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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혼을 팔았다 1권(15화)
5. 한 달(4)


“오늘이 약속한 날 맞지?”
“예.”
라이온파의 보스, 백태환의 말에 호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사무실엔 태환의 직속 부하들 열 명이 앉아 있었다. 믿음직한 동생들을 흐뭇하게 보고 있던 태환은 불안한 기색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호상을 보며 혀를 찼다.
그가 아는 호상은 칼 맞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한 건달이었다. 자신이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할 정도로 충성심도 뛰어난 녀석이었다. 하지만 지금 모습에는 옛적의 당당함은 보이지 않았다.
“일선에서 물러났다고, 너무 몸 사리는 거 아니냐?”
“아닙니다, 형님.”
호상이 고개 저으며 말했지만 못미덥다. 자신도 있고, 조직원들도 깔아 뒀는데도 경찰이라도 들이닥칠 것처럼 좌불안석이었다.
“그놈은, 그놈은 사람이 아닙니다.”
호상이 주저하며 말하는 작태를 보자 열불이 뻗친 태환이 재떨이를 집어 들었다.
“이 새끼야!”
머리통을 내려치자 호상이 비명도 지르지 않고 쓰러졌다가 몸을 일으켰다. 깨진 곳에서 시작된 피가 주르륵 흘러내린다. 흐릿하던 눈이 독기를 되찾아 선명해진다. 그제야 조금 만족스러워진 태환이 재떨이를 탁자에 던져 놓았다.
“호상아.”
“예, 형님.”
호상이 상처를 수습하지도 않고 고개를 숙였다.
“우리는 건달이다.”
“맞습니다, 형님.”
“남들을 윽박지르고, 무섭게 해서 먹고사는 주먹패야. 그런데.”
말을 끊으며 뿌득 이를 간다. 태환의 반응에 호상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런 새끼가, 그것도 간부란 놈이 쫄아? 엉?”
말하다 보니 다시 노기가 치솟은 태환이 벌떡 일어나 호상의 가슴을 걷어찼다. 벌렁 자빠졌던 호상이 재빨리 일어나 꿇어앉았다.
“이 시발 놈아, 독기 빠진 건달은 그냥 병신이야, 폐물이라고! 근데 딴 놈도 아니고, 네가 이런 병신 짓을 하고 자빠져 있어?”
“죄송합니다, 형님.”
“병신 같은 새끼.”
한숨처럼 말한 태환이 의자에 앉으며 담배를 꺼내 들자, 호상이 재빨리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뿌연 연기를 뿜으며 태환이 말했다.
“그래, 뭐, 니 사무실에서 애들 둘이나 뒤졌으니 그럴 만하기는 해. 그래도 가오가 있지, 병신 둘이 죽었다고 네가 이딴 꼴이 되어야겠냐? 연장이라도 들고, 그 개새끼가 오면 담가 버려야 할 거 아냐. 안 그래?”
“……용태랑 신혁인 쓸 만한 놈들이었습니다.”
“뭐?”
호상이 토를 달자 태환의 얼굴이 흉악하게 구겨진다. 나이를 먹었어도, 한 조직의 수장다운 기세가 느껴졌다. 호상도 예전이라면 감히 그 앞에서 뻗대지 못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일전에 보았던 그 괴물. 그림자 같던 귀신을 본 뒤로는 태환도 그렇게 무섭지 않았다.
“제 밑에 애들 중에서도 고르고 고른 녀석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태환은 이놈이 무슨 말을 하는지 가만히 들었다. 아무리 폐물처럼 굴고 있다곤 해도, 한때 가장 신임하던 동생이었다. 어떤 말이 나오는지 정도는 들어 줘야 간부다운 체면도 사는 법이다.
“그런 놈들이 뭣도 못 해 보고 시체가 됐습니다. 형님은, 형님은 못 보셨으니 그렇게 말하실 수 있는 겁니다.”
“이 호로 새끼가.”
참지 못한 태환이 피던 담배를 뱉었다.
그 이야기는 태환도 잘 알았다. 백주 대낮에 호상의 사무실에 누군가 쳐들어와서 부하 둘을 살해하고, 그에게서 돈을 갈취했다는 말은 이미 조직 전체에 돌고 있었다. 조직원이 둘이나 죽었는데, 소문이 퍼지지 않을 리 없었다.
하지만 이 바닥에 있는 한 겁먹어선 안 된다. 없어도 있는 척, 남들을 겁박하고 행패를 부려서 먹고사는 조폭이 누군가에게 당해서 얌전히 상납한다면 이미 그 조직은 끝장이다.
겁 없는 신생조직이 치고 올라올 수도 있는 거고, 다른 조직들이 영역을 넘볼 수도 있다. 이미 간보는 놈들이 있었다. 한 번 체면이 무너지면 다시 세우기 힘든 게 이 바닥이다.
