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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혼을 팔았다 1권(11화)
4. 둘째 날(3)
버스정류장은 하굣길의 학생들이 가득했다. 버스가 한 대씩 올 때마다 미어터지도록 밀려 들어간다. 두 대의 버스를 보내고서야 지현과 상실은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자리는 이미 꽉 찼고, 손잡이를 잡고 서 있어야 했는데, 버스의 움직임을 따라서 탑승객들이 물결처럼 흔들렸다. 가녀린 지현도 그에 휩쓸려 휘청대는데, 누군가 팔을 잡았다. 놀라서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상실이었다.
소년으로서는 자원봉사 나가는 소녀에게 하자가 발생할 우려를 줄인 행위에 지나지 않았고, 소녀는 가까이 있기도 싫은 녀석의 손길이 싫었다. 그래도 전보단 훨씬 안정감 있어졌기에 일단은 몸을 맡겼다. 거절할 용기도 없었고.
버스 내부를 훑던 상실은 익숙한 냄새를 맡았다. 고개를 돌려 보니 신영과 일당들이 맨 뒷좌석에 점령하듯 줄지어 앉아 있었다.
제일 먼저 뒷자리를 선점한 신영은 버스가 출발하고서야 상실의 존재를 알아챘다. 당장이라도 내리고 싶었지만, 달리는 버스인 데다, 앞의 무수한 인파를 뚫고 내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 눈에 띌 수도 있었기에 조용히 있었지만, 떡하니 앉은 뒷자리에서 언제까지고 들키지 않을 리 없다.
“아, 앉을래?”
그가 자리를 권하자 학생들의 시선이 쏠렸다. 신영은 명실상부 학교의 대장이었다. 주먹질로는 자신이 있다는 녀석들도 고이 허릴 숙였고, 그가 복도라도 걸어갈라치면 썰물처럼 갈라지는 경원의 대상이다. 그런 사람이 자기 자리를 권했다. 대상이 누군가 하여, 상실에게 시선이 닿았다.
그를 알아보는 아이들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고, 모르는 아이들은 저게 도대체 누군가 의구심을 가졌다.
“필요 없어.”
“그렇구나, 하하.”
매몰찬 거절에 신영은 무안함과 쪽팔림을 무마하기 위해 어색하게 웃었다. 대망신이었지만 어떻게 해 볼 엄두가 안 난다.
학생들 사이에선 둘이 친분이 있었나, 무슨 사이인가 궁금해 술렁였지만, 감히 크게 떠드는 아이는 없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내일이면 전교에 퍼질 것임은 자명했다. 신영은 학교에서의 위세가 꺾일 것을 예감했다.
그래도 다른 놈들은 기어올라 봤자, 도매금으로 떨어지기 싫은 친구들에게 걸러 내질 것이다. 그로선 상실만 조심하면 됐다. 상실만.
상실과 지현이 서점이 근처에 있는 정류장서 내리자 신영이 옆에 앉은 소녀에게 물었다.
“옆에 있던 애는 누구야?”
“장지현이라고, 일 학년 중에선 이쁘다는 계집앤데…….”
설명하던 그녀의 눈이 모로 뜨였다.
“왜, 한 번 들이대 보려고?”
소년은 손을 내저었다.
“아니, 건드렸다가 피 볼 일 있냐.”
소녀는 그럼 그렇지 하며 끄덕였다.
“바람피면 죽는다.”
“허이구, 마누라가 따로 없어요.”
말하면서도 신영은 조금 아쉬웠다. 저런 인재를 모르고 있었다니. 그렇지만 이젠 아쉬워도 늦었다. 입맛만 다실 수밖에.
대형 서점으로 들어간 상실과 지현은 하나하나 문제집을 골랐다. 사실 억지로 외우기만 하면 되는 과목이 대다수이기에 다른 것은 어렵지 않았는데, 수학이 난제였다.
“이 정도면 알아보겠어?”
중학교 삼 학년의 문제집을 들어 보여 주니, 상실은 고개를 내저었다. 다시 ‘이건?’ 하며 이 학년 문제집을 들어 주자 그제야 좀 알겠다는 얼굴이다. 하지만 썩 미덥지는 못했다. 하여 지현은 중학교 일 학년 문제집까지 더 얹어 줬다.
“일단 이거부터 차례대로 풀어.”
“좀 많은데.”
손에 차곡차곡 쌓여 가는 서적의 양에, 상실은 솔직히 기가 질렸다. 저걸 언제 다 푸나 감도 안 잡혔다.
