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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혼을 팔았다 1권(9화)
3. 외출(3)
소년들이 인사하느라 정신없는 사이, 상실은 슬쩍 모습을 감춰 폭력배를 따라갔다. 이 남자에게선 꽤나 맛있는 냄새가 났다. 게다가 조직폭력배다. 당연히 그가 속한 조직이 있을 거고, 이자와 비슷하거나 더 맛있는 인간들도 있을 터였다.
인근의 건물 삼 층으로 그가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상실은 위치를 기억하고 돌아섰다. 지금 당장은 배가 불러서 더 먹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어디에 있는지 확인만 했으면 충분하다. 어떤 인간들이 있는지는 나중의 즐거움이니까. 선물은 포장 풀어 보는 과정이 재미 아니겠는가.
그날 저녁. 식탁을 차린 정순이 상실에게 물었다.
“학교는 어땠니?”
“좋아. 계속 다닐 수 있으니까, 엄마도 걱정 마.”
“그래그래. 이것도 먹어 봐.”
흐뭇하게 웃던 엄마가 불고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들을 위해서 큰맘 먹고 사온 것이었다. 상실이 사양 않고 먹는 것을 보고 있는데, 티브이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오늘 오후, 살인사건이 있었다는 신고가 접수되어 서울의 모 숙박업소로 경찰이 출동했습니다.
화면에 보이는 장소가 낯익어, 유심히 살피던 그녀는 아는 곳임을 깨닫고 탄성을 질렀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피해자의 시신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난도질되어 있었습니다. 경찰은 함께 투숙하고 있던 김씨가 새까만 짐승 같은 것을 보았다고 진술한 것과, 시신의 훼손 상태로 보아, 실제 맹수가 탈출한 것은 아닌지, 가까운 동물원을 상대로 조사하고 있습니다.
모자이크된 여성과 숙박업소 주인의 인터뷰가 나왔다. 다시 기자의 말이 이어졌다.
―인근의 주민 분들은 맹수를 발견할 시, 즉각 가까운 경찰서로 신고해 주시고, 늦은 밤 통행을 자제해 주시길 권고드립니다.
“어머, 어머. 세상에나.”
정순이 놀라며 안타까워했다.
“무슨 짐승이 집까지 기어 들어갔대니.”
“그러게요.”
상실이 천연덕스레 맞장구쳤다.
4. 둘째 날(1)
그림자를 타고 등교한 상실은 자리에 앉다가 한 눈을 치켜떴다. 어제 말하고 간 내용 때문인지 낙서는 확실히 지워져 있었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책상의 귀퉁이가 확연히 가라앉아 있었다. 조각칼로 누가 긁기라도 한 듯 움푹 파였다. 그 자리에 있던 낙서가 칼로 파낸 것임을 기억한 그는 교실을 훑어보았다.
눈치를 보고 있던 몇몇이 어색하게 웃거나 시선을 돌렸고, 지원과 일당들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중에서 책상에 엎드려 도롱도롱 코를 골고 있는 정훈을 발견했다.
가까이 갈 필요도 없이 그림자를 통해 살펴보자 역시나, 손바닥에 나무의 파편이 묻어 있었다. 이놈이 범인이라 판단한 그는 바로 관심을 거뒀다. 책상 모양이야 어쨌건 중요하지 않았다.
책을 꺼내 전날 배운 것을 읽어 보자니 역시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무래도 기초가 너무 부실했다. 이래서야 공부 잘하기는 물 건너갔다.
공부 가르쳐 줄 녀석을 물색하는데, 시선이 느껴진다. 그 방향에는 장지현이 있었다. 원한 가득한 시선으로 쏘아보고 있었지만 무시했다. 제깟 것이 노려보면 어쩔 건가.
상실이 무심하게 시선을 돌리자 그녀는 다시 한 번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입술을 깨물었다. 어제 화가 나서 잠도 제대로 못 잤다. 학원에서도, 집에서도, 지금도 상실에 대한 생각뿐이다. 어떻게든 저 태연한 낯짝을 뭉개 주고 싶었다. 하지만 좋은 방도가 떠오르지 않는다. 손톱을 질근질근 물어뜯으며 골몰했다. 무슨 수를 쓰건 한 방 먹이지 않고선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할 수 없다.
그러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힘이야 세졌을지 몰라도, 여전히 머리는 꼴통일 거다. 한창 자라는 남자애들이라면 근육이야 키워지겠지만, 전교에서도 밑바닥을 기던 상실이 공부까지 잘해졌을 리 없었다.
지현은 예쁘장한 얼굴과는 다르게 제법 공부도 열심히 했다. 체육도 곧잘 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대단했다. 지성과 체력에 미모까지 겸비하다니. 나중에 뭔가 되어도 될 것이었다. 사실은 어릴 때부터 얼굴만 예쁘다는 말을 듣기 싫어 죽어라 노력한 결과였지만.
