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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혼을 팔았다 1권(14화)
5. 한 달(3)


점심시간, 상실은 음식냄새가 가득한 교실을 벗어나 건물 근처의 벤치에 앉아 단어장을 외고 있었다.
“야, 저 새끼. 이상하지 않냐?”
신영이 멀찍이서 훔쳐보며 말했다. 함께 있던 눈치 없는 소녀, 강다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봤을 때는 찌질해 보였는데, 지금은 장난 아냐.”
감탄하는 다혜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신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확실히 남자가 보기에도 잘난 놈이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자신보다 작던 놈이었는데, 이제는 올려 봐야 할 정도로 커 버렸다. 얼굴도 작아지고, 몸도 좋아진 데다가, 듣자 하니 공부도 열심이란다.
“좆같네.”
굉장히 이상하고 수상쩍었다. 듣도 보도 못하던 찌질이가 무단결석하다가 학교를 나온 뒤론 예전 모습을 찾아볼 수도 없을 만큼 변해 버렸다.
“말이 되냐. 사람이 무슨 대나무야? 한 달 만에 저렇게 자라게? 뭐 이상한 수술이라도 받은 거 아니야?”
“쟤네 집 가난하다지 않았어? 그럴 돈도 없을 텐데.”
“그럼 무슨 무술이라도 배웠나?”
“무술?”
소녀의 질문에 신영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왜, 내공 같은 거 쌓는 거 있잖아.”
“아, 무협지. 너 그런 거 보냐?”
“불만 있어?”
어째 비웃는 투로 말하자 신영이 눈을 흘겼다. 다혜가 으쓱이며 시선을 돌린다.
“아니, 너도 그런 거나 보고 있나 싶어서.”
“사람이 볼 수도 있는 거지!”
“누가 뭐래? 하여간 그게 어쨌다는 건데?”
신영은 시큰둥한 반응에 주저하더니 자신 없는 투로 말했다.
“거기서 보면 내공 쌓고 어쩌고 하면 키도 크고, 힘도 세지던데. 그런 거 아닐까 해서.”
“지랄을 해라. 지랄을.”
소녀가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이년이 왜 욕을 하고 지랄이야.”
발끈해서 말하니 소녀가 쌍심지를 켰다.
“씨발,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바락 외치자 다른 학생들이 시선이 몰렸다. 신영은 소녀에게 말하기도 싫은지 손사래 치며 구경하는 학생들에게 눈을 부라렸다.
“구경났냐? 눈 안 깔아?”
으르렁거리며 말하자 다들 황급히 고개를 돌린다. 신속한 반응에 소년은 그제야 자존감이 높아졌는지 으쓱였다. 그러다가 상실이 자신을 보고 있음을 깨닫고는 실없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상실은 무심하게 바라보다가 손에 든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재수 없는 새끼.”
안중에도 없는 행동에 신영은 본인에게만 겨우 들릴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좀스러운 행동이었지만 대놓고 말할 배짱은 없었다.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소녀가 그를 놓고 비아냥거렸다.
“가서 대놓고 말하지 그러셔? 천하의 오신영이 어쩌다가 이렇게 찌질해졌을까.”
“닥쳐, 좀.”
“싫은데? 안 닥치면 어쩔 건데?”
“아오, 이걸!”
주먹을 들었다가, 어디 때려보란 듯 얼굴을 들이미는 행동에 신영은 한숨을 쉬며 손을 내렸다. 정말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 버린 건지 모를 일이다. 이게 모두 저 이상실이란 놈 때문이다.
“하여간 수상해.”
“뭐는 안 수상하냐. 가서 외계인이냐고 물어보지 그러셔?”
“아니, 썅. 넌 저 자식 이상하다고 생각 안 들어?”
“뭐가? 키 크고, 잘생겨지고, 싸움 잘하게 되고, 공부 열심이 하는 거 말고 또 뭐?”
“아예 저놈한테 가서 사귀자고 해 보지 그러냐. 반했냐? 뻑 갔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다혜가 말끝을 흐리며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꼬아 댄다. 그 모습에 배알이 뒤틀렸지만 신영은 일단 참았다. 매우 불만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애인이라고 더 뭐라 했다가 삐치면 진이 빠진다.
“내가 저 새끼 점심시간마다 지켜봤거든.”
“그거, 뭐라고 하더라. 스, 스……. 그래, 스토킹! 스토킹 아냐?”
손뼉까지 쳐 가며 자랑스레 말하는 지혜에게 신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걍 조용히 있어라. 응?”
“하여간, 스토킹해서 뭐? 뭘 알아냈는데?”
무시하는 말보다 궁금한 것이 급했는지 소녀가 물었다. 소년은 못마땅한 눈초리로 말했다.
“내가 이 주일 동안 살폈는데, 저놈 매번 점심을 안 먹더라고.”
