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나는 영혼을 팔았다 1권(18화)
6. 발단(3)


윤길상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달짝지근하고 값만 터무니없이 비싼 커피를 먹고 있자니 짜증이 치민다. 아기자기하게 꾸민 내부 인테리어는 오십을 바라보는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짜증나는 건, 바로 앞에 앉아서 예의 바른 척 찻잔에 입을 대고 있는 여자다.
최희승. 그의 전 아내이자, 이혼하고 지난 십 년간 얼굴 한 번 비친 적 없는 여자. 자식들이 찾아가도, 지금의 가족들에게 예의가 아니라며 매몰차게 쫓아낸 뱀 같은 심성의 여자다.
그런 것까진 아무래도 좋았다. 자기 벌이가 시원찮아서 갈라선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새 가족들에게 충실하겠다는 것도 이해 못 할 건 아니다. 이미 남편과 자식도 생겼으니, 더 이상 연관되고 싶지 않은 것도 좋다. 하지만, 하지만 이래선 안 되는 거다. 저 여자가. 자식도 다 내팽개치고 지 살길만 찾아서 떠난 여자가 이래서는 안 되는 법이다.
“그래서, 못 하겠다?”
“못 하는 게 아니죠. 이건 내 당연한 권리예요.”
찻잔을 내려놓으며 또박또박 말하는 전 배우자의 얼굴에 길상은 욕지거리가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저 뻔뻔한 낯짝에 커피를 뿌리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뭐가 문제죠? 나는 그 애의 생모예요. 그 돈, 당신만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라고요.”
여인의 말에 남자는 더는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섰다. 생모? 뚫린 입이라고 나오는 대로 막 지껄이나? 생모라고? 자식이 울며 찾아가도 얼굴 한 번 안 내미는 당신이 엄마라고?
“어떻게 그 말이 입에서 나와?! 당신이, 네가 양심이 있으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버럭 외치자 매장 내의 시선이 그들에게 쏠린다. 주위의 이목과 부들부들 떠는 길상을 번갈아 바라보던 희승의 눈길이 싸늘해진다.
“여전하군요.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소리부터 지르는 성미는.”
길상은 뿌득 이를 갈았다.
“그래도 당신보단 낫지. 애들 어찌 자라나 궁금해하지도 않고, 그 애 장례식 때조차 얼굴을 안 비친 당신보다는.”
“내가 대명이 장례식에 갔으면 얌전히 들여보내 줬을 것처럼 얘기하는군요? 보나마나 당신이 막을 거 아니었어요? 자식 버린 어미라면서? 그 꼴이 보기 싫어서 안 갔을 뿐이에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말하는 희승을 보며 길상은 올라가려는 손을 참아야 했다. 솔직히 참고 싶지 않았다. 감히 뻔뻔스럽게 죽은 아들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저 여자를 때려 주고 싶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도록 주먹을 꽉 쥐고 있던 그는, 치미는 노기를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참아야 했다. 문제를 일으키러 온 게 아니라, 저 여자를 설득하러 온 자리다.
“……당신도 알지만, 요즘 경기가 안 좋아.”
그가 자리에 앉으며 말하자, 희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죠. 안 그래도 시원찮은 일이었는데, 요즘 은 더 하겠죠. 그래서요?”
자존심을 찌르는 말에도 길상은 인내하며 말을 계속했다.
“그래, 내 벌이로는 남은 애들 먹이고 입히는 데도 모자라. 걔들도 학교는 다녀야지. 애들 시집 장가는 보내야 할 거 아냐.”
“대명이 보험금은 당신이 다 가져야겠다, 이 말이에요?”
“응. 그래. 당신도 알잖아. 내 사정.”
길상은 자존심을 죽이며 호소했다. 지금에 와선 방금 화냈던 것도 후회가 된다. 어떻게든 이 여자를 설득해야 한다. 아버지 돕겠다고 배달하던 대명이가 불의의 사고로 하늘로 가 버려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남은 두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선 돈이 필요했다. 생때같은 자식의 목숨값이 필요하다.
여인이 차가운 어조로 말한다.
“내가 왜요?”
“정말 이러기야?”
“그건 다 당신 탓이잖아? 벌이가 시원찮은 것도, 애들을 맡겠다고 한 것도 다 당신이 자청한 거잖아! 그걸 왜 이제 와서 나한테 그런 말 하는 건데? 내가 왜 이젠 남이나 다름없는, 당신이랑 그 애들 사정까지 봐줘야 하는 건데?”
희승이 두 눈을 부릅뜨며 언성을 높였다.
“내가 그 애를 낳았어. 당신이 공사판 전전한다고 소주 먹고 잠만 퍼 자고 있을 때, 나 혼자, 내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이야. 내게도 권리가 있어.”
“하지만 애들은! 영명이랑 지수는 어떡하라고!”
길상의 말에 희승이 웃었다. 심장을 찌르듯 차가운 조소에 가슴이 욱신거린다. 애 엄마란 사람이 어찌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그야 당신 사정이지. 이제 할 말 없으니, 가 보겠어. 나머지는 변호사랑 얘기해.”