그걸 빤히 아는 호상이, 제일 신임하던 동생이 이딴 구질구질한 짓거릴 하고도 변명하는 꼴이 짜증났다. 당장에 회칼을 꺼내 쑤셔 버리고 싶었지만 그는 가까스로 스스로를 자제했다.
“너, 당분간 어디 가서 요양해야겠다.”
뒷전으로 물러나란 말이었음에도 호상은 개의치 않았다.
“한 방에 용태는 대가리가 터졌습니다. 골통이 터지고 뇌가 곤죽이 되서 바닥을 줄줄 흘렀다고요. 신혁이는 짐승한테 당한 것처럼 갈가리 찢겼어요! 그게 어떤 꼴이었는지 아십니까? 이 나이 먹도록 험한 꼴을 다 보고 산, 제가 못 견뎌서 토하고, 남몰래 파묻어야 했던 제가 어떤 심정이었는지, 형님이 아시겠습니까?”
“닥쳐라.”
점점 언성이 높아지는 호상을 보며 태환이 으르렁거렸지만, 호상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두 눈에 핏발이 선다.
“그놈은 괴물입니다, 사람이 아니라 악마예요! 형님도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놈이 오기 전에 빨리 돈을 내어주지 않으면, 크흑!”
“이 개새끼가.”
얼굴을 걷어차 말을 끊은 태환이 씨근덕거리더니,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이 새끼 어디다 처넣어.”
“형님!”
조직원들이 몰려와 팔을 잡아들자 호상이 몸부림치며 말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다 죽어요!”
“조용히 가시죠, 형님.”
“놔, 이 새끼들아. 안 놔?”
끌려 나가는 호상을 보며 태환은 담배를 꺼내려다 담뱃갑 째로 집어 던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이따위로 흘러가는지 모르겠다. 웬 미친놈이 살인을 저지르며 돌아다니는 탓에 수입도 줄고, 경찰이 거리에 그득해진 것도 모자라서, 간부 하나가 병신이 되다니.
“혀, 형님.”
“뭐.”
누군가의 말에 태환이 신경질적으로 답하다가 눈을 치켜떴다. 아직 호상이 밖으로 끌려가지 않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를 잡고 있던 둘도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장난하자는 거냐?”
호상이 손을 들어 태환을 가리켰다.
“와, 왔습니다.”
“오긴 뭐가?”
“뒤에…….”
“이 새끼들이 단체로 미쳤나.”
역정 내며 뒤를 돌아본 태환이 눈을 멍하니 떴다. 점점 입을 크게 벌린다. 그것을 내려 보고 있던 시커먼 형상이 히죽 웃었다.
“안녕하신가.”
태환이 벌떡 일어나 물러섰다. 호상의 말대로 인간 같지 않은 기괴한 몰골이었다. 귀신이나 악마라고 말하던 것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뭐, 뭐야, 이건.”
“그런 건 아무래도 됐어.”
상실이 태환을 지나쳐 스르륵 호상의 앞에 당도했다. 태환이 지니고 있던 회칼을 반사적으로 휘둘렀지만, 칼날은 무심히 통과할 뿐이다.
“으아.”
목전에 선 상실을 보며 호상이 바들바들 떨었다. 상실이 그에게 말했다. 성별도, 나이도 알 수 없는 괴이하게 뭉그러진 음성으로.
“너는 약속을 어겼어.”
“내, 내 탓이 아니야! 나는 주려고 했어, 했습니다!”
그도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호상의 얼굴에 화색이 띠었다. 하지만 이어진 말에 무참히 구겨졌다. 구원을 받았다가 나락에 떨어진 것처럼 절망이 그를 침식했다.
“상관없어.”
호상은 냉기가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앞의 괴물에게서 한 겨울의 냉풍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그가 덜덜 몸을 떨었다.
“하, 하지만.”
“사실 나는 돈에는 관심이 없거든.”
사무실 내의 모두가 움직이지도 못하고 둘의 대화를 주시했다. 상실에게서 느껴지는 괴이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감히 누구도 움직일 수 없었다.
“너는 무슨 맛일까.”
입이 길게 갈라지며 상어 같은 이빨이 드러났다. 호상이 경기를 일으키며 양팔을 잡은 그대로 얼어붙은 조직원을 밀쳤다.
“씨발, 비켜, 비켜!”
몸을 돌려 문을 열고 달아나려던 호상은 털썩 쓰러졌다. 어째서 쓰러졌는지 이해하기도 전에 고통이 닥쳐온다.
“으아악!”
다리를 본 그가 비명을 질렀다. 피가 콸콸 흘러나온다. 무릎 밑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예리한 뭔가로 잘린 흔적만이 보일 뿐이다. 다소 떨어진 곳에 잘려 나간 두 다리가 널브러져 있다.
