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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혼을 팔았다 1권(19화)
6. 발단(4)
남들에게는 지루하고, 지현에게는 즐거웠던 야간자율학습이 끝났다. 아홉 시가 되기도 전에 책가방을 짊어진 아이들은 정각이 울리는 순간 뛰쳐나가기 위한 준비를 끝마쳤다. 그 와중에도 책을 잡고 놓지 않는 상실을 이상한 생물 보듯 시선을 던진다. 물론 대놓고 바라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집에 가야겠네.”
아홉 시 정각까지 초를 다툴 때가 되어서야 상실이 일어나자, 지현도 아쉽다는 얼굴이 되어서 일어났다. 가방을 든 소녀가 주저하다가 말을 꺼낸다.
“시간이 늦었지?”
“그렇네.”
교과서와 문제집을 쓸어 담아, 두둑해진 가방을 메며 소년이 끄덕였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집에 가는 건 오랜만이었다. 이전에 강제로 야자 때 붙잡혀 있던 것도, 등교거부를 하게 된 뒤론 없었으니까.
“요즘 연쇄살인마가 극성이라는데.”
소녀는 요즘도 쉬지 않고 나오는 살인마에 대한 뉴스를 떠올리며 말했다. 보통 약자를 노리는 살인범들과 달리, 신체 건강한 남자부터 노인까지, 남녀를 가리지 않고 범행을 저지르는 탓에 전국의 뉴스는 불이 났다. 오죽하면 도시에 수십의 기자들이 상주하고 있을 정도다.
다행이라면 어린 사람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 정도였는데, 이는 어느 정도 사실과 맞아떨어졌다. 일부러 안 노린 게 아니라, 어린 나이에 영혼까지 썩을 만한 인재가 아직까진 없었기에 노려지지 않은 게 진실이었지만.
“그렇다더라.”
상실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남다른 반응이 기묘할 법했지만, 쇠 컵도 진흙처럼 구겨 버리던 괴력을 떠올린 지현은 납득했다. 모르긴 몰라도 그 살인마도 상실에게 걸리면 한 주먹이라 믿었다.
“응, 여자 혼자 다니기엔 밤길이 험하잖아.”
“그런가?”
소년이 으쓱였다. 요즘엔 남녀를 막론하고 밤에 나다니는 사람이 적었다. 예의 살인마 뉴스 덕분이었는데, 그로 인해 밤에 장사하는 상인들은 매상이 줄었다고 울상이었다. 그들도 경찰만큼이나 살인마가 잡히길 바라고 있을 터였다.
시큰둥한 상실과 달리, 지현은 속이 타들어 갔다.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아까부터 바래다 달라는 말을 돌려서 하고 있음에도 반응이 없다. 그냥 공부 가르쳐 줬으니까 집까지 데려다 달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랬다간 더도 덜도 아닌, 공부 가르쳐 주는 애로 낙인찍힐까 봐 말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던 상실이 물었다.
“뭐, 문제 있어?”
“아아니.”
차마 자기 입으로 데려다 달라는 말은 못하고, 힘없이 답한 지현의 자세가 축 늘어진다. 상실이 앞장섰다.
“그럼 가자. 너희 집 어디야?”
“어? 우리 집?”
시든 화분에 물을 준 것처럼, 지현의 안색이 살아난다.
“덕분에 수월히 공부했으니, 집에는 바래다줘야지. 가자.”
“응!”
지현이 헤실거리며 상실의 곁에 붙었다.
함께 걸으며 상실은 잠시 지현을 바라봤다. 조금이나마 고맙기는 했다. 처음에야 너 잘 걸렸다 싶어서 억지로 공부를 가르치도록 위압했지만, 지금이야 자기가 나서서 알려 주는데, 고맙지 않을 리가 없다. 가르쳐 주는 것도 전보다 일취월장해서 귀에 잘 들어온다.
지금 잘해 주는 것이 외모 탓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인간이란 본래 그러기 마련이다. 이전의 자신만 해도, 예쁜 여자라면 갖가지 망상을 벌이기도 했고, 지현을 비롯한 다른 여자애들과 말이나 한 번 해 봤으면 바랐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예쁜 것보단 먹음직한 여자가 좋다. 남자도 좋다.
그 외에도 배웅해 주는 이유가 더 있다.
인간은 나약하다. 그중에서도 여자. 또 그중에서도 덜 자란 소녀의 연약함은 말할 것도 없다. 상실 본인을 언급할 것도 없이, 신체 건강한 남자라면 지현 같은 여자애를 제압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여자 홀로 밤길을 걷는 건, 치안이 좋다는 대한민국에서도 지양해야 할 행동이다. 앞으로도 공부를 배워야 할 입장인 그로선 지현에게 하자가 발생할 일을 사전에 차단함이 옳았다.
