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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혼을 팔았다 1권(17화)
6. 발단(2)
“할 말 있어?”
아침부터 뭔가 말하려다 말다를 반복하는 지현을 보다 못한 상실이 먼저 물었다. 뭐가 문젠지는 모르지만, 거슬려서 공부에 방해가 될 정도였기에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지현이 배시시 웃는다.
“아, 저기 그게.”
소녀가 선뜻 말하지 못하자 상실이 힐끗 시계를 쳐다봤다.
“빨리 말해. 점심시간 십 분 남았다.”
지현은 속으로 멋대가리 없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나랑 공부 할래?”
“하고 있잖아?”
무슨 신소리냔 얼굴로 말하자 지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거 말구! 학교 끝나고서…….”
말을 하다 말고 부끄러운지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배배 꼰다.
“같이 공부 할래?”
소녀는 뭘 잘못 먹었냐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상실에게 손을 내저었다.
“그게 아니라, 이제 기말고사잖아. 너도 혼자서만 공부하면 성적도 잘 안 오를 거고.”
“그야 그렇지.”
상실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과 후엔 식사시간을 제외하면 집에서 얌전히 공부했지만, 모르는 게 있어서 막히면 도통 해결할 길이 없었다. 그런 건 따로 표시를 해 뒀다가 학교에 와서 물어보긴 했지만, 답답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모르는 것도 한두 개가 아니었다.
“너 학원 다닌다지 않았어?”
“그거 이제 안 가도 돼. 학원 안 가도 잘할 수 있거든.”
소년은 납득했다. 지현이야 확실히 공부를 잘하니, 학원을 가든 안 가든, 크게 상관은 없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무슨 생각인지는 눈에 훤히 보였다. 요즘 들어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 하고, 멀쩡히 다니던 학원까지 관두고 함께 공부하자는데, 눈치를 채지 못하면 사람이 아니라 곰이다.
이성으로 보지 못한다 뿐이지, 심미안까지 뒤바뀐 건 아니었기에 상실로서도 나쁘진 않았다. 사람들도 강아지를 볼 때, 더 예쁘면 좋아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청해서 공부까지 돕겠다는데 싫을 리 없었다. 다만 순순히 바라는 대로 끌려가기가 마뜩찮았다.
“그럼 어디서 공부하게?”
“으응?”
“엄마도 안 계시는데, 우리 집에서 할래?”
은근한 어조로 말하자, 지현이 당황했다.
“너, 너네 지, 집?”
지현의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집이라니, 남의 집에서, 그것도 부모님도 없는 데서 다 큰 남녀가 단둘이 공부라니. 공부가 될까? 무슨 짓을 하려고?
보이지 않게 밑으로 치맛단을 움켜쥐고 오만 상상을 펼치는데, 상실이 판을 깼다.
“역시, 집은 안 되겠지?”
“그, 그런가?”
어쩐지 아쉬운 기색으로 말하는 소녀에게 상실이 다시 난제를 던졌다.
“네가 정해. 어디서 할 건데?”
소녀는 방금 전의 여운이 가시지 않는지 붉어진 얼굴로 공부할 장소를 생각했지만 영 떠오르지 않는다. 자꾸 엉뚱한 생각만 떠오르고 있는데, 어느새 종이 울렸다.
“생각해 둬.”
상실이 책을 꺼내는 동안에도 지현은 멍하니 있었다. 교사가 들어와 수업을 했지만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야자 하자!”
“뭐?”
수업이 끝나자마자 지현이 대뜸 말했다. 모르는 걸 물어보려던 상실이 반문했다.
“야간자율학습?”
“응응.”
소녀가 웃으며 끄덕이는 모습이 강아지를 연상케 한다. 소년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지현이 조심스레 물었다.
“싫어?”
학교에 남아서 공부하는 일이야 예전이라면 죽어도 싫은 일이었겠지만, 지금으로선 집에 가서도 하는 일이 공부뿐이니, 상실로서도 크게 거부감을 가지진 않았다. 하지만 식사가 문제다. 학교를 나갔다가 와야 하는데, 그러자면 느긋하게 사냥감을 물색할 여유가 없다. 당연 음미할 시간도 부족하고, 바로 영혼만 집어먹어야 하는 수도 있었다.
