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나는 영혼을 팔았다 1권(21화)
6. 발단(6)


시간이 지나, 봐 두었던 가게에 불이 꺼지고, 사람들이 나와 흩어진다. 그중 한 명이 남자가 숨은 쪽으로 향했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대상이 지나가길 숨죽여 기다렸다. 시간을 보니, 열한 시 사십 분이었다. 조용히 뒤따르던 그는 상대가 멈춰 서자, 혹시 들켰나 싶어 자세를 낮췄다. 여차하면 도망갈 준비까지 했지만 들킨 건 아니었는지 목표는 다시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그가 안도하며 뒤를 밟았다. 교묘히 발을 놀려 소리를 죽인다. 품에 손을 넣어, 비닐로 밀봉해 두었던 젖은 솜뭉치를 꺼냈다.
서서히, 서둘지 않으며 거리를 좁혀 가던 그는 곧 있을 일을 떠올리며 히죽 웃었다. 지금 이 순간이 즐거웠다. 그 뒤에 있을 일도 즐거울 것이다.
그러다 어째서 이 일을 하게 되었는가 떠올렸다. 첫 대상은 마누라였다. 지금에 와서는 잘 떠오르지 않지만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잘 지냈던 것 같다. 아마 사랑했었을 거다. 자신이 벌어 온 돈을 빼돌리기 전까지는.
돈도 빼돌리고, 바람도 핀 것도 모자라서 당당하게 이혼하자는 미친년에게 무릎 꿇고 빌었다. 제발 그러지 말라고. 지금까지의 일은 다 잊을 테니까, 이전처럼 행복하게 살자고 사정했었다.
하지만 그 여자는 듣지 않았다. 누군지 모를 잡놈에게 미쳐서 이혼하자며 위자료까지 내놓으라고 지껄여댔다. 미친년. 천하의 쌍년 같으니라고.
도저히 참지 못하고 눈이 돌아갔다. 정신을 차린 뒤엔 마누라는 죽어 자빠져 있고, 자신은 피로 물든 스패너를 들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도 못한 채 시체를 화장실에 처박아 두고 술만 마셨다.
그때의 기억은 흐릿하다. 죽은 여편네랑 대화를 했던 것 같기도 하고, 미안하다고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몇 번 더 죽였던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다가 틀어 놨던 티브이에서 뉴스를 봤다. 살인사건. 사람을 찢어 죽인 흉악한 살인마에 대한 내용이었다.
어쩐지 내 이야기인 것 같아 홀린 듯 뉴스를 시청했다. 그리고 연이어 벌어지는 살인행각에 빠져들었다.
고작 한 명을 죽이고 궁상을 떨고 있는 자신이 한심했다. 양손으로 꼽을 수도 없는 수의 사람을 죽이고도, 수백의 경찰을 유유히 따돌리는 범인을 보니, 묘한 흥분이 일었다.
별거 아니잖아? 사람이 죽는 것 따위, 사실은 별거 아니었어. 죽이고 들키지만 않으면 돼.
그때부터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살인사건에 관련한 자료를 찾았다. 누군가 찍어 올린 사진과 동영상을 보며 감탄했다. 정말 존경스러웠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 존경은 나도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사실 나도 할 수 있어. 죽이는 거야 퍽 치면 되는 거고, 찢어 놓는 거야 연장을 쓰면 되지. 나라고 못 할 거 같아? 이미 하나 죽였는데?
그 뒤로 시작이었다. 오늘까지 몇을 해치웠더라? 아니, 그런 건 아무렴 어때. 당장의 일이 더 중요하지.
남자는 흉측하게 웃으며 나이 든 여인을 제압했다. 뭐라 소리 지르기 전에 젖은 솜으로 코를 누르자, 얼마지 않아 축 늘어진다.
“흐흐.”
부축하는 것처럼 상대의 팔을 목에 걸친 그는, 서둘지 않고 자신의 차로 향했다. 아직 밤은 길고, 시간은 많았다.

열두 시 이십 분. 정류장에서 막차를 보낸 소년은 심기가 불편했다. 아무리 일이 많은 날이라도 엄마가 버스가 끊길 때까지 귀가하지 않는 경우는 드물었다. 간혹 그런 날도 없잖아 있었지만, 사전에 전화를 해 주시곤 했다. 오늘이 그 예외가 될 수도 있기는 했지만, 하필이면 오늘, 그것도 전국적으로 떠들썩한 연쇄살인마의 뉴스가 나오는 요즘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
말도 안 된다. 그가 아는 엄마는 아들밖에 모르는 수더분한 아줌마다. 전화도 없이 늦은 시각까지 돌아오지 않을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누구냐.”
그가 준수한 얼굴을 와락 구기며 나직이 말했다.
짐작이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전부터 무임승차해 오던 놈의 짓이다. 한 놈이 아닐 가능성도, 그놈이 아닐 가능성도 있지만, 우연은 없는 법이다.