방도가 떠올랐으니, 이제 공개적으로 망신만 주면 될 일이었는데, 이번엔 어떻게 망신을 줄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시험은 아직 기간이 멀었고, 그 외의 방법으론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고민하다가 상실을 바라보니 책을 보며 몇 번이나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꼴통이 어디 가겠어.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물을 마시러 가는 척하며 상실이 뭘 보고 있나 훔쳐봤다. 수학이었다. 간혹 페이지가 넘어가긴 했는데, 뒷장으로 넘기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넘어간다. 그러고도 이해가 가지 않는지 갸웃거리고 있었다.
진도보다 앞선 내용을 공부하고 있던 그녀는 상대적 우월감과 여전히 멍청한 상실의 모습에 실소했다. 아무래도 이런 멍청이에게 복수를 하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이 바보짓 같았다. 자신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서울의 대학을 가서 즐거운 캠퍼스 라이프를 즐길 것이고, 저 등신 천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집도 가난하다니, 대학도 못 가고 어디서 배달이나 하고 있을 터였다.
이제부터 무시하고자 마음먹는데, 상실이 그녀를 빤히 봤다.
“웃기냐?”
“아니, 노는 동안 운동은 하고 왔길래, 공부도 잘하게 됐나 생각했었던 거뿐이야.”
지현이 비웃음을 지었다.
“뭐, 여전한 것 같네.”
그리 말하고 돌아서려는데, 이어진 말이 발목을 잡았다.
“그러는 넌 잘하냐?”
“너보다야 훨씬 낫겠지.”
도발을 넘기지 못한 그녀가 발끈해서 말하자, 상실이 웃었다.
“잘됐네.”
“뭐가?”
소년이 책을 가리켰다.
“그렇게 자신 있으면 가르쳐 봐.”
“뭐? 내가 왜?”
“자신 있다며. 그러니까 멍청한 나도 알아듣게 가르쳐 보라고.”
“내가 그렇게 시간이 많은 줄 알아? 네가 알아서…….”
어이가 없어서 쏘아 주고 돌아서려는데, 상실의 눈이 검게 번뜩였다.
“가르쳐 봐.”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에 잘 돌아가던 혀가 굳었다. 화난 부모님 앞에 있는 것처럼 압박감이 느껴졌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고, 자신을 주시하는 검은 눈동자가 부담스러웠다. 자연스레 시선을 내리깔며 작은 목소리로 저항했다.
“내, 내가 왜 너를 가르쳐.”
“그러니까.”
소년의 음성이 더욱 가라앉았다. 소녀는 소름이 끼쳤다.
“가르쳐 보라고.”
거부권은 없다. 새삼 느껴지는 두려움에 누가 도와주지 않나 둘러보았지만 모두가 외면했다. 상실의 앞에 앉아 있던 아이는 벌벌 떨며 책만 바라보고 있었다.
전에는 무시하고 핍박하던 아이들이 말 한 마디조차 감당 못하고 겁에 질려 있었다. 어느 누구도 그녀를 도울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간 시도 때도 없이 알랑거리며 친한 척하던 남자애들도 마찬가지였다.
배신감과 위압감에 바르르 떨던 그녀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가, 가르쳐 줄게.”
“그래? 그럼 의자 가지고 와.”
언제 그랬냐는 듯 미소한 상실이 지시했다. 그것이 절대 어겨선 안 될 명령으로 느껴져, 소녀는 급히 자신의 의자를 가지고 왔다. 물론 소년은 지켜보기만 했다.
“이건 알아?”
상실의 책상 옆에 앉아, 교과서의 내용 중 쉬운 편인 공식을 가리키며 물었다. 소년은 고개 저었다.
“몰라.”
“그럼 이건?”
“몰라.”
“이것도?”
제일 쉬운 공식을 찾아 가리켰다. 이맛살을 구기며 고민하던 상실은 잠시 뒤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헷갈리네.”
소녀는 암담한 심정이 되었다. 중학교 때 수업을 듣고, 사칙연산만 제대로 할 줄 알면 금방 감을 잡을 수 있는 것임에도 모르겠다니. 그렇다면 기초가 부실한 거다. 수수깡으로 지은 집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그녀가 판단하기로 상실은 집이라고 표현할 만한 지식도 없었다. 따지자면 움막에 불과했다.
그녀에게 상실이 말했다.
“잘 알려 줘. 나라도 알아들을 수 있게.”
그 말이 협박으로 들려, 지현은 한숨을 내쉬고 싶었다. 하지만 눈앞의 소년이 무서워 한숨도 쉬지 못했다. 그녀가 어떻게든 쉽게 내용을 설명하는 사이, 지원이 조심스레 교실로 들어왔다. 상실이 옆에 지현을 두고 공부하는 것을 본 그는 잠깐 눈썹을 치켜떴지만, 바로 꼬리 만 개처럼 조용히 자리를 찾아갔다.