“너 저녁은 어쩌고.”
“매점에서 사 먹으면 되지.”
재깍 말한 지현이 아차 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녀야 용돈이 넉넉하지만 상실의 경우는 집이 가난하단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저기, 돈 없으면 내가 사 줄까?”
“내 걸 니가 왜?”
매점이라 봤자, 소년의 입맛에 맞는 물건이라곤 없었기에 퉁명스런 답이 돌아왔지만, 소녀는 자존심 때문이라 오해했다. 상실이 얼마 전부터 급식을 먹고는 있지만, 그 전까지는 자존심 때문에 안 먹고 있었다고 생각한 탓이다.
“그래도. 밥 안 먹으면 공부도 힘들 거 아냐.”
“됐다.”
그 말에 지현이 전전긍긍한다. 이러면 학원을 관둔 보람도 없게 된다. 어떻게 설득해야 하나 고심해 보지만,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엄마를 설득하는 것보다 상실을 꼬여 내는 게 더 힘든 판이다.
어쩌다가 자기가 이렇게 되어 버렸는지 생각하던 소녀는 혼자 뭘 생각하는 소년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저 작은 머리하며, 큰 키에,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근육은 신이 내린 비율이라 칭해 마땅하다.
얼굴은 또 어떤가. 외까풀이지만 날렵한 눈매에, 여성스럽지도, 그렇다고 너무 남성적이지도 않은 우뚝한 코, 그린 듯 자연스런 입술과 깎은 듯 갸름하나, 어색하지 않은 턱 선까지.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르고, 잠시라도 떨어지면 남이 채 갈까 무서우리만치 이상적인 외모다. 비록 성격이 까다롭고, 무심하지만 무슨 상관이람. 잘생기면 모두가 매력으로 보이는 법이다.
“에휴.”
이미 콩깍지가 씌이다 못해, 알아서 코뚜레를 자청했음을 깨달은 소녀는 별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리 끌면 이리 끌려가고, 저리 끌면 저리 끌려가는 수밖에 없다.
“일단 야자는 하자.”
“어? 뭘 하자고?”
딴 생각에 파묻혀 있던 지현이 퍼뜩 놀라 묻자, 소년이 뭘 들었냐는 표정이다.
“야자 하자고.”
“어, 그래? 정말이지?”
“일단 담임한테 말하고.”
“그으래, 내가 갔다 올게. 기다려!”
벌떡 일어선 지현이 신 나서 교무실로 달려간다. 그걸 보던 상실은 따로 독서실이라도 등록할까 생각하다가 관뒀다. 저번 달에 라이온파에게서 뜯어낸 오억은 아직도 고스란히 통장에 들어 있다. 기말고사가 시작할 즈음이면 새로 오억이 들어올 것이니, 돈이야 충분하지만 그 돈은 자신의 돈이 아니다. 모두 어머니께 돌아가야 할 돈이다.
“빨리 연락이 오긴 와야 하는데.”
스스로 생각하기로도, 이만큼이나 뜯어고쳤으면 어딘가의 연예기획사에서라도 연락이 와야 했다. 티브이나 인터넷을 봐도 지금의 자신보다 나은 사람은 손에 꼽힐 정도였다.
빨리 연예인이라는 감투가 생겨야, 통장에 쌓아 둔 돈을 합법적인 척, 포장해서 어머니께 조금씩 빼다 드릴 수 있다. 그에게 연예인이란 직함은 합당하게 어머니께 돈을 드릴 수단 이상의 가치는 없었다.
“언젠가 오겠지.”
어떻게든 되겠거니 생각한 그는 교과서로 시선을 옮겨 골몰했다.
“얘는 왜 안 나와?”
“글쎄요.”
방과 후, 하교 시간이 되어 물밀듯 몰려나오는 학생들을 보며 에스지 엔터테인먼트의 두 매니저가 투덜거렸다. 무수한 아이들을 훑으며 이상실이란 녀석을 찾으려 쉼 없이 눈을 굴렸지만 아직 보이지 않았다. 지나가는 아이들이 이상한 눈초릴 보내오지만 둘은 꿋꿋했다.
“하교도 몰래 하는 거 아냐?”
실장의 말에 청년이 받았다.
