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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혼을 팔았다 1권(10화)
4. 둘째 날(2)


수업이 끝나도 상실은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모르는 것을 물어보며 수업 내용을 복습했는데, 이번은 국사수업이라 그랬는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자리가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기에 그녀는 어떻게든 떨어지기 위해 머릴 굴렸다.
“저기, 나 물 좀 마시고 올게.”
“그래?”
조심스레 말하자 소년이 끄덕였다. 그게 승낙의 표현인 줄 알고 일어서려는데, 그가 근처에 있는 남자애를 지목했다.
“물 좀 떠다 줄래?”
말은 권고지만 음성에 담긴 뜻은 명령이나 다름 아니다. 소년은 부리나케 달려가 물을 떠다 바쳤다.
“고마워.”
전혀 고맙지 않다는 투로 치하하자, 그게 자리를 떠도 좋다는 뜻인 줄로 생각한 소년이 멀찍이 가 버린다.
“마셔.”
엉거주춤 일어서 있던 지현은 도로 앉을 수밖에 없었다. 맘대로 어딜 가지도 못하는 몸이다. 이래서야 노예나 다를 바가 없었지만, 어디에 하소연할 수도, 항의할 수도 없었다. 물을 마셨지만 여전히 입안이 바짝 말랐다.
“여기 말인데.”
상실은 그녀의 사정 따위 알 바 아니란 듯 질문을 계속했다.
한 시간 같던 쉬는 시간이 끝났지만 그녀에게 쉴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이어지는 수업과정 중에도 상실은 모르는 말이 나오면 물어 왔다.
질문에 답해 주랴, 수업 들으랴 고생한 지현은 다시 찾아온 쉬는 시간에 이번엔 반드시 벗어나고 말리라 다짐했다.
“나 화장실 좀.”
그에 상실이 벽에 걸린 시계를 흘끗 보며 말했다.
“오 분 줄게.”
크게 인심 썼단 식으로 말하자 지현은 황급히 화장실로 향했다. 조금이라도 이 자릴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화장실로 숨어든 소녀는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젠장. 빌어먹을 새끼.”
어쩌다 이렇게 얽혀 버린 건지, 뭐가 그렇게 문제가 된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애초에 상대도 않아야 했다.
“어쩌지?”
앞으로의 일이 걱정되었지만 그보다, 당장의 일이 급했다. 볼일이 있어서 온 화장실은 아니었기에 변기에 앉아 있기만 하면 되었지만,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손목시계를 보니, 상실이 말한 오 분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이대로 버티다가 쉬는 시간이 끝나면 들어갈까 생각도 들었다만, 오 분이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답답해졌다.
“어쩌지? 어쩌지?”
발만 동동 구르던 그녀는 결국 심리적인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교실로 돌아갔다. 교실이 한 걸음씩 가까워질 때마다 발이 무거워지는 착각이 일었다.
교실에 들어서자, 상실이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 반기는 시선을 보내왔다. 그게 꼭 저승사자 같다고 생각한 지현은 억지로 걸음을 옮겼다.
“좀 늦었다?”
상실이 시계를 보며 말하자, 과연 일 분 가량이 넘어가 있었다.
“여, 여자는 그럴 수도 있는 거야.”
“흐응.”
다 안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시선에 내심 찔린 소녀가 먼저 펜을 들었다.
“어디가 궁금한데?”
상실은 모르는 척 넘어가 주었다. 이번만.
점심시간이 되어서도 지현은 상실을 벗어나지 못했다. 평소에 함께 먹던 친구들은 근처로 다가오지도 않았다. 인접한 곳에 앉은 애들은 다른 자리로 도망치듯 떠나가 버렸다. 이게 다 옆의 상실 때문이었지만, 그를 원망하기도 전에 먹던 밥이 목에 걸릴 것 같았다.
“지금은 시간 많으니, 천천히 먹어.”
뼈가 있는 배려의 말을 건넨 그는 언제 다 먹나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밥이 넘어가지 않아 남은 음식을 버린 그녀는 원망 서린 눈으로 상실을 바라보았다. 이 자식 때문에 엉망진창이다. 쉬는 시간 따윈 사라졌고, 친구들도 가까이 오지 않았다. 몇 명인가 다가오려고 했지만 상실과 눈을 마주치곤 아무 일 없었던 척 지나가거나, 즉시 몸을 돌렸다.
정말 전학이라도 가지 않고서는 계속 묶여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어쨌거나, 상실의 질문을 무시할 담력은 없었기에 고분고분 그의 공부를 돕는 겸, 자신도 복습하고 있던 때였다.
“너 뭐야?”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소녀는 드디어 자신을 구해 줄 사람이 나타났나 고개를 돌렸다가 실망했다. 아는 얼굴이었다. 명찰의 색이 이 학년임을 증명하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덩치 큰 남학생이었다.
