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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혼을 팔았다 1권(12화)
4. 둘째 날(4)


“들어와.”
술을 마시며 기다렸지만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상하다 생각하며 문을 돌아봤지만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설마 밖에 있는 놈들이 장난쳤나 생각도 해 봤지만, 그들은 호상의 경호를 위해 골라 낸 수족과 같은 자들이었다. 절대 이런 장난을 치지 않는다.
잘못 들었겠거니, 생각하며 고개를 돌리는데 두드리는 소리가 또 들려왔다. 이번엔 문이 있는 방향이 아니었다. 창문 쪽에서 들려온 소리다. 하지만 역시나, 아무것도 없었다. 순간 귀신을 떠올렸지만 호상은 코웃음 쳤다.
그런 게 있었다면 진작 자신을 잡으러 왔을 테니까. 옛날이라면 모를까, 요즘 같은 세상에는 귀신보다 사람이 무서운 법이다.
그 사이 또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지척이다. 창문과 반대편의 책상. 그가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는, 바로 앞의 책상에서 들려온 것이다.
호상은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진 것을 느꼈다.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실내의 공기가 서늘하다. 손아귀에 땀이 흥건해졌다. 바짝 긴장해서 쉴 새 없이 눈을 굴리는데, 귓전에 숨소리가 들렸다.
“똑똑.”
“누구야!”
벌떡 일어나 돌아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벽면의 시계만 째깍째깍 돌아가고 있을 뿐.
이를 악문 호상은 서랍을 열어 회칼을 꺼내 들었다. 몇 년은 손에 잡은 적이 없었지만, 손아귀에 착 감기는 감촉과 서늘한 칼날을 보자 마음이 안정되었다. 무슨 도깨비놀음인지 몰라도, 나타나면 포를 떠주면 될 일이다.
어디 나오기만 하라고 벼르고 있던 그는 조명을 받아 하얗게 번쩍이는 칼날에서 이상한 것을 보았다. 거울처럼 배경을 반사하는 칼의 옆면에 뒤의 풍경 사이로 시커먼 것이 서 있었다. 무심코 그림자라 생각했지만, 곧 의문이 일었다.
여기는 천장에 조명이 붙어 있는 실내다. 그런데 등 뒤로 그림자가 길게 늘어질 수 있나?
소름이 끼쳤다. 사람이라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떠올리지도 않고, 빙글 돌아서며 칼을 휘둘러 시커먼 것의 목을 베었다. 성공했다 생각하며 뒤로 물러서는 호상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분명 목을 베기는 했다. 하지만 손에는 아무런 느낌도 오지 않았다. 물을 가른 것 같은 기묘한 손맛에 찝찝해지는데, 정체불명의 상대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하하하!”
고막을 긁어 대는 불쾌한 소리에 그가 귀를 막으며 물러섰다. 힐끗 보니, 괴상한 불청객은 아무런 상처도 보이지 않았다.
“싱싱한 아저씨네.”
즐거워하며 상실이 다가섰다.
처음엔 검은 옷에 복면을 뒤집어쓴 사람이라 생각하던 호상은 다가오는 그림자의 형상에 바짝 긴장하며 슬금슬금 물러났다. 절대로 사람이 아니었다. 옷이라면 이음매나 명확한 굴곡, 복면 밖으로 드러난 눈이 있어야 했지만 앞에 있는 건 온통 검었다. 체형도 짐작할 수 없는 그림자의 형상이다.
“뭐, 뭐냐. 네놈은.”
“글쎄.”
상실이 고개를 갸웃했다. 과연 자신은 뭘까. 인간인가, 악마인가. 하지만 그런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지금 배가 고프고, 앞에 먹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보다.”
상실이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냄새가 났다. 푹 썩어 빠진, 이기적이고 추악한 영혼의 냄새가.
“당신은 무슨 맛이야?”
“무슨 개소리냐.”
덜덜 떨리는 손을 추슬러 회칼을 단단히 잡은 호상은 언제라도 밖으로 뛰쳐나가려 준비했다. 도대체 밖의 놈들은 뭐하느라 들어오지도 않고 있는지, 화가 치밀었다.
상실로선 이런 먹이는 처음이었다. 세 명밖에 선례가 없긴 했지만, 그를 본 인간들은 기겁하기 바빴다. 이렇게 맞서는 인간이 있을 줄은 몰랐다. 자신이 인간이었을 때, 이런 것을 봤더라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떨기 바빴을 것인데.
그렇지만 그런 점이 더욱 끌렸다. 미약한 능력으로 발악하는 꼴을 보고 싶었다. 있는 힘껏 저항하고, 그것이 통하지 않음에 절망하는 모습이 기대됐다.
“저항해 봐.”
상실이 소리도 없이 호상에게 접근했다. 미끄러지듯 정면으로 다가오자, 호상이 반사적으로 회칼을 휘둘렀다. 그것을 어린애 손목 비틀 듯 칼날을 잡아 빼앗는다. 간단히 칼날을 부러트린 그림자가 폐품이 된 칼을 뒤로 던졌다. 바닥에 부딪친 쇳소리가 방을 울린다.