“살려 줘, 제발.”
호상이 애원하며 뒤로 기었다. 그를 따라 핏줄기가 이어진다. 상실이 곁의 두 남자를 바라보자, 그들이 흠칫하며 물러났다.
“들어 봐.”
그가 손을 든다. 어느새 길게 뽑혀 나온 손톱이 흉악한 위용을 자랑한다. 그것으로 호상의 어깨를 찍는다.
“끼야악!”
새된 비명. 다른 때라면 계집애 같다면서 비웃었을 태환도 말이 없었다. 호상의 어깨가 몸통에서 뜯겨 나간다. 뼈와 핏물, 찢겨진 살 조각이 여기저기 떨어졌다.
“너희도 좋아하잖아.”
상실이 호상의 팔을 들었다. 하지만 아무도 호응하지 않았다. 끔찍한 광경과 호상의 비명에 압도되어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들고 있던 팔을 태환에게 던지자, 그가 기겁하며 몸을 뺐다.
“왜 이래? 재미없어?”
발치에 떨어진 부하의 팔을 경악하며 보고 있던 태환은 갑자기 귓가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흠칫 몸을 돌렸다. 어느새 그의 옆에 상실이 서 있었다. 쩍 벌어진 시커먼 입을 놀려 말한다.
“이런 게 너희들이 하는 일 아니던가?”
“이, 이런 게?”
태환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이런 건 자신들의 일이 아니었다. 행패를 부리고, 폭행하고, 협박하기는 한다. 심하면 다리에 공구리 쳐서 바다에 던져 버리거나 파묻는 일도 있기는 했지만, 이렇게 사람을 찢어발기는 일 따위, 한 적 없다. 만약 이런 짓을 벌인다면, 그건 이미 사람이 아니다.
“흐익, 히익.”
아직도 죽지 못한 호상이 경련을 일으키며 괴이한 신음을 지른다. 상실이 상관 않으며 말을 잇는다.
“공포를 주고, 비명을 듣지.”
순간 그의 몸이 태환의 곁에서 사라진다. 허공에서 생겨나듯 호상의 곁에 나타난 그를 보며 태환을 비롯한 조직원들이 몸을 떨었다. 괴물이다. 저건 진짜 괴물이다.
“그리고 결국엔.”
상실이 입을 쩍 벌린다. 사람을 통째로 집어삼킬 수 있을 만큼 벌어진 입은 비현실적이다. 태환은 지금의 광경이 악몽은 아닐까 생각했다.
“끄앗!”
덥썩 물린 호상이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고, 그것으로 끝났다. 가슴 위를 날카로운 이빨로 씹어 뜯어내자 넝마가 된 장기와 뼈마디가 혈흔과 함께 떨어졌다. 방 안 가득 피비린내가 진동한다.
죽어 버린 남자의 상반신을 퉤, 뱉어 낸 상실이 영혼을 틀어쥐며 웃었다. 그에게만 들리는 비명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목적한 바를 강탈한다.”
호상의 혼을 날름 삼킨다. 배 속으로 들어간 그것이 발버둥 치며 비명 지른다. 그러나 벗어날 수 없다. 그의 배 속에 들어간 영혼에겐 빠져나갈 길도, 구원받을 방도도 없다.
포만감 가득한 웃음을 흘리며 상실이 다시 태환의 곁으로 이동했다. 그자가 헛바람을 삼키며 주저앉는 꼴을 보며 말했다.
“너도 나와 약속을 하자.”
태환은 말을 들을 정신이 아니었다. 정말 악몽의 한복판에 떨어진 것 같았다. 하지만 생생하게 느껴지는 한기와 혈향, 방금 전까지 귓전을 울리던 비명은 지금이 현실임을 입증하고 있었다.
“그가 돈을 넣던 통장에 돈을 넣어. 오늘부터 시작이다. 매달 첫째 날마다 넣어야 해.”
태환이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상실이 말을 이었다.
“네가 넣어야 할 돈은 오억.”
“그런!”
퍼뜩 정신이 든 태환이 반발했다. 매달 오억이라니. 말이나 될 법한 소린가. 하지만 상대는 무자비했다. 어찌 되건 상관없다는 듯 단언했다.
“하루라도 늦거나, 한 푼이라도 모자라면 너는 죽는다.”
상실이 손을 들어 펼쳤다. 그러자 그 위에 검은 안개가 뭉글뭉글 생겨나더니 화살처럼 태환의 그림자로 날아가 박혔다.
“못하겠다면 도망가도, 숨어도 좋아.”
뚜렷하던 상실의 형상이 흐릿해지더니 사방의 그림자를 향해 스며들었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음에도 내부의 서늘한 분위기는 여전하다. 태환이 일어서지도 못하고 있을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 손을 벗어날 수 없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