지현은 스스로의 평가처럼 인기가 제법 좋았다. 일 학년뿐만 아니라, 이삼 학년에서도 그녀를 마음에 둔 소년들이 많았다. 다만, 이 윤성주라는 이름의 상급생은 전혀 내키지 않는 경우였다.
힘과 덩치만 믿고 으스대는 남자로, 얼굴도 취향이 아니었고, 몸도 그녀가 좋아하는 늘씬한 것과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위기에서 구해 줄 유일한 동아줄이었기에 지현은 그에게 기대를 걸어 보았다.
올해 열여덟 살인 성주는 매우 기분이 나빴다. 전부터 지현을 봐 두었고, 나름대로 적극적으로 구애도 해 봤다만 단박에 차였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언젠가 자신에게도 기회가 오겠거니 생각하며, 접근하는 놈들을 차단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도 얼굴이나 한 번 보고, 말이나 걸어 보려고 급하게 점심을 먹고 왔거늘 웬 조그만 놈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닌가?
지현이 자신을 좋게 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나중에 따로 손봐 주려 마음먹었었지만, 또 생각이 바뀌었다. 같이 있는 지현의 표정이 영 안 좋아 보였기 때문이다.
오해일 수도 있었지만 성주는 확신했다. 저런 얼굴을 종종 봤었기 때문에 자신의 눈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은 갖지 않았다. 지현이 자신과 대화를 나눌 때마다 지었던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해서 이번 기회에 점수라도 따볼 요량으로 나섰다. 과연 생각이 틀리지 않았는지 지현의 얼굴에 조금이나마 화색이 돌았다. 잠깐 표정이 일그러졌던 것도 같지만 그런 것쯤이야 남자답게 넘겼다. 어차피 이번 일만 해결하면 지현도 그를 다시 볼 테니까. 다행히 처리할 대상도 별 볼 일 없어 보인다. 조그마한 덩치에 키도 작았다.
“야, 네가 우리 지현일 잡아 놓고 있는 거냐?”
우리란 단어에 지현의 표정이 구겨졌지만 성주는 그것을 몰랐다. 상실은 이건 또 뭔가 하며 성주에게 시선을 주었다.
뒤에서 지켜보던 아이들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저 상급생이 어떻게 깨져 나갈 것인지를 기대했다. 상실이 진다는 생각은 아무도 안 했다. 사람을 맨손으로 잡아드는 괴물이다. 암만 덩치가 커도 고작 이 학년이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넌 뭐냐?”
“뭐 이런 싸가지 없는 새끼가.”
상실의 질문에 성주는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이 씨발새꺄, 상급생이 좆도 병신으로 보이냐? 쥐새끼만 한 새끼가 겁을 상실했나.”
욕을 해 대며 덩치와 나이로 위압하는 그를 보며 상실은 실소했다. 그저 공부나 좀 해 보려고 하나 잡고 있었더니, 별 괴상한 놈이 다 끼어들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어루만져 주자니, 어머니께서 학교로 불려 오시거나 깽값 물어 줄 것 같았다. 그렇다고 말로 한다고 얌전히 들어먹을 놈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상실도 윤성주란 상급생이 누군지는 알았다. 점심시간이나 하교 때만 되면 달려와서 지현에게 집적거리던 놈이다. 이 학년 사이에서 주먹으로 순위에 든다는 소문도 들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덩치만 큰 애다.
학교에서 제일 세다는 신영조차 우습지도 않았는데, 하물며 성주쯤이야. 처리하는 건 일도 아니었지만, 이번에도 문제는 문제가 생기지 않고, 진단서 끊어 올 만큼의 부상을 입히지 않는 것이다. 그러자면 무력시위가 제일이었다.
“선배.”
아까 누군가 지현을 위해 갖다 바쳤던 물 컵을 들며 말하자 성주의 눈이 사납게 뜨였다. 상실은 잘 보란 듯, 쇠로 된 컵을 그의 코앞에 가져다 댔다. 손아귀를 쥐자, 금속으로 된 형상이 찰흙처럼 구겨졌다.
성주는 무론, 지현의 얼굴까지 핏기가 빠져나간 듯 해쓱해진다. 저게 과연 사람인가 의문이 들었다.
“나한테 볼일 있어?”
“아, 저, 그게 말이지.”
방금 눈앞에서 벌어진 일에 성주는 혼이 빠져나갈 것 같았다. 무지막지한 괴물이었다. 쇠 컵이라면 성주도 어느 정도 휘게 만들 수는 있었다. 밟는다면 납작하게도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한 손으로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짓이겨 버리는 짓은 불가능했다.
“내가 뭘 잘못 알았나 봐. 미안해.”
굽실거리며 사과하는데, 옆에서 어처구니없어하는 지현이 보였다. 그로서도 멋지게 뭔가 해 보이고 싶었지만, 저런 놈이라면 예외였다. 저 손으로 목이라도 쥐고 비틀면 어떤 꼴이 될지 끔찍하다. 아무래도 지현은 포기해야 할 성싶었다.