정류장에 홀로 남아 있던 소년의 몸이 검게 물들었다. 밤하늘 가득한 어둠과 같은 빛깔이 된 그는, 관심을 갖고 관찰하지 않는다면 알아보지 못하리만치 밤과 동화되었다.
찾는다. 찾아내고 말겠다. 아무도 내게서 엄마를 빼앗아 갈 수 없어. 누구도 내 손을 피해 달아날 수 없다.
활동을 개시한다. 최대한 후각에 집중해 엄마의 냄새를 찾는다. 매일같이 맡아 왔던 냄새다. 아무리 많은 인간들 틈에 섞여 있어도 찾아낼 수밖에 없는, 소년에게 있어 세상 모든 인간들보다 소중한 사람의 냄새. 시간이 지나, 흔적이 희미해졌다고 해도 찾지 못할 이유가 없다. 다른 누구도 아닌 엄마니까.
곧 흔적을 찾아냈다. 고개를 들어 아주 희미해진 향을 추적했다.
모든 그림자가 그의 길이다. 어둠 또한 그림자다. 태양의 반대편에 생겨난, 지구의 그림자일 뿐이다. 그렇다면 하늘까지 닿은 어둠조차 소년에겐 길에 불과했다.
정류장에 있던 시커먼 형상이 날아오른다. 날개 따윈 필요 없다. 사방에 만개한 그림자를 밟으며 움직인다. 물리법칙 따윈 깡그리 무시하며 하늘로 솟아오른 그가 희미한 냄새를 따라 도심의 하늘을 갈랐다.

남자는 정순을 부축하며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왔다. 미리 준비한 모자로 사냥감의 얼굴을 가렸기에 들킬 것이란 생각은 않았다. 만에 하나 들킬 수도 있지만, 그땐 어쩔 수 없다. 더는 사람을 죽이지 못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 자신이 죽고 사는 것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마누라를 쳐 죽인 시점에서, 이미 삶에 미련은 버린 몸이다.
“나 왔어.”
정순을 거실에 내려놓고 화장실로 달려가 인사한다. 이미 죽어서 썩고 있지만, 마누라는 마누라니까. 어찌 보면 잔소리나 해 대던 예전보다 지금이 훨씬 나았다. 남편이 외간여자를 데려와도 조용히 있는 게 현모양처 같지 않은가? 외간여자의 나이가 많은 것이 흠이기는 했지만.
“오늘은 새 식구를 데려왔어. 금방 같이 있게 될 거야.”
그가 히죽거리며 화장실에 불을 켠다. 주홍빛 조명에 드러난 내부는 지옥도가 따로 없었다. 한 사람이 겨우 누울 수 있을 욕조에는 몇 명인지 모를 시체가 서로 얽혀 있었다. 썩기 시작한 면면은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고, 그로 인한 악취는 숨통이 막힐 것 같다.
남자는 익숙하게 탈취제를 뿌리고는 밖으로 나와 공구가방을 열었다.
“뭐가 좋을까, 오늘은 뭐로 해 볼까?”
아무 노래나 떠오르는 대로 흥얼거리며 도구를 고르던 그가 결심했는지 고기칼을 꺼내 들었다.
“역시 이거지. 목을 탁!”
허공에 대고 휘두르며 낄낄거리다가 시계를 본다. 열두 시 반. 정순을 힐끗 보곤 도로 키득거린다.
“깨기 전에 후딱 해치우자. 이 아줌마한텐 나오려나.”
괴물이 먹던 무언가를 떠올리며 말한 그는 정순을 들어 화장실로 끌고 갔다. 단단하게 굳은 핏덩이가 옷자락에 묻어난다. 물청소를 할 법도 했지만, 어차피 집 안에 시체를 늘어놓고 살고 있으니, 하나마나였다.
“자아, 그럼 어디부터 할까. 깨면 시끄러우니까, 역시 머리부터?”
묵직한 칼을 들고 다가서는 두 눈이 희번덕거린다. 먹이를 노리는 짐승처럼 입맛을 다셔가며 칼을 들어 올리더니 흠칫 움직임이 멎었다.
“뭐지?”
불안한 듯 눈을 좌우로 굴리며 주변을 둘러보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분명 집 안에는 그와 정신을 잃은 여자 하나밖에 없다. 하지만 어째 오한이 일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가 오고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어떤 끔찍한 것.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불길한 무언가가 접근하고 있는 것 같았다.
“뭐야? 뭔데?”
남자가 당황하며 몸을 움츠렸다. 살면서 단 한 번도 겪어 본 일 없는 기묘한 감각이었다. 위기감이 엄습한다. 당장 여기서 탈출하라고, 아무도 찾을 수 없도록 멀리, 아주 멀리 도망가라고 내면 깊은 곳에서 충고했다. 하지만.
“찾았다.”
늦었다.
뒤에서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에 그는 화들짝 놀랐다. 분명 문은 단단히 잠가 뒀다. 문이 열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바람이 들어오는 느낌도,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들어왔지? 누구지? 무슨 수로 찾아온 거지?