또 다른 것을 말하자면, 그가 악마와 계약한 지 아직 두 달이 안 되었다. 하지만 뉴스에서 보도하는 피해자의 수는 벌써 육십을 넘어섰다. 보통 하루에 한 명. 어쩌다 양이 차지 않으면 두 명을 먹어 치우는 수준이니, 누군가 그의 탓으로 돌려 무임승차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괘씸하면서도 입에 침이 맴돌았다. 인간인 주제에, 인간이 아닌 내 흉내를 내다니. 어지간히 미친 작자임에 분명하다. 아직까지는 잘도 걸리지 않았다만, 과연 그 맛은 어떨까?
낮의 기분 좋은 식사로 굳이 먹지 않아도 되지만, 그런 만찬이라면 무리해서라도 먹어봄 직하다. 내심 그놈이 나타나진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으며 교문을 나서는데, 낯선 남자 둘이 앞을 막아섰다.
“저기 나옵니다.”
로드매니저가 지친 낯으로 말하자, 실장 역시 좋지 못한 안색으로 교문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감탄했다.
“이야, 인물은 인물이네.”
“그렇죠? 사진이 실물보다 못 나온 건, 저도 오랜만이네요.”
청년의 말에 남자가 동감을 표했다.
“잘 생기긴 정말 잘 생겼는데! 뒤에서 후광이 비추는 것 같지 않아?”
“이럴 게 아니라, 얼른 접선해 보시죠.”
몸이 단 로드매니저의 말에 실장이 끄덕이며 앞장섰다. 최대한 그럴듯한 걸음으로 다가서던 그는 상실과 눈을 마주한 순간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쩐지 섬뜩한 느낌에 더는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누구세요?”
지현이 상실에게 바짝 붙으며 대신 묻자, 함께 긴장하고 있던 청년이 애써 웃으며 명함을 내밀었다.
“저는 이런 데서 일하는 사람인데요.”
그의 어투도 조심스럽다. 상실의 눈치를 살피며 명함을 내밀자, 지현이 받아들곤 호들갑이다.
“에스지 엔터테인먼트래!”
그녀에게서 명함을 받아 들어 읽어 본 상실은 두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죠?”
말하면서도 소년은 올 게 왔다고 생각했다. 혹시나 지현을 찾아왔을 수도 있지만, 객관적으로 보자면 그보다 자신을 찾아왔다고 생각함이 옳았다.
“이상실 학생 되죠?”
“네.”
기세가 많이 누그러졌다 생각한 청년은 최대한 좋은 인상을 남기려 애썼다. 과연 학교 전체를 먹었다더니, 위압감이 상당하다. 이런 느낌은 조폭들을 마주하고서도 몇 번 겪은 적 없었다.
“저희 회사에서 이번에 신인을 발굴하고 있던 차에, 학생의 사진을 봐서요. 연예인이 되려는 의향이 있는지 알아보려 왔습니다.”
“흐음.”
그의 말을 건성으로 들으며 명함을 살피던 소년은 옆에 있는 삼십 대의 남자를 보며 물었다.
“저분은 누구시죠?”
“아, 이쪽 분은 저희 실장님이십니다. 회사에서 여러 연예인들과 매니저들의 관리를 맡고 계시는 분입니다. 이번에 상실 학생의 사진을 보시고, 직접 보시겠다고 오셨습니다.”
어색하게 있던 실장이 그제야 표정을 피며 손을 내밀었다.
“하하, 반갑습니다. 이거 실물로 보니, 더 미남이네요. 에스지 엔터테인먼트의 치프매니저, 성동길이라고 합니다.”
“이상실입니다.”
동길은 소년과 악수하며 흠칫 표정이 굳었지만 재빨리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했다. 사람의 체온이라기엔 너무 낮았다. 체질이라 넘기기에는 지나칠 정도다. 뭐하는 녀석인지 호기심이 치밀었지만, 일단은 구슬리는 게 먼저다.
“솔직히 말하자면, 상실 군을 저희 회사로 영입하고 싶습니다. 시간 될까요?”
아침부터 기다렸다, 이 자식아.
그가 속으로 뒷말을 삼키자, 상실이 옆의 지현을 가리켰다.
“오늘은 안 되겠는데요. 얘 집에도 바래다줘야 하고, 시간도 늦었으니까요.”
슬슬 어머니가 퇴근할 시간이다. 대충 보아하니, 어떻게든 계약을 맺고 싶은 눈치기에, 그로선 급할 게 없었다. 기다리다 보면 다른 기획사에서 올 수도 있는 거고, 아니라도 급한 사람이 먼저 조건을 제시해 오는 법이니까. 명함은 받아 뒀고, 가능성은 확신했다. 통장의 돈도 태환이 죽고 싶지 않고서야 어디로 도망가지 않는다.
“하기야, 부모님이 걱정하시겠군요. 그럼 언제 따로 만나서 이야기할까요? 이건 제 명함입니다.”
“난 괜찮은데.”
실장의 명함을 건네받는 걸 보며, 지현이 작게 말했다. 방해되는 것 같아, 영 기분이 안 좋았다. 하지만 소년이 그 말을 무시하며 동길에게 작별을 고한다.
