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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혼을 팔았다 1권(16화)
6. 발단(1)


부스스 일어나 씻으러 가려던 지현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저기 엄마.”
“왜?”
식사 준비에 여념이 없는 엄마를 보며 우물쭈물하던 소녀는 심호흡을 했다. 혹시나 야단맞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하려던 말을 계속한다.
“저기, 나 좀 있으면 기말고사잖아.”
“그러고 보니, 그러네. 우리 공주?”
은근한 어조로 어머니가 말하자 지현이 지레 놀랐다.
“으응?”
“이번에도 자신 있지?”
“아, 성적?”
그러자 모친이 끄덕였다.
“밑에 집 시연이 엄마 있잖니. 그 아줌마가 자기 딸이 모의고사에서 전국 오 프로 내에 들었다고 얼마나 자랑을 하던지. 아니, 그런 거 아무리 잘해 봤자 실전에서 못하면 말짱 꽝이잖니.”
“그야 그렇지.”
지현은 건성으로 끄덕였다. 밑에 집 시연이란 아이도 고등학교 일 학년이다. 그 애 엄마와 자주 이야길 하는 것 같던데, 묘하게 경쟁심을 가져서 그런지 그 아이 말을 자주 들었다. 주로 성적이 어떻다는 이야기였다.
지현 스스로 공부를 잘한다고 생각했지만, 시연이는 정말 공부를 잘해서 늘 비교의 대상이 되곤 했다. 시연이는 몇 등을 했다더라, 어디를 갈 거라더라 등등. 제법 압박감이 생길 정도이긴 했지만, 뒤에 이어진 엄마의 말에는 늘 단서가 붙었다.
그런데 걔, 시집은 어떻게 간대니.
솔직히 말해서 시연이는 그리 예쁜 얼굴은 아니었다. 때문에 지현도 크게 경쟁심을 가지진 않았다. 속으로 공부라도 잘해야지, 생각할 뿐이었다. 나중에 화장을 배우거나, 꾸밀 줄 알게 되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그땐 지현도 하면 되니까 상관없었다.
“어쨌건, 이번에 잘 좀 해서 엄마 기 좀 살려줘. 알았지?”
“네에.”
아무래도 글렀다고 생각하며 씻으러 가려던 지현은 순간 번뜩이는 생각에 빙글 돌아섰다. 엄마를 설득할 좋은 방도가 떠올랐다.
“근데, 엄마.”
“응?”
“나 기말고사 준비 말인데.”
반찬을 꺼내던 그대로 말해 보란 듯 바라보는 엄마에게 지현은 큰맘 먹고 다 말해 버렸다.
“학원 안 가면 안 될까?”
“너 그게 무슨 말이야!”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한 것처럼 버럭 외치자, 뉴스를 보고 있던 아버지도 고개를 돌렸다. 지현이 당황하며 말했다.
“아니, 학교에 공부 잘하는 애가 있거든.”
“그런데?”
“걔는 혼자 공부하는데, 성적이 되게 좋단 말야. 그래서 나도 걔랑 같이 공부하려고.”
“잘해?”
“응. 전교 일 등이야.”
지현은 눈을 질끈 감고 거짓말을 했다. 사실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싸움으로는 학년을 막론하고 일등이긴 했으니까.
“남자야, 여자야?”
“……남자애.”
이것까지 거짓말하진 못하고 말하자 엄마가 의심스런 눈길을 보낸다. 이 말을 들은 아빠까지 합세하자, 지현은 이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카드를 꺼내 들었다.
“걔랑 공부하면 시연이보다 더 좋게 성적 나올 수 있어.”
“정말?”
어머니가 화색이 되어 말하자, 아버지가 피식 웃으며 티브이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귀는 모녀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럼, 걔가 얼마나 공부 잘하는데!”
소녀는 거짓부렁을 늘어놓으며 상실을 떠올렸다. 잘하기는커녕 가르쳐 줘야 할 판이었지만, 그 덕분에 공부의 이해가 쉬워지긴 했다. 시연을 못 이길 것도 없었다. 만약 못 이겨도 성적이 오르긴 할 거니까, 그땐 크게 책잡지 않으실 거란 생각도 있었다.
“너, 연애하려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아니, 아냐.”
의심을 거두지 못하는 엄마에게 도리질 치자,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큰 인심 썼다는 투로 끄덕였다.
“그래.”
“정말? 정말이지!”
“대신 성적 떨어지기만 해 봐. 아주 기숙사 학원이라도 보내 버릴 거니까.”
협박처럼 말했지만 지현은 상관치 않았다. 일단 허락을 얻었으니 된 거다.