희승이 일어나며 핸드백을 챙긴다. 길상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돼?”
“놔.”
두 손으로 길상의 손을 떨쳐 내며 그녀가 말했다.
“요즘 이 부근에 경찰이 많지? 더는 잡지 마. 난 당신 마누라가 아니라고.”
냉랭히 말하곤 휑하니 돌아선다. 또각또각 구두 소릴 남기며 떠나가는 그녀를 보며 멍하니 있던 길상이 털썩 의자에 앉았다. 바닥으로 숙인 고개가 올라올 줄 모른다.
“대명아, 대명아. 어쩌니, 어떡하면 좋니. 네 동생들은 어쩌면 좋겠니.”
한탄처럼 하던 말이 종국에는 흐느낌이 되어 버린다. 홀로 남은 남자는 울음소릴 내지 않으려 애쓰며 몸을 떨었다.
밖으로 나온 희승은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응, 나야. 일은 잘됐지.”
새 남편이었다.
“그 남자도 어지간히 끈질겨. 이걸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문단속 잘해야지. 변호사한테도 준비 철저히 하라고 그러고.”
통화하며 주차장으로 향한다. 인근의 다층 주차장의 내부는 아직 해가 떴음에도 어둑했다.
“괜찮지. 이제 내 애도 아닌걸. 그래도 가는 길에 효도라도 했으니 낳아 준 보람은 있네.”
눈동자 한 번 흔들리지 않고, 담담하게 얘기하는 그녀의 뒤로 검은 형상이 어른거린다. 하지만 희승은 눈치채지 못했다.
사십 대 중반의 여인을 뒤따르며 상실은 흡족하게 웃었다. 우연찮게 이런 먹음직한 식량을 발견하다니. 정말 운이 좋았다. 소리도 없이 먹이의 뒤를 따르며 방금 전 대화를 떠올린다. 사갈 같은 여자였다. 자식에게 이리 냉정한 어미라니.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고생하며 자신을 기른 어머니를 떠올리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마녀다.
하지만 그 덕분에 맛있을 것 같다. 썩은 영혼에서 진동하는 악취에 식욕이 샘솟았다.
입맛을 다시며, 아까 함께 있던 아저씨를 떠올린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 여자가 사라지면 그 사람은 좋아할까, 슬퍼할까? 내게 고마워할까? 하지만 상관없는 일이다.
누가 좋아하고, 싫어하기에 잡아먹는 게 아니라, 먹어야만 하기에 먹을 뿐이다. 자신이 누군가를 먹을 때마다, 관계된 누군가는 울고, 또 다른 누군가는 웃겠지. 그뿐이다.
남들의 사정 따위, 소년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요, 그럼 있다가 집에서…….”
그녀가 차 키를 꺼내며 작별인사를 하려는 순간 시커먼 손을 뻗어 잡는다. 무력한 인간의 몸으론 저항조차 못 하고 딸려 올 따름이다.
“끼약!”
놀라 비명이 들리지만 상관없다. 감시카메라가 있다만 무용지물이다. 카메라에 찍힌 걸 보고 뭘 어쩔 건가? 그림자가 사람을 납치했다고 수배라도 내릴 텐가?
상실이 음험하게 웃었다.
사방에 깔린 경찰도, 감시카메라도 소용없다. 그런 건 사람을 잡을 때나 쓸모가 있는 거지, 인간을 벗어난 자신을 잡기엔 모자라다.
품에 안은 여자를 내려 본다.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떠는 여자는 가련해 보이기도, 가증스러워 보이기도 하다.
어쩐지 놀려 주지 않고는 배길 수 없다. 목소리를 변조한다. 성년 즈음의 남자의 음성으로, 누군지 알아볼 수 없도록 웅웅 울리게 바꾼 목소리로 말한다.
“엄마.”
그녀의 두 눈이 커진다.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떼자, 가느다란 음성이 들린다.
“대, 대명이니?”
“엄마.”
히죽 웃으며 연기를 계속한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굴리는 모양이 우습다. 한껏 웃어젖히고 싶다.
“왜 나를 버렸어?”
“아, 아냐. 대명아.”
당황하여 고개를 젓는 여자를 비웃으며 말을 잇는다.
“왜 이제서야 나를 찾았어? 왜 내가 죽은 뒤에야 찾아왔어?”
“아니야, 대명아. 아니야. 엄마는, 엄마는…….”
“돈이 필요했어? 그랬어? 내 목숨값이 필요했던 거야?”
“어, 엄마는. 그게 아니고…….”
어쩔 줄 몰라 하며 변명의 말을 궁리하는 모양새가 웃기다. 가증스럽다. 상실은 본 적도 없는 대명이란 남자를 떠올리며 실소했다.
너는 불행한 놈이구나. 지독하게 불행한 놈이야. 네 엄마는 네가 필요 없단다. 네가 죽어야 필요하댄다. 네 피가 묻은 돈만이 필요한 뿐이란다.
“내가 죽어야 효도하는 거야?”