“연락드릴게요.”
“예, 어머니와 상의 끝나면 언제라도 전화주세요.”
하루 종일 기다려서 명함만 건네고 헤어지게 되었지만, 동길은 표정을 관리하며 물러났다. 경탄과 부러움의 시선을 보내는 학생들의 사이로, 상실과 지현이 버스에 오르는 걸 보고 있던 실장이 담배를 꺼내 들었다.
“후우.”
“다루기 어려울 것 같은 녀석인데요.”
로드매니저도 눈치를 보며 담배를 입에 문다. 먼저 연기를 뿜어낸 동길이 말했다.
“영아.”
“예?”
“저거 잡긴 잡아야겠지?”
영이라 불린 청년이 끄덕였다.
“아무렴요. 싸가지가 없어 보이긴 하지만, 어떻게든 잡기만 하면 중박은 칠 겁니다. 잘만 구워삶으면 대박도 될 수 있는 인재예요. 보셨잖아요?”
“그야, 그렇긴 한데.”
남자가 필터를 씹으며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었다.
“좀 위험한 놈 같지 않아? 분위기가 쎄하니, 좀 꺼려지는데.”
영도 동의하는지 끄덕였다. 확실히 껄끄러운 분위기였다. 하지만 뭐 어떤가. 브라운관에 나오면 그런 건 느끼지 못할 건데.
“그렇다고 포기하진 않으실 거잖아요?”
음, 하고 고민하던 실장이 곧, 끄덕였다. 지금 회사에서 목이 간당간당한 시점이다. 이런 상황에 저런 대어를 포기할 수는 없다.
“그래, 가자. 똥이 되건, 된장이 되건 들러붙어 봐야지.”
지현을 아파트 앞까지 바래다준 상실은 그 길로 집에 돌아왔다. 안타깝게도 무임승차한 인간의 냄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지현이 뭔가 기대하고 있는 눈치였지만, 모른 척했다.
매번 그렇듯, 저녁을 먹은 척, 밥과 반찬을 변기에 내려 버리곤 공부를 시작한다. 모르는 건 답안지의 풀이 과정을 보고 이해하려 노력했고, 그래도 모르겠으면 인터넷으로도 검색해 본다. 그러고도 모르겠다면 내일 지현에게 묻기 위해 표시해 뒀다.
한참을 공부하던 그는 어느새 시계가 열한 시를 가리킬 시점이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로를 모르는 몸이었지만, 아침부터 저녁까지 공부만 하고 있자니 정신적으로 피로한 착각이 일었다. 일어서는 순간 사라지는 허상에 불과했지만.
근래의 자기 생활을 떠올리며 소년이 픽 웃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대견하면서도 한심했다. 그렇게 하기 싫었던 공부였는데, 정작 공부할 필요가 없어진 지금에 와서야 미친 듯이 하다니. 진작 그랬었다면 영혼을 팔아 치울 필요도 없었을 거다.
다시 자리에 앉아 책을 펼쳤다. 잠을 잘 필요도 없기에 이대로 밤을 새워 문제집을 독파한다. 그러다 다시 시계를 봤다. 시침과 분침이 상단에 모였다. 열두 시.
“늦으시는데.”
간혹 일이 바쁘면 엄마가 늦게 오시는 날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가 식사한 흔적이 뉴스를 타기 시작하면서부턴 이렇게 늦은 일이 없었다. 저녁에 나도는 인적이 뜸해졌기에 당연한 일이다. 어쩌다 오늘 사람이 몰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무래도 불안해졌다.
“나가 볼까.”
그의 어머니는 공부하는 데 방해된다고 싫어하셨지만, 소년으로선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서 마냥 기다릴 수 없었다.
그를 흉내 내는 정신 나간 인간이 돌아다니는 거리다. 경찰들이 깔렸다곤 하지만, 그들이 모든 골목을 지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만에 하나, 엄마를 잃는다면?
소년이 몸서리쳤다.
끔찍하다.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그에게 있어 엄마란 단순히 부모 이상의 의미이다. 반 토막이 되어 버린 영혼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보루. 엄마가 있어야만 안정이 되고, 엄마가 있어야 인간의 탈을 쓰고 있을 수 있다. 만약에 엄마를 잃는다면, 그땐 스스로도 어떻게 될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와 상실감에, 인간의 기준으로 미쳤다고 칭해도 좋을 광란을 벌이겠지. 인근의 인간이란 인간은 모조리 죽이고, 먹어 치우며, 살아 움직이는 재해가 될 거다. 그대로 영원히, 아니면 죽는 날까지, 말 그대로 마귀가 되어 날뛸 것이다.
돈도, 권력도, 문명도, 사회도, 인간도 모두 무가치하다. 스스로 목줄을 채워 둔 건 오직 엄마를 위해서일 뿐. 그에게 있어, 엄마가 없는 세상은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