“걱정 마시라니까요!”
후다닥 화장실로 달려가는 딸을 바라보던 여인이 남편에게 물었다.
“쟤 연애하는 거 같죠?”
“냅둬. 지 알아서 하겠지.”

“그러니까 이 학교가 맞다 이거지?”
“예, 맞다니까요. 교복 보세요. 똑같잖습니까.”
두 남자가 학교의 정문 앞을 서성이며 학생들을 훑고 있다. 한 장의 사진을 든 그들은 키가 큰 남학생이 나타날 때마다 연신 사진과 비교하기 바빴다.
“이번에도 아니네. 확실한 거야? 다른 비슷한 학교 아냐?”
“글쎄, 맞다니까요. 다른 사진들도 보여 드려요? 배경이 딱 이 동네라니까 자꾸 그러십니다.”
“그렇기는 한데.”
이십 대 청년의 말에 삼십 즈음으로 보이는 남자가 끄덕였지만 여전히 못미더운 기색이었다.
“그만한 녀석이 나타나면 확 눈에 띄기 마련인데 말야.”
“그렇죠. 어디서 이런 재목이 숨어 있다 나왔는지 모를 일입니다.”
청년이 끄덕였지만 사내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기색이었다.
“그거 합성 아니야? 어제 하루 종일 거리를 돌아다녔는데, 코빼기도 못 봤잖아? 물어봐도 본 적 없다는 말뿐이고.”
남자는 중소규모 연예기획사에서 일하는 치프매니저다. 실장의 직함을 달고 있기는 한데, 맡고 있는 아이들이 줄줄이 쪽박을 차서 회사에서의 입지가 상당히 좁아져 있었다. 어디 괜찮은 인재가 없나 물색하던 중, 밑에 데리고 있는 로드매니저가 대박이라고 가져온 사진 하나만 보고 직접 영입에 나서던 차였다.
정말 어디에 이런 놈이 숨어 있었나 싶을 만큼 훤칠한 키에 외모였는데, 이상할 만큼 소문이 없었다. 이런 녀석이라면 중학교 때부터 소문이 나도 진작 났을 법한데, 아무런 소문도 없다. 기껏 단서라곤, 댓글로 달린 어디서 봤다, 어디 학교 교복이다 정도.
몇 없는 정확하지도 않은 단서들을 자료 삼아, 여기저기 발품을 팔았지만 연신 허탕이었다. 이번만 네 번째다. 탐문에 나선 일수도 이걸로 이십 일 째였으니, 실장의 반응이 영 좋지 않은 것도 이해 못 할 건 아니었다.
“하여간 잡기만 하면 대박입니다, 이건. 연기, 노래 다 못해도 충분히 팔아먹을 수 있는 인재예요. 여차하면 모델만 시켜도 투자금은 뽑고도 남는다니까요.”
본인이 추천한 인물이기에 로드매니저가 열을 올려 설명했다. 그건 실장도 동감하는 바다.
“그렇기는 한데, 여기가 맞느냔 거지. 난 학교 앞은 거기가 거기 같은데.”
“보세요, 똑같잖아요!”
청년이 사진을 들이밀며 말했다. 박력 넘치는 기세에 실장도 주춤 물러났다.
“비슷한 거 같기는 한데, 그럼 왜 안 보여? 조금 있으면 학교 문 닫을 시간 아냐?”
“그건 저도 잘…….”
청년이 멋쩍게 머릴 긁었다. 과연 교문이 닫힐 시간이 되어서 그런지 학생들의 걸음이 점차 빨라지고 있었다.
“누구 하나 잡아서 물어볼까요?”
“진작 그랬어야지.”
멍청아. 시선으로 뒷말을 대신하며 실장이 앞으로 나섰다. 그러곤 대상을 물색했다. 적당히 까져 보이는 녀석이라면 신 나서 떠들 것이다. 마침 적당한 대상이 눈에 들어왔다.
“이봐, 학생.”
“예? 아저씨 뭐예요?”
지각시간이 아슬아슬하게 등교하고 있던 신영이 남자를 힐끗 보며 말했다. 불퉁한 어투에 아저씨란 말까지, 뭐 하나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사내는 이런 경우 애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여기서 일하는 사람인데.”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건네자 과연 눈길이 달라진다.
“에스지 엔터테인먼트? 아저, 아니. 형, 매니저세요?”
“매니저? 나도 봐 봐.”
곁에 있던 다혜가 빼앗듯이 명함을 가져가더니 놀란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우와, 이거 캐스팅이에요? 로드캐스팅? 신영이가?”