“아까 그 여자애 말 들으셨잖아요. 하교는 친구들이랑 같이 한다던데.”
“아니, 그런데 왜 안 나오냐고.”
“청소라도 하는 거 아닐까요.”
실장이 인상을 구긴다.
“내가 학교 다닐 땐, 청소 튀는 건 기본이었는데. 거 참, 경우 바른 놈일세.”
“흠 잡을 게 없으면 좋은 거죠, 뭐.”
“아까 야자는 안 한댔지?”
“예, 예.”
아이들을 훑던 로드매니저가 실장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학교로 찾아가서 말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교무실이라도 가서 물으면 직빵일 텐데요.”
“내가 TV는 사랑을 싣고라도 찍고 있으면 가겠는데 말야.”
담배를 꺼내 들던 실장은 학생들을 보곤, 에이 하며 도로 품에 넣었다.
“학교에선 누구 연예인 시키려고 왔노라면 싫어해.”
“왜요? 학교 홍보도 하고 좋을 건데.”
“그거야, 이미 컨택됐거나, 학교 홍보가 필요한 곳이나 그렇지. 면학 분위기가 좀 되는 학교는 애들 공부에 방해된다고 싫어해. 내가 뭣도 모를 때, 교무실에 들이댔다가 깨져 봐서 알아. 아으, 그때 그 교감선생 얼굴만 생각하면 그냥…….”
바닥에 퉤, 침을 뱉은 실장은 손을 내저었다.
“그건 됐고, 애들이나 살펴봐. 놓치면 죽는다.”
“그래야죠. 하아.”
청년으로서도 며칠이나 학생들만 보다 보니 이제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이제는 그놈이 그놈으로 보였다. 어떻게 이 나라의 교복들은 하나같이 칙칙한 색에 디자인인지.
“어, 저기!”
“뭐, 뭐? 어디? 나왔어? 어디야.”
청년의 말에 남자가 두리번거렸지만, 어디에도 사진의 주인공을 보이지 않았다. 로드매니저가 바로 옆으로 다가와 대상을 가리켰다.
“저기 저 여자애 보이시죠?”
“어, 쟤가 뭐 어쨌다고?”
청년이 사진을 들어 그에게 보여줬다.
“이 녀석 옆에 있는 여자애 같은데요. 닮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가서 물어보자고?”
“그죠.”
실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뭐하고 있어? 가 봐.”
“옙.”
청년이 씩씩하게 여학생에게 가서 명함을 내밀고 대화를 시작했다. 그러더니 잠시 뒤에 떫은 표정으로 돌아온다. 실장이 물었다.
“뭐래?”
“야자 한다는데요?”
“아니, 이 자식이 정말! 우리가 온 걸 알고 놀리는 거야, 뭐야?”
분개하는 남자의 곁에서 멀뚱히 서 있던 청년이 물었다.
“어떻게, 가 보실 겁니까. 아니면 여기서 계속 기다릴까요?”
“쓰읍. 야자 언제 끝난대?”
“아홉시에 끝난다던데요.”
실장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저녁 먹고 오자.”
“저녁은 너 혼자 먹어.”
“어? 왜?”
상실의 말에 지현이 울상이 되어 반문했다.
“밖에 볼일도 있어.”
“그러지 말고, 같이 가자. 응?”
소녀가 콧소리까지 내며 말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보통의 소년이라면 귀여워서라도 같이 간다 했겠지만 상실은 단칼에 잘라 냈다.
“갔다 온다.”
무뚝뚝하게 말하고 교실 문을 나서자, 지현이 쪼르르 따라나섰지만 이미 소년의 모습은 복도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다.
“아, 진짜!”
그녀가 분통을 터트리는 걸 귓등으로 흘리며, 그림자에 녹아든 상실이 도심지로 향했다. 먹을 걸 찾을 시간이 부족하니, 최대한 빨리 돌아다녀야 했다. 전에 봐둔 조폭들도 있었다만, 그것들은 돈을 착취할 자금줄이니 당분간은 건드리지 않아야 했다.
번화가로 가는 중, 통학로와 어울리지 않는 두 남자를 본 그는 힐끗 쳐다보곤 제 갈 길로 향했다. 썩 맛있는 냄새가 나지도 않는 사람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