“뭐야, 그게 다야?”
잔뜩 기대하고 있던 다혜가 김빠진 얼굴이 되었다.
“돈이 없으니 안 먹나 보지.”
“아니, 멍청한 년아.”
“욕하지 말랬지, 개놈아!”
다혜가 길길이 날뛰자 신영은 그녀의 손을 잡고 인적이 드문 곳으로 빠져나갔다. 소녀가 끌려가지 않으려 악악거렸지만 힘을 이겨 낼 수는 없었다.
“아, 진짜. 조용히 좀 못하냐?”
“싫으면 딴 년이랑 사귀든가!”
창고 뒤편 수돗가로 온 그는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곤 다혜를 달랬다. 그녀가 진정하자 그제야 하려던 말을 꺼냈다.
“무상급식 알지?”
“어, 가난한 애들 공짜로 밥 주는 거?”
“근데, 그놈은 그것도 안 먹는다고. 집도 가난한 놈이 공짜 밥을 안 먹을 이유가 있냐?”
“쪽팔려서?”
“아오.”
“아오, 뭐?”
“됐다, 말을 말자.”
고개를 내저은 신영은 다시 한 번 주변을 살피다가 담배를 꺼내 들었다. 그가 라이터로 불을 붙이자, 불퉁해 있던 소녀가 눈치를 살피다 손을 내밀었다.
“나도 줘.”
“니 거 펴.”
“남자새끼가 치사하게.”
똥 씹은 얼굴로 구시렁거리던 신영은 치사하단 소리는 듣기 싫었는지 한 개비 건네주었다. 둘이 선생 몰래 담배 피고 있는 동안, 창고 뒤편의 그림자가 일렁였다.
신영과 다혜가 꽁초를 처리하고 사라진 뒤, 그림자 속에서 상실이 스르륵 모습을 드러냈다. 건물로 들어서는 신영을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던 소년이 혼잣말했다.
“귀찮은 놈이네.”
그간 시선을 느끼긴 했지만 밥을 먹는 것까지 지켜보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제거해 버릴까 생각도 들었지만, 분명 신영뿐만 아니라, 다른 학생들 중에서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놈이 있을 거였다.
“먹는 척이라도 해야 하나?”
억지로 먹고, 다시 토하는 일이 번거로웠다만 의심받을 일은 하지 않아야 했다. 결론을 내린 그는 단어장을 들고 교실로 향했다. 곧 수업종이 울릴 시간이다.

수업이 다 끝나고, 청소할 차례가 된 상실은 왜 이런 짓을 해야 하나 여기면서도 책상을 뒤로 밀었다. 주변이 지저분하고 불결해도 그에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다른 사람이라면 병에 걸릴 극한 상황이래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가 버려도 뭐라 말할 사람은 없었지만, 학교생활을 잘해야 어머니께 피해가 가지 않음을 알고 있기에 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 자란 성인이라면 잘못된 행동에 본인이 지탄을 받으면 그만이지만, 아직 학생의 신분이라면 부모가 손가락질받기 마련이다. 예전에 아버지가 없어서 그렇다는 날 선 소릴 들은 적이 있는 상실로선 다시는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런 탓에 상실은 단 한 번도 청소를 빼먹지 않았고, 그 때문에 아무도 청소를 빼먹고 달아나지 못했다. 물론 슬쩍 빠지려거나, 학원을 가야 한다며 빠지려는 아이들이 있었다. 후자는 지그시 바라보면 얌전히 청소에 가담했고, 전자는 자신도 하는데 감히 빠지려는 행태가 괘씸해서 일일이 잡아 왔다. 반항하려는 녀석들도 있었지만 멱살을 잡고 몇 번 흔들어 준 뒤론 알아서 기었다.
“다음은 뭐 할까?”
대부분 상실 때문에 억지로 청소하는 상황이었지만, 예외도 있었다. 지현을 비롯한 몇몇 여학생들이었는데, 이전까지와는 다르게 적극적으로 청소에 나섰다. 그 범위가 상실의 주변이란 게 문제였지만.
“너희는 빗자루 가져와서 쓸고, 너희는 대걸레 빨아 와.”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오는 지현과 여학생들에게 냉정히 지시한 소년은 빠르게 상황을 진척시켰다. 청소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최대한 빠르고 효율적으로 지시하고 행동했다.
얼마 되지 않아, 정리가 다 끝나자 소년은 가방을 멨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여학생들이 다가왔다.
“같이 가자.”
지현의 말에 상실은 인상을 구겼다. 본래 그는 하교라고 할 것도 없이 그림자를 통해 집으로 가 버리곤 했었는데, 언젠가부터 그게 힘들게 되어 버렸다.
시작은 지현이었다. 처음엔 또 부르면 어쩌나하고 부리나케 가 버리더니, 이제는 먼저 같이 가자고 다가왔다.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멋대로 끼어들었고, 그중 예쁘장한 아이들에 혹한 남학생들도 은근슬쩍 합류했다.