그러자 주위의 이목이 집중된다. 신영은 어깨가 으쓱해지는 느낌이었다. 하기야 자신이 뭐가 못났는가. 공부는 못하지만 키도 크고, 얼굴도 이만하면 잘생겼고, 몸매도 괜찮다. 나라고 연예인 못 할 것도 없지 생각하고 있는데, 실장이 웃으며 말했다.
“물론 학생도 괜찮기는 한데, 우리가 물어볼 게 있어서.”
옆의 로드매니저에게 손을 내밀자, 그가 잽싸게 사진을 내밀었다. 남자가 신영에게 사진을 보여 주며 물었다.
“혹시 이 학생 아나?”
그러자 신영의 안색이 해쓱해졌다. 뭔가 아는 눈치인데, 안색이 좋지 않아서 더 묻지 못하고 있자, 다혜가 끼어들었다.
“얘 상실이 같은데. 맞지?”
신영이 팔꿈치로 쿡 찔렀지만 소녀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이상실이라고, 일 학년에 유명한 애예요. 우와, 누굴 찾아왔나 했더니, 역시 얘였구나.”
주변에 못 박혀 있던 시선들이 일제히 뒤바뀐다. 그럼 그렇지 하며 교문으로 향하는 아이들을 보며, 신영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혹시 언제 등교하는지 알아요, 학생?”
“아뇨, 얘가 언제 학교 오는지는 다들 모를걸요? 언제 오는지도 모르게 등교해 있다던데.”
상실의 등교시간에 대한 건은 은근히 소문이 돌고 있었다. 워낙 유명인이 되어 버린 데다가, 등교한 뒤로는 지현이 곁에 붙어서 떨어지질 않기에, 등교할 때 함께 가 보려는 여학생들이 있었지만 아무도 그가 등교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실장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그럼 하교는?”
“그건 다른 애들이랑 같이 할걸요?”
“야, 가자.”
“쫌 기다려 봐.”
신영이 신 나서 떠드는 다혜에게 말했지만 소녀는 별로 함께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맘 상한 신영이 성큼성큼 먼저 가 버렸지만 아무도 붙잡지 않았다.
실장이 궁금한 것을 더 물었다.
“그런데, 이상실이란 학생 조용해요? 영 찾기가 힘들던데.”
“어, 뭐 조용하긴 하죠.”
그제야 다혜도 떨떠름한 얼굴이 되었지만 실장은 놔주지 않았다.
“혹시 수술받았다거나 그렇진 않아요?”
“그건 아닐걸요.”
혹여 성형수술이라도 받은 건 아닐까 걱정하던 그는 소녀의 말에 안도했다. 지금이야 성형수술이 연예계는 물론,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흔한 것이 되어 버렸지만, 그래도 자연미인이 이미지상 더 좋다. 기왕이면 청정한 재목이 더 좋은 점수를 받는 법이다.
“걔가 원래 왕따였는데요.”
“왕따였어요?”
생각 없이 말하던 그녀는 남자의 반응에 더 말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잠깐이다.
“한 달인가 그거 때문에 등교거부를 했었어요.”
“등교거부?”
들을수록 점입가경이다. 그가 사진으로 살펴본 대로면 키가 백구십 센티는 되어 보이는 데다, 잘빠진 근육질이다. 이런 몸으로 왕따가 되고, 등교거부를 했다? 상상도 가지 않았다.
“아니, 걔가 원래는 못생기고 조그맸는데요.”
“못생겼다고요?”
“저기, 실장님. 얘기 좀 듣죠.”
옆에서 지켜보던 청년이 자꾸 이야기의 맥을 끊는 것을 보다 못해 참견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실장이 더 얘기해 보라며 손짓했다.
“그런데, 다시 등교를 한 날에는 여드름이 없어져 있었대요. 자기를 괴롭혔던 애들도 다 힘으로 제압했는데, 어디서 무술 배우고 왔다는 소리도 있었거든요. 그리고 막 시간이 흐르면서, 애가 막 키가 컸어요. 아까 걔는 대나무 같다고도 했는데, 정말 엄청 자랐어요. 얼굴도 점점 잘생겨지고, 몸에 근육도 생기고.”
“……그 학생이 학교 나오기 시작한 지 얼마나 됐죠?”
“두 달쯤 됐나? 그럴걸요?”
“두 달.”
로드매니저와 치프매니저 둘 다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정말 사람이 대나무도 아니고, 갑자기 자라고, 얼굴이 변할 수가 있나 의문이 들었다. 이번엔 청년이 혹시나 해서 물었다.
“무슨 시술받은 거 같지는 않아요?”
“걔네 집 엄청 가난하고, 엄마 혼자 일한다던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