호상이 경악하여 뒤로 물러났다. 이런 경우는 듣도 보도 못했다. 정말 귀신인가 생각하며 물러서는데, 그림자가 벽을 타고 다가와 멱살을 틀어쥐었다.
“저항해 보라니까?”
물리법칙을 무시하고, 벽에 붙어서 자신을 들어 올리는 괴물에 호상은 입도 벌릴 수 없었다. 이건 절대로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 이럴 수는 없었다.
“놔, 놔라. 이 괴물!”
상실이 발버둥 치는 남자를 집어 던졌다. 책상 위에 놓인 것들이 쓸려 나가며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집기와 뒤섞여 쓰러진 남자가 허둥지둥 그것들을 쳐내며 뒤로 기었다. 도저히 저항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형님!”
안에서 들리는 요란한 소리에 대기하고 있던 폭력배 둘이 들이닥쳤다. 어지러운 내부의 광경과 바닥을 기고 있는 호상을 본 그들이 즉각 회칼을 뽑아 들었다.
“무슨…….”
더 말하려던 그의 앞에 그림자가 나타났다. 말을 잊고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자들 중 하나의 머리에 손을 올린 상실이 손아귀를 움켜쥐었다.
퍽 하고 사람의 머리가 터진다. 살가죽과 피, 뇌가 뒤섞인 끔찍한 광경에 다른 하나가 털썩 주저앉았다.
“으악, 씨발!”
파편이 튀었는지 호상이 다급히 손으로 털어내며 그림자와 멀어지려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실은 죽은 폭력배의 몸에서 흘러나온 영혼을 한입에 삼켰다. 지금 바닥을 기어 다니는 인간보다 못했지만 이것도 꽤 괜찮은 맛이다. 하지만 부족했다. 비명과 공포를 얼마 맛보지 못하고 먹은 탓인지 아직 허기가 채워지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돌려 바닥에 주저앉은 인간에게 시선을 주었다.
“어, 어어어, 어어.”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지 초점이 풀린 눈을 한 그에게 팔을 뻗는다. 손끝에서 날카로운 손톱을 뽑아 후려쳤다. 단말마의 비명도 남기지 못하고, 한 인간이 찢어발겨졌다.
핏물이 분수처럼 솟구치고, 누런 뼈의 파편이 튀어나왔다. 갈기갈기 찢겨진 내장이 차가운 바닥에 쏟아져 허연 김을 토해 냈다.
그자의 영혼까지 잡아먹은 소년은 그제야 허기가 가셨다. 전신에 감도는 충족감에 흐뭇해하고 있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흐으, 흐이이.”
“그러고 보니.”
혼백이 나간 얼굴이 되어 한껏 웅크린 호상이 내는 소리였다. 상실이 성큼 다가섰다.
“댁이 아직 남아 있었지.”
“오, 오오, 오지 마!”
발작적으로 외친 그가 몸을 돌려 엉금엉금 도망가려 했지만 상실은 이미 그의 앞에 있었다.
“히익!”
경기를 일으키는 그를 가만히 보던 소년은 이제 배도 부르기에 굳이 잡아먹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아직도 그에게서 맛있는 냄새가 나긴 했지만, 배고플 때 먹는 밥이 더 맛있는 법이다.
“그럼 어떻게 할까.”
“살려 줘, 살려 주십쇼. 착하게 살겠습니다. 제발!”
호상이 바닥에 엎드려서 머리 위로 손을 올려 빌었다.
“뭘 잘못 아나본데.”
상실은 그의 손을 잡아 들어 올렸다. 고개를 숙이고 벌벌 떠는 호상의 고개를 잡아, 억지로 눈을 맞춘다.
“착하게 살 필요 없어. 악하게 살아. 지금보다 더욱 악하게. 응?”
“네, 네. 그러겠습니다. 더 악하게 살 테니 제발 목숨만.”
공포에 질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끄덕이던 그는 다음에 들려온 말에 부르르 떨었다.
“그래야 더 맛있어질 테니까.”
키득키득 웃은 상실은 그를 바닥에 던져 버렸다. 호상은 황급히 머리를 바닥에 붙이고 납작 엎드렸다. 저건 정말 귀신이나 악마였다. 맛있어지라니. 사람을 장난처럼 죽여 놓고 한다는 소리가 그런 것이란 사실에 더욱 두려웠다. 인육을 씹어 먹는대도 이상할 것 없다고 느껴졌다.
“그래, 돈은 있어?”
갑작스런 말에 놀란 호상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바닥에 처박았다.
“있습니다. 원하시는 대로 드리겠습니다. 아니, 다 가지셔도 됩니다.”
“그런 건 아니고.”
