 뒤에서 바라보며, 상실은 입맛을 다셨다. 씻고 있는 여자에게선 그저 그런 냄새가 났다. 먹을 것으로 비유하자면 흙바닥에 떨어졌던 음식과 같았다. 굳이 먹고자 하면 못 먹을 건 없는데, 먹자니 비위가 상했다. 반면 이 남자는 굉장히 맛있는 냄새가 났다.
두 사람에게서 나는 냄새가 합쳐져 그리도 맛있는 냄새가 나는 줄 알았던 소년으로서는 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먹어 본 적도 없는 비싼 음식을 앞에 둔 기분이다. 당장에 나약한 몸뚱일 부숴 버리고 싶은 것을 자제했다.
이런 건 음미하며 먹어 줘야 예의다. 비명도, 발악도, 흩어지는 혈흔까지도 모두 즐기며 피 한 방울, 머리카락 한 가닥 남기지 않고 먹어 줘야 했다.
그가 손을 뻗었다. 시커먼 두 손으로 목을 휘감았다. 체취가 느껴진다. 참을 수 없을 것 같지만 참아야 했다. 타는 듯한 갈증이 일었지만, 인내한다면 그만큼 더 깊은 맛을 즐길 수 있으리라.
목을 감싸오는 서늘한 느낌에 형헌은 여자가 나온 것으로 착각했다. 피부가 차가운 것도 샤워 때문이라 생각했다.
“나왔어?”
팔을 쓰다듬던 그는 이것이 여자가 아님을 깨달았다.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손에 와 닿는 감촉은 인간도, 짐승의 것도 아니다. 형언할 수 없는, 달라붙는 듯한 촉감에 그는 화장실로 홱 고개를 돌렸다. 안에서 더운 김과 노랫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럼, 내 뒤에 있는 건 뭐지?
의문이 일었다. 등골이 싸해졌다. 돌아보고 싶었지만, 어쩐지 돌아봐선 안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오도 가도 못하고 있는데, 팔이 목을 타고 올라왔다. 그것은 검었다. 창문도 조명도 없는 밀실에 들어가서야 볼 수 있는 암흑처럼, 지독히도 검었다.
“흐으으.”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살려 달라고, 경찰을 불러 달라고. 하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목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본능적인 공포에 굳어 버린 성대에서 나오는 소리라곤 바람 빠지는 소리뿐이었다.
“맛있겠다.”
속삭임이 들려온다. 성별도, 나이도 알 수 없는 기괴한 목소리에 남자는 발작적으로 벌떡 일어나 달렸다. 그제야 목이 트이며 비명이 나왔다.
“으아악! 사람 살려!”
문으로 뛰어가던 그는 달리던 방향과 반대로 가해진 힘에 볼썽사납게 뒤로 자빠졌다.
“크흑.”
신음을 흘리며 다급히 몸을 일으키려는데, 목에는 아까 걸쳐졌던 검정색 팔이 그대로 붙어 있었다. 분명 몇 미터나 움직였는데도 그것은 제자리에 있었다.
“어, 어어.”
놀라 어버버거리는 그의 눈에 은은한 조명을 가리며 검은 머리가 나타났다. 표정은커녕 이목구비도 알아볼 수 없는, 그림자와 같은 형상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상상도 못했던 불가해한 존재를 목도하자, 이성이 일시적으로 멎어 버렸다.
그것이 그에게 말했다.
“아무 데도 못가.”
그것이 킥킥 웃었다.
“넌 내 거야.”
그것이 손을 움직였다. 남자의 팔을 들어 제 얼굴로 가져갔다. 지금껏 입도 없이 말하던 그림자에 입이 생겨났다. 상어 같은 이빨과, 시커먼 몸뚱이보다 더 어두운 심연이 아가리를 벌린다. 그 모습은 악마라는 단어가 더없이 어울렸다.
“나를 위해 울어 봐.”
날카로운 이빨이 손을 덥석 물었다.
“히이이익!”
남자가 몸서리치며 기겁했다. 손이 잘려 나갔다. 손목 위로 톱날에 잘린 듯 너덜너덜한 절단면이 보였다. 부러진 뼈와 끊어진 핏줄과 근육이 분수처럼 솟구치는 피와 함께 속살을 내보였다.
“흐아악!”
그림자의 형상을 취한 상실은 우물우물 손을 씹다 뱉으며 비명을 감상했다. 고통에 절규하는 음성이 감미롭다. 그에게서 풍겨 오는 공포의 향기가 고소하다. 썩은 음식과 같은, 부패한 영혼의 냄새가 지독하리만치 유혹적이었다.
“하하, 하하하하!”
소년은 유쾌해졌다. 어제의 식사보다 더 즐거웠다. 지금의 식사뿐만 아니라, 이후의 모든 식사가 기대됐다. 인간은 매우 많았고, 영혼이 썩은 인간의 수는 무수했다. 그가 아무리 먹어 치워도, 먹을 만한 인간은 줄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