“그럼 가 봐.”
상대하기도 귀찮은지 상실이 손을 까딱였다. 성주는 황송해하며 몸을 돌렸다. 그대로 교실을 벗어나려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
“왜, 왜?”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깜짝 놀라며 돌아보자, 상실이 뭔가를 휙 던졌다. 받아 보니 구겨진 컵이다.
“가는 길에 버려.”
“응, 알았어.”
쇠로 꽃이라도 만든 것처럼 구겨진 형상을 보며, 그는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어지간하면 어울리던 친구나 선배들을 끌고 와서 밟아 보겠다고 마음먹을 만했지만, 이런 걸 보니 그런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교실로 돌아가던 그는 문득 저런 놈을 자신이 왜 모르고 있었나 생각하다가 어제 들었던 소문을 떠올렸다. 일 학년들 사이에서 사람을 한 손으로 들어 올리는 괴물이 있단 말이었는데, 당연히 헛소리라 치부했다.
사람의 몸무게가 적어도 오십은 나간다. 그걸 한 손으로 드는 건 어지간한 보디빌더도 힘든 일이었다. 근데 막상 보니, 헛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축소된 경향이 있었다. 악력만으로 쇠 컵을 구겨 버리는 놈이라니. 사람을 들었다는 말도 이젠 믿을 수 있었다.
성주가 돌아간 뒤, 수업이 다 끝나고 하교시간이 되자 지현은 학원이고 뭐고, 집으로 돌아가서 잠을 청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담임이 종례 때, 싱글거리며 앞으로도 잘 지내란 말을 건넬 당시에는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담임까지 나가자 드디어 해방이라 속으로 외치며 신 나서 가방을 정리하는데, 상실이 종이를 내밀었다. 그 뜻을 알 수 없기에 소녀가 물었다.
“이게 뭐야?”
전화번호라도 써 달라는 건가 생각하는데, 소년이 으쓱였다.
“내 수준 알지?”
“응.”
아주 잘 알았다. 밑바닥도 이런 밑바닥이 없었다. 도대체 얼마나 학업을 등한시했으면 아는 게 이렇게도 없을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과연 중간고사 성적이 전교에서 논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 아주 수위를 다투는 실력이다. 꼴찌를 놓고.
“그에 맞춰서 전 과목 문제집 추천해 봐.”
지현은 오늘 하루만 몇 번이나 어처구니가 없어졌는지 생각해 봤다. 문제집을 고르자면 일단 당사자의 수준을 알아야 했다. 그리고 해당 수준의 문제집들 중에서도 응용력이나 계산, 암기능력을 고려해서 그것을 끌어올려 주는 책을 골라야 했다.
암만 하루 종일 붙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걸 모두 알 수는 없었다. 한 과목당 몇 시간은 붙어 있어야 짐작할 수 있는데, 그것도 모자라서 전 과목이다. 또 시중에 문제집은 오죽 많은가. 게다가 지현도 아직 학생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초등학교부터 다시 밟고 올라오라고 쏘아 주고 싶었지만, 역시나 그건 무서웠다.
“아직 네 수준을 잘 모르겠는데.”
말꼬릴 흐리자 상실이 물었다.
“못 해?”
“아니, 못 하는 건 아닌데.”
“그래서, 못 하냐고.”
목소리가 점점 가라앉는다. 지현은 옆에 앉은 게 사람이 아니라 무슨 맹수가 아닐까 싶었다. 점점 낮아지는 음성에 근처에 있던 아이들은 죄다 도망가 버리고, 남은 건 청소할 인력들뿐이었다.
“하, 할 수는 있어.”
결국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고작 열일곱 나이의 소녀에게 상실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은 버거웠다.
“그치만 문제집도 너무 많고…….”
“너 시간 많아?”
“어?”
지현은 매우 불안해졌다. 이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만 더 붙어 있겠다는 말이라 생각하자 몸서리가 쳐진다.
“아니, 나 학원 가야 하는데.”
“시간이 아예 없어?”
“그건 아니지만, 집도 가 봐야 하는데.”
“그럼 시간이 있단 거네.”
“으응.”
소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완전히 코가 꿰였다. 학원 갈 시간까지 질질 끌려다닐 것이 눈에 선했다.
“나랑 서점 가자. 문제집이 많으면 가서 고르면 되지.”
지현은 또다시 숨이 턱턱 막혔다. 이 자식은 분명 고의로 날 괴롭히는 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나올 리가 없었다.
“시간이 없다니까, 빨리 가자.”
도망도 못 가게 가방까지 뺏어 든 상실이 앞섰다.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에 따라오지도 못하는 그녀를 돌아보며 말 잇는다.
“정 시간이 모자라면 만들면 되겠지.”
목적을 이룰 때까진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것이란 선언에, 그녀는 한숨을 쉬고 싶었다. 결국 고삐 잡힌 망아지처럼 졸졸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