지현이 상실에게 붙들려 있는 동안 조례시간이 되었다. 조용한 분위기의 교실을 둘러본 담임은, 도망치듯 자기 자리로 향하는 지현과 상실을 보더니 흡족하게 웃었다.
예상과 달리 아이들이 잘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쩐지 위화감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반에서도 인기가 좋은 지현이 의자까지 가져다 함께 있던 것을 보니, 앞으로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잘 나왔다, 상실아. 계속 볼 수 있으면 좋겠구나.”
“네, 선생님.”
교사는 끄덕이며 아이들을 향해 한마디 더 했다.
“상실이가 쉬다가 나와서 진도를 따라가지 못할 수도 있으니, 다들 도와주길 바란다. 알겠지?”
하지만 아무런 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아이들은 저마다 눈치를 살피며 입을 꾹 다물었다. 도와주다니, 말이나 될 법한 소린가. 근처에 가기도 싫었다.
아이들이 아직은 어색히 여긴다고 오해한 담임은 차차 나아지겠거니 생각했다.
수업이 이어졌다. 상실은 담당교사의 말과 칠판에 적힌 내용을 일단 받아쓰긴 했지만 여전히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심지어는 어디에 줄을 치고, 강조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공부고 뭐고, 학교에 있는 자체가 싫던 몸이었으니, 이제와 공부를 하려고 해 봤자 안 되는 게 당연하다.
맨 뒷자리에 홀로 앉은 그는, 지현이나 다른 공부 잘하는 아이를 옆에 두면 편할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자리 배정은 맘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그러다 가만 생각해 보니, 담임에게 말하면 될 것 같았다.
등교를 거부하다가 나온 데다, 따돌림당하던 몸이니 과하게 관심을 쏟고 있는 듯했다. 적응하는 데 어려우니 짝지어 달라고 말하면 두말 않고 들어줄 것이다.
쉬는 시간이 되어 교무실로 찾아가서 말하자, 과연 담임은 흔쾌히 허락했다. 교실로 돌아간 상실이 가방과 짐을 챙겼다. 어째 불안하다고 생각하던 지현은 그가 자신의 자리로 다가오자 하얗게 질렸다.
“왜, 왜?”
“자리 좀 바꾸려고.”
“우리끼리 맘대로 바꾸면 안 되잖아?”
“싫어?”
소년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소녀의 안색이 파리하다.
“시, 싫은 건 아닌데…….”
정말 싫었지만 차마 말하지 못하자 상실이 히죽 웃었다. 어딘지 가학적인 미소였다. 사실 지현이 어떤 생각인지 훤히 알고는 있었다. 지현뿐만 아니라, 지현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소녀는 물론이고, 근처에 있는 아이들도 말만 못했지 상실이 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소년은 그들의 바람을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뭐가 아쉬워서 이것들의 뜻을 따라줘야 한단 말인가.
“그럼 바꿔. 거기.”
상실이 지현의 짝에게 턱짓하자 그녀는 사색이 되어 책상서랍과 위의 물품을 가방에 쓸어 담았다. 그러곤 미안하단 듯 지현을 일별하곤 상실의 자리로 도망치듯 가 버렸다. 내심 상실과 멀어짐에 안도하는 것 같았다.
“잘 부탁한다.”
“으응.”
지현은 내키지 않았지만 끄덕였다. 주위의 아이들은 행여나 눈이라도 마주칠까 시선을 피하기 급급했다. 눈치를 살피던 지현이 조심스레 물었다. 죽어도 이 녀석과 같이 있기는 싫었다. 숨이 턱턱 막혀 왔다.
“근데, 선생님이 뭐라고 하지 않을까?”
“괜찮아.”
자신의 짐을 풀어놓으며 상실은 그녀에게 활짝 웃어 줬다. 아무 걱정 말라는 듯 웃는 얼굴은 어찌 보면 비웃음과도 흡사했다.
“허락 맡았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그렇구나.”
지현은 어색하게 웃었다. 뺨에 옅은 경련이 일었다. 전학이라도 가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모습에 상실은 한마디 던져 주었다. 하는 꼴을 보자니 괴롭히지 않고는 배길 수 없다.
“너도 기쁘지?”
“어?”
이게 무슨 개소린가 하는데, 말을 잇는다.
“쉬는 시간마다 자리 옮기기 귀찮을 거 아냐. 나 가르쳐 줘야 하는데 말이지.”
소녀는 말을 잃었다. 누가 대놓고 목을 조른대도 이렇게 답답하진 않을 거였다. 수업시간 뿐만이 아니라, 쉬는 시간에도 잡아 놓겠다는 말에 앞날이 보이지 않았다.
“잘 가르쳐 줘.”
자기 하고 싶은 말을 다한 상실이 책을 꺼내자 종이 울렸다. 하지만 지현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교사가 들어와 다들 인사할 때가 되어서야 정신을 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