“한 달에 세 권은 끝내야 돼.”
“뭐?”
이어진 소녀의 말에 상실이 말도 안 된다는 얼굴이다. 학교로 돌아오고 처음으로 보이는 모습에 소녀는 슬며시 미소 지었다. 지금껏 당하기만 했지만, 이런 식으로라도 굴욕을 갚아 줄 방도가 있었다니. 게다가 노리고 한 것도 아니고, 지가 자청해서 받은 거다. 하루 동안 쌓인 체증이 조금은 내려가는 것 같았다.
“가르쳐 달라며? 다들 이 정도는 한다고.”
정확히는 진도에 맞춰서 푸는 거지, 한 학기 분량을 통짜로 풀어내는 짓은 잘 안 한다. 시간도 부족하고, 갑자기 들이민다고 다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물론 그런 자세한 사정이야 말해 주지 않았다.
팔에 한 가득 놓인 문제집을 보며, 그 흔한 학원 한 번 못 가본 상실은 나름대로 납득해 버렸다. 학원에 가면 다들 이렇게 공부한다고 오해해 버린 것이다. 확실히 공부하는 애들은 이해도 빠르고, 성적도 좋게 나왔었다. 막연히 머리가 좋은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속에는 이런 미친 분량의 노력이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현실과 다르긴 하지만, 아주 틀리진 않은 생각이었다.
매우 싫었지만, 하기는 해야 할 일이었기에 소년은 비장한 표정으로 책을 내려놓았다. 그 행동에 소녀가 자신이 너무 많이 줬나 생각하고 있는데, 노트와 펜을 꺼내든 상실이 뭔가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뭘 적나 궁금해서 훔쳐보니, 가져온 책의 목록이었다.
“뭐해?”
“적어 놓으려고.”
“사면 되잖아?”
소년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소녀를 힐끔 보더니 책을 가리켰다.
“저걸 다 사라고? 돈 없어.”
이 거지 새끼. 속으로 돈도 없이 날 끌고 왔냐고 꿍얼대던 지현은 소년의 신발과 가방을 보고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낡은 데다 싸구려인 물건들이었다. 본 적은 없지만 옷도 크게 다르진 않을 거다. 교복도 좋아 보이진 않았다. 뚜렷이 뭐가 다르다곤 할 수 없었지만, 메이커 교복보다는 뒤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어쩐지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집도 가난하다던데, 문제집 살 돈도 없다. 거기에 운동도 못하고, 얼굴도 못나서 따돌림을 받던 아이였다. 그런 애가 한 달이 넘게 학교를 쉬며 뭔가 바꿔 보려고 운동도 하고, 공부도 해 보려 노력하고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지현은 새삼 상실을 다시 봤다. 그냥 무섭고, 싸가지 없는 녀석으로 알았는데, 굉장히 노력하고 있었다. 어쩌면 요즘의 세 보이는 모습도 이전의 자신을 감추려고 노력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그녀가 오해와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동안, 목록을 다 적은 상실이 문제집을 반 나눠서 건네줬다. 주기에 일단 받아든 소녀는 뭘 어쩌란 거냔 표정으로 눈만 깜빡였다.
“제자리에 놔야 될 거 아냐.”
심드렁하게 말하고 자기 몫을 정리하러 가는 꼴을 본 그녀는 팍 인상 썼다. 역시나 남 배려할 줄도 모르고, 재수 없는 자식이라 생각하며 주어진 문제집을 제자리에 돌려놓는다.
“나 이제 갈게.”
정리를 끝낸 지현이 이제는 정말 가야 된다는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상실로서도 그녀를 잡아 둘 필요는 없었다. 볼일도 다 끝났기에 가라고 말하려다가 생각난 것이 있어서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번호.”
“왜?”
반사적으로 말한 지현은 보나마나 뭐 물어보려 그럴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보게.”
역시나 예상 그대로의 답을 해 주는 상실에게 속으로 배려심 없고, 재수 없는 데다가, 싸가지도 없으며, 분위기도 없는 멍청이라고 욕하며 순순히 번호를 찍어 주었다. 요즘은 공짜로 떠넘기는 폴더폰이었다.
“수고했어.”
상실의 공치사를 받은 지현은 그제야 상실과 떨어질 수 있었다. 집으로 걸음을 옮기며, 소녀는 고등학교 입학하고 처음으로 남자와 단둘이 돌아다녔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이어서 남자친구도 아니고, 분위기라곤 쥐뿔도 없었다는 사실에 좌절했다.