상실은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돈이 필요하긴 했다. 사야 할 것도 있고, 엄마에게 드릴 돈도 있어야 했다. 여차하면 훔쳐 오면 그만이었지만 추적당할 수도 있는 돈을 엄마에게 건넬 순 없는 노릇 아닌가.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돈을 무작정 엄마에게 줄 수도 없었다. 갑자기 큰돈을 가져다 드리면 정상적으로 벌어 왔다고 생각하기보다, 나쁜 짓을 벌였다고 생각하실 게 뻔하다.
돈을 만들 수단이야 많았지만 의심받지 않고 가져다 드릴 방도가 궁했다. 물론 그런 핑계쯤 시일을 둬서 적당히 생각하면 그만이다. 일단 이자에게서 착취해서 모아 두면 여러 이유를 대서 조금씩 보태어 드리면 된다.
그렇게 되면 사실 큰돈은 필요 없었다. 고등학생이 돈을 벌 수단이야 아르바이트가 고작이니, 많아 봐야 한 달에 백만 원 정도가 최대치였다. 하지만 상실로선 호상에게 쉬운 일을 맡길 생각은 없었다.
어떻게든 모을 수는 있지만 부담이 되는 금액을 정기적으로 요구할 심산이다. 감당 못 할 할당량에 허덕이며, 차츰 다가오는 파멸에 대한 공포로 미쳐 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감당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그럼 맛있게 잡아먹으면 그뿐이니까.
“일억을 마련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호상이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감사를 표했다.
“추적되지 않을 돈으로 통장에 넣어 둬. 내일 찾으러 오지.”
“예, 예. 꼭 마련해 두겠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호상이 침을 꿀꺽 삼켰다.
“매달 첫째 날마다 일억씩 만들어라.”
엎드린 그대로 호상은 눈을 굴렸다. 무리한 요구였다. 일억이라면 한 달에 벌어들이는 몫의 대부분이다. 투자비용이나 부하들과 보스에게 나눌 비용을 제외하면 그보다 다소 모자랐다.
“하루라도 어기면, 넌 죽어.”
경고를 남긴 상실이 그림자에 녹아들어 사라졌다. 호상은 그가 떠난 뒤로도 한참을 엎드려 있었다.



5. 한 달(1)


―지난 한 달간 벌어진 연쇄살인의 피해자가 또 한 명이 늘어, 스물세 명이 되었습니다. 이번 피해자는 사건이 일어난 건물에 주거하는 남성이었다고 합니다. 행적을 감춘 지 한 달 정도 되었다는 그는 건물의 한 방에서 썩은 냄새가 난다는 제보를 받고 방문한 건물주에 의해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습니다.
아침 뉴스 시간, 화면에 모자이크 처리된 사람이 나왔다. 음성이 변조된, 건물주 박씨가 증언했다.
―입주자들이 어디서 냄새가 난다고 해서 찾아가 봤어요. 어, 사실 그 사람이 월세 낼 날짜가 지나도록 소식도 없고 해서 찾아가 봤는데. 그 냄새 있잖아요? 썩는 악취라고 해야 하나. 그 냄새가 진동을 하는 거예요. 열고 들어가니까…….
“이게 몇 번째니. 불안해서 살 수가 있어야지.”
지현의 모친이 수저를 들다 말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사를 가든가 해야지, 원.”
출근을 준비하던 부친도 혀를 차며 나왔다. 아직 어린 지현도 저런 사건이 뉴스에 나올 때면 불안해졌다. 처음 몇 번의 신고가 들어왔을 때도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 여겼는데, 동네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이 열 건을 넘어가는 순간부턴 밤길이 무서워졌다.
기자의 말이 이어졌다.
―경찰은 해당 시신의 상처와 살해된 시기를 분석한 결과, 연쇄살인마에 대한 첫 신고가 들어온 시기에 벌어진 사건이라 발표했습니다.
화면이 바뀌어 목 아래만 촬영된, 경찰 제복의 남자가 보인다.
―이게 시신의 부패 정도로 보면, 살해당한 지 한 달은 된 걸로 추정됩니다. 에, 훼손 정도와 방식도 기존의 사건과 같은 종류고요.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 한 것처럼 난자된 흔적으로 보아, 동일범의 소행이라 짐작됩니다.
또다시 화면이 바뀌었다. 사건 현장의 모습이 비춰지고, 바닥에 말라붙은 시커먼 핏자국이 보였다. 모자이크가 되었다고는 하나, 본래 모습을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나 그만 먹을래.”
견디다 못한 지현은 수저를 놓고 일어섰다. 그녀의 어머니도 말리지 않았다.
“그래, 학교 잘 다녀와. 위험한 데 가지 말고.”
“나도 어린애 아니거든요?”
워낙 뒤숭숭한 요즘인지라 부모님의 걱정을 알고는 있었지만, 지현은 사춘기의 소녀답게 불퉁히 답했다. 자신도 몇 년만 있으면 성인인데, 어린애 취급당하는 것도 지겨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