희승은 더는 말하지 못했다.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들의 유령이라니. 기절할 것만 같다. 전신을 옥죄는 한기에, 심장이 멎을 것 같은 두려움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떻게 죽은 애가 돌아올 수 있지? 어떻게 내가 한 말을 들을 수 있지? 죽으면 끝이 아닌가?
“내가 죽어야만 했냐고!”
연기를 하다 보니 흥이 오른다. 버럭 외치자 쩌렁쩌렁한 울음이 퍼진다. 인접한 차량의 유리창이 깨지고, 감시카메라마저 버텨 내지 못하고 고장 난다. 고함에 놀란 바람이 사방으로 달아났다. 밖에서 놀란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고, 주차장 관리인이 달려온다.
“대, 대명아. 대명아, 제발.”
점점 강하게 옥죄어 오는 팔에 여인이 사정했다. 하지만 상실은 전혀 봐줄 생각이 없었다. 화가 치밀었다. 이런 것도 어미란 말인가? 자식을 상관도 않고, 그 보험금이나 타 먹으려 악을 쓰는, 이런 게 어미라고?
쓰레기, 벌레나 다름없던 자신을 먹여 살리려고,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고된 일을 하시고도, 웃는 얼굴로 밥은 잘 먹었냐고 물으시던 엄마가 떠오르자 분노는 주체할 수가 없다.
너는 어미가 아냐. 너는 엄마란 말을 들을 자격이 없어.
“세상에!”
“꺄앗!”
어느새 몰려든 인간들이 보인다. 상실은 천천히 그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품에 꼭 안고 있는 여인을 그들에게 공개했다.
“죽어.”
나직이. 그러나 단호하게 선고를 내리다. 그 의미를 알아듣지 못한 희승이 비로소 깨달아 뭐라 말하려는 순간 칼날이 솟아오른다. 상실의 전신에서 무수한 발톱이 불쑥불쑥 치솟아 여인의 몸을 찔러 꿰뚫었다.
“어억.”
힘없는 비명이 끝나기도 전에 상실이 몸을 활짝 펼친다. 그러자 몸에서 돋아난 발톱들이 몸뚱이를 찢어발겼다. 피보라가 인다. 안개처럼 뿌옇게 일어난 붉은 물결 사이로, 잘려 나간 사지육신이 튀어 나갔다.
“꺄아앗!”
비명이 잇달아 일어났다. 구토하고 기절하는 인간들의 틈바구니에서, 못 박힌 듯 서서, 부릅뜬 눈으로 모든 상황을 지켜보는 한 남자가 상실의 눈에 들어왔다.
길상이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는 얼굴로, 한때 아내였던 여자의 파편을 바라보던 그는 멍한 눈으로 상실을 바라봤다. 거기에는 감사도, 증오도 없었다.
“흐.”
죽어 널브러진 시체 위로 떠오른 영혼을 잡는다. 그것을 삼킨 상실의 형상이 그림자에 스며들었다. 얼마쯤 지나자,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기분 좋은 일 있어?”
공부를 하다 말고, 지현이 물었다. 나갔다 돌아온 상실이 기분이 좋아 보이기 때문이다.
“굉장히 맛있는 걸 먹고 왔거든.”
“아, 그러세요?”
혼자 밥을 먹어야 했던 지현은 입을 삐죽거렸다.
엄마를 설득하고, 상실을 설득하고, 담임까지 설득하는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얻어 낸 야자는 별 볼 일 없었다. 상실은 공부하다가 모르는 게 있으면 질문할 뿐이고, 그 외의 대화는 없었다.
자습 분위기도 그렇다. 떠드는 아이 없이 팔랑팔랑 종이 넘기는 소리와 사각사각 필기하는 소리만 들렸다. 교실에서 하는 야자이기에 본래는 이보단 시끄러웠지만, 이 조용한 분위기는 모두 상실 때문이다. 수다를 떨던 아이들도 그의 눈길만 닿으면 입을 꾹 다물었으니, 시끄러울 수가 없다.
“이 반은 조용하네?”
문이 열리며 감독교사가 고개를 내민다. 다른 반과는 전혀 다른 면학 분위기에 흡족하게 웃으며 끄덕이더니, 상실과 지현을 바라본다.
유일하게 남녀가 쌍으로 앉아 있기에,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짓궂은 얼굴로 둘의 곁을 스쳐 가며 한 마디 한다.
“연애하지 말고, 공부해라, 공부.”
“선생님!”
지현이 외치자 교사는 하하 웃으며 뒷문으로 퇴장했다. 얼굴을 붉히며 뒷문을 바라보던 그녀는 상실이 아무 말도 안 했음을 깨달았다. 힐끔 내려보니, 그는 멀뚱히 소녀를 바라보다가 공부에 전념한다.
싫지 않은 건가? 이거, 은근히 인정한 거지?
조용히 자리에 앉으며 또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암묵적인 동의라는 생각이, 상상을 거쳐서 사귀기로 결정 났다는 것까지 바뀌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로 되지 않았다.
“여기 말이야.”
“아, 응. 모르는 거 있어?”
상기된 얼굴을 감추지도 못하고 앉은 소녀는 소년의 얼굴을 힐끔 보곤, 내심 미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