의문과 본능의 경고를 억누르며, 남자는 즉각 몸을 틀었다. 뭐가 어찌 되었건 목격자를 제거하고 보겠다는 심보로 칼을 휘두르려는데, 커다란 손이 머리를 잡는다. 목이 뽑힐 듯한 괴력이 그를 거실로 내동댕이쳤다.
“크엑!”
정신이 없다. 바닥에 부딪친 머리는 얼얼하고, 충격에 무릎과 가슴이 아려 온다. 들고 있던 칼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칼, 칼이 어디 갔지? 어떤 개새끼가.
혼란스런 와중에 허벅지에서 화끈한 통증이 느껴진다. 바라보니, 칼날이 작업복을 찢고 박혀 있다. 옷자락에 붉은 물이 퍼져간다.
“흐윽, 씨, 씨발.”
떨리는 손으로 칼을 잡아 뽑는다. 이를 악물었지만, 신음이 터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겨우겨우 칼을 뽑아 들었지만, 아프다. 환부가 타들어 가는 것처럼 고통스럽다. 개자식. 누구냐, 어떤 새낀지 몰라도 가만 놔두지 않겠어. 죽여 버리겠다.
“이 개새끼…….”
몸을 일으키며 정체불명의 적을 향해 고개를 들던 그는 벌어지는 입을 막을 수 없었다.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린 것 같았다.
사람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시커먼 형상이 화장실 앞에 서 있었다. 세상에 둘도 없을 괴이한 모습이었지만 강한 기시감이 들었다.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떠올랐다.
잊을 수 있을 리가. 사냥을 떠나기 전에 몇 번이고 보았던 동영상 속의 주인공을, 겨우 몇 시간 못 봤다고 잊어 먹을 리가 없다.
“허?”
헛바람 소릴 내자, 그것이 고개를 돌린다. 하지만 눈코입이 있어야 할 자리엔 아무것도 없었다. 있는 건 그림자를 닮은 시커먼 어둠뿐이다.
“하하. 이거, 씨발. 누구신가 했더니, 내 영웅 아니야?”
그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애써 웃었다. 웃음이 나올 수밖에. 그토록 존경하고, 닮고 싶었던 자가 눈앞에 와 있다니. 이런 상황만 아니라면 악수라도 청하고, 사인도 받고 싶다. 그런데 사인은 할 수 있나? 저거, 손가락은 있는 거야?
눈은 없었지만 그림자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의도.
왜 적대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상황이 좋지 않게 돌아간다는 것쯤은 맛이 간 머리로도 짐작할 수 있다.
그가 칼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런데, 여긴 어인 일로 행차쇼, 형씨? 왜 방해해? 응? 우린 동류잖아. 그럼 방해는 말아야지.”
말을 하다 보니 억울하다. 정말 왜 방해하는 걸까. 기왕 여기까지 왔다면 먹었던 게 뭔지, 어떻게 사람을 찢어발기는지 알려 줘야 하는 거 아닌가?
“남의 밥은 뺏지 말아야 할 거 아냐!”
그 말을 듣는 순간 상실이 남자를 덮쳤다. 어설프게 휘두르는 칼을 쳐 날려 버린다. 손아귀가 찢어진 사내가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을 틀어쥔 손에 막혀 꺽꺽거리는 소리만 나온다.
한 손으로 그를 들어 올린다. 팔다리는 버둥거리며 켁켁 소릴 내는 꼴이 역겹다. 당장이라도 잡고 있는 목을 꺾어 죽여 버리고 싶다.
그자를 코앞까지 끌어와 면전에 마주한다. 터질 듯 붉어진 얼굴이 일그러져 있다. 호흡이 곤란한 것 같았으나, 사정 봐줄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상실이 선언했다.
“너는 죽는다.”
그래, 너는 죽는다. 반드시. 세상 그 누구보다 고통스럽게, 살려 달라고 절규하고, 제발 죽여 달라고 빌어도 죽지 못하고, 벌레처럼 버르적거리다가 처참하게 죽을 것이다. 내가 약속하마. 네게 안식은 없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네가 누워 쉴 곳은 없다. 천국도 지옥도 가지 못하고 고통 받아라. 감히 누구에게 손을 대려 했는지, 영겁토록 후회해라.
상실이 남자를 집어 던졌다. 빠르게 날아가 벽에 들이받으며 비명을 토한다. 바닥에 떨어지며 거실에 진열해 놓았던 티브이가 쓰러져 깨진다. 전선에 휘감겨 허우적거리는 사내는 머리가 깨졌는지, 피투성이다. 부딪쳤던 벽면엔 혈흔이 묻어 있고, 충격에 허벅지의 상처가 벌어져 피가 쏟아졌다.
“으아, 으하아.”
수영이라도 하는 듯, 정신 차리지 못하는 그에게 다가가던 상실이 멈춰 섰다. 소리가 들려왔다. 화장실. 엄마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