꽃다운 열일곱의 어느 하루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보통 폭력배는 할 일이 없는 한량으로 생각하기 쉽다. 돈이 부족하면 목표를 점찍어 행패를 부리거나, 사업장 하나 차려놓고 돈을 벌어들이고, 부하들 끌고 다니면서 거들먹거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들의 삶도 바쁘다. 조직을 만들고, 부하들을 거느리며 위세를 떨기 위해선 합법이건 불법이건 돈이 필요하다. 당연히 조직의 보스는 부하들에게 돈을 쥐여 주기 위해 여러 사업을 벌여야 했다.
한 놈에게 한 달에 꼴랑 백만 원만 주더라도 열 명이면 천만 원이다. 그뿐인가, 보스를 위시한 간부들에게는 더욱 돈이 들어가고, 따로 체면유지 비용이나 동생들 용돈으로 쓰라고 던져 줄 금액도 필요로 했다. 거기에 차도 있어야지, 계집질도 해야지, 술도 먹어야 하지, 경찰이나 윗대가리들에게 잘 좀 봐달라고 뇌물도 줘야 하지. 큰일이 터졌을 때 뒷수습하는 비용까지 생각하면 돈은 아무리 벌어도 부족하다.
그런고로 일대의 거리를 주름잡는 라이온파는 여기저기 손대는 사업이 많았다. 일단 기반으로 깔아 놓은 것이 술과 여자장사다. 단란주점, 노래빠, 안마방 등등 들어오는 돈이 큰 업소들을 직접 운영하거나 술과 여자를 전담해 공급했다. 거기에 다른 술장사하는 가게들을 윽박지르고 협박해서 보호세를 뜯어냈다. 나이트클럽, 클럽에 관계된 이권에도 적극 개입함은 물론이고, 사채업도 벌인다. 틈틈이 대부업체에서 포기한 신용불량자들의 빚을 싼값에 넘겨받아 쥐어짜거나, 사설 경마, 하우스 운영도 해야 했고, 요즘 호황인 인터넷 도박 사이트도 여러 개 만들어 관리했다. 그 외에도 흥신소와도 연계를 두어서, 해결사 노릇도 해 줘야 했으며 높으신 분들이 원하시면 겁 모르는 놈들을 손봐 주거나, 아무도 모르게 세상 하직시켜 주는 등, 돈이 된다면 닥치는 대로 손대 왔다.
자연히 수익의 규모가 커졌고, 그를 따라 조직의 규모도 확장에 확장을 거듭했다. 이제는 직속 부하들의 숫자도 수십에 이르고, 용역 주듯 돈 주고 부리는 놈들까지 합하면 이백도 넘었다. 가히 전국적인 규모의 폭력조직이었다.
“후후.”
라이온파의 간부인 유호상은 새삼 과거를 떠올리며 추억에 젖었다. 지금이야 동생들에게 명령만 내리면 알아서 돈이 될 만한 구석을 찔러 자금이 굴러들어 오지만, 처음 이 바닥에 들어왔을 때, 그는 가진 거라곤 맨주먹뿐인 배고픈 건달이었다.
그러던 것을 두목과 함께 다치고, 피 흘리며 이만큼까지 올라섰다. 다른 조직을 무너트리고, 통합했다. 생면부지의 사람을 협박하고, 때리고 강탈해 가며 어렵게 올라온 자리다. 뒤를 돌아보면 재산과 가족을 빼앗기거나, 죽거나 폐인이 된 이들의 피와 원한이 가득했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그것들은 멍청한 패배자에 불과하다. 돈도 권력도 없어서 질질 짜기나 하고, 윽박지르면 겁을 집어먹고, 순순히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트릴 계약서에 서명이나 하는 먹잇감에 불과했다. 그런 머저리들의 사정까지 생각해 줄 거였다면 애초에 이 바닥에 발도 들이지 못했을 거다. 그랬다면 그 치들과 같이 삶에 길들여져 무력한 인생을 살았겠지.
호상이 진열장에 놓은 양주를 꺼내 잔을 채웠다. 이제 시작이다. 겨우 폭력배 정도에 머무를 생각은 없었다. 안 그래도 주식놀음으로 기업도 인수하는 동업자들이 생기는 마당인데, 자신이라고 뒤처질 수는 없지 않은가?
“장밋빛 미래를 위해.”
기분에 취해, 앞으로 펼쳐질 일에 대한 축배를 들 무렵, 뒤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