이 무리들을 따돌리고 그림자로 이동하는 일은 꽤나 무리가 따랐다. 하자면 못 할 것은 없지만, 분명 의심을 받게 될 것이다. 등교도 같이하자는 말이 없는 게 다행이었다.
“좋을 대로 해.”
떨쳐 내려는 생각을 포기한 상실은 단어장을 들고 하교에 나섰다. 곁에는 지현이 따라붙어 단어장을 보는 척, 상실을 훔쳐봤고, 다른 소년 소녀들도 저마다의 꿍꿍이를 지니고 뒤따랐다. 남들이 보기엔 영락없는 스터디그룹이다.
집 근처 정류장에서 내린 상실은 그제야 지현을 비롯한 학생들을 떨쳐 낼 수 있었다. 하지만 훤칠해진 외모로 인한 시선은 여전히 따라붙는다. 어디를 가도, 남녀를 불문하고 달라붙는 시선들은 귀찮음을 넘어서 언짢을 정도다.
며칠 전에는 누군가가 현관에 편지를 끼워 놓고 간 적도 있었다. 무시했지만 편지는 하루가 멀다 하고 현관에 끼워져 있었다.
“이건 또 뭐야.”
집에 당도한 상실은 혀를 차며 세 통으로 늘어난 편지들을 현관에서 빼냈다. 그중 하나는 바나나우유로 깔아 놓았다. 소년은 먹고 싶지 않았지만 냉장고에 넣어 뒀다가 엄마 드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주워들었다.
집으로 들어가 냉장고에 우유를 넣고, 가방을 내려놓으며 편지를 훑는다. 쓸모 있는 내용도 아니었다. 그의 이름도 모르는 여자들이 간지러운 소리를 늘어놓는 내용이었다. 전체적인 내용은 다 달랐지만, 하나 일치하는 것이 있다면 편지 말미에 송신자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써 놓고, 꼭 연락 줬으면 좋겠다고 써 놓은 정도다.
별로 어머니께 보여 드리고 싶은 내용은 아니었기에 찢어서 쓰레기통에 버린 그는 흘끗 시계를 보았다. 여섯 시 이십팔 분. 슬슬 식사하러 나가야 할 시간이었다.
사복으로 갈아입은 상실의 외모가 급속히 변하기 시작했다. 신장이 줄어들고, 얼굴의 형태가 뒤바뀌었다. 잠시 뒤, 소년은 흔한 인상의 평범한 성인남자로의 변이를 끝마쳤다.
혹여 훔쳐보는 사람이 있을까, 그림자를 타고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한 그는, 챙겨 온 대포통장을 들고 가까운 은행으로 향했다.
바로 오늘이 유호상이 일억을 입금하기로 약속한 날이다. 상실로선 넣어도 상관없고, 넣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그렇지만 되도록 호상이 입금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현금 자동입출금기에 통장을 넣고, 비밀번호를 입력한 상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화면에 보이는 통장의 잔액은 한 푼도 남아 있지 않았다. 새로 돈이 들어오기는커녕, 전에 입금되어 있던 일억마저 없었다.
“이거 참, 기대를 저버리지 않네.”
혀로 입술을 훑은 그는 들뜬 기분이 되어 은행을 나섰다.
상실은 개인적으로 폭력배와 사채업자를 혐오했다. 아버지가 살아생전 졌던 빚 탓이었다. 원래도 가난한 집이었지만 사채를 갚느라 가세가 더더욱 기울었다. 아버지의 보험금으로도 다 갚지 못해서 전셋집을 내놓고, 월세로 옮겨야 했다. 그러고도 다 못 갚아서 상실의 모친은 한동안 이를 악물고 일에만 전념해야 했고.
지금이야 다 갚았지만 그때의 원한은 아직도 가슴에 쌓여 있었다. 빚을 갚으라던 폭력배들의 행패도 기억한다.
그에게 있어, 남에게 들러붙어 고혈을 짜내는 것들은 벌레나 다름없었다. 환부에 악착같이 들러붙어 피를 빨아 대는 더럽고, 징그러운 거머리. 그런 것들은 가차 없이 짓밟아 터트려야 한다.
피와 내장을 쏟고, 비명을 지르며 용서를 구걸하는 인간들을 연상한 상실은 스산하게 웃었다.
분명 폭력배들의 간부에게 알아듣도록 경고를 했다. 굶주림도 해소하는 겸, 혹시나 잊지는 않을까 식사의 흔적도 남겨줬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나온다는 건 뭔가 믿는 구석이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무자비하게 깨부숴 주마. 깨어진 기대를 보며 좌절하고 절망해라. 그리고 절규하라. 나는 너희를 잡아먹을 것이니.
키득키득 웃던 그가 어둠에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