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제라린 1(2화)
1. 나노머신 뉴타입 군인 차오성(2)
저녁이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난 차오성, 그의 옆에는 덩 중위가 여전히 키득거리면서 이번에는 e―북으로 되어서 보관중인 판타지 책을 보고 있었다.
“앗, 대장님. 벌써 가시게요?”
“응, 이제 자야지. 그런데 그거 재밌어?”
“예, 얼마나 재밌는데요. 저도 이런 판타지 세계에 가서 영지를 발전시켰으면 좋겠어요. 소금도 만들고 조명도 만들어서 전 대륙의 돈을 다 끌어모으고 그리고 마법을 배워서 드래곤을 몸종으로 부리고 멋있는 엘프와도 사귀고… 아 맞다. 군대도 길러서 대륙을 정복하고… 히히.”
절망적인 현실 때문인지 사람들은 점점 더 환상 속으로 빠지는 거 같았다.
“응, 그래 열심히 해.”
그렇게 대답하면서 차오성은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사실 차오성도 몸속의 나노 컴퓨터에 비누 만드는 법, 양초 만드는 법 등등의 인간 사회의 다양한 문화들에 대한 자료들을 저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덩 중위처럼 판타지로 가기 위해서 그런 게 아니라 ‘더 이상 문화를 생산할 수 없는 시대’의 사람들이 오랜 후에 이런 방법들을 잊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에 그런 자료들을 저장한 것이었다.
비록 체내 나노 컴퓨터의 저장 용량이 작아서 많이 데이터를 저장하지는 못했지만….
이틀 뒤 기지의 야간 사령을 맡은 차오성.
안개가 짙게 깔린 날씨였기에 차오성은 평소보다 더 긴장하면서 기지의 경계 업무를 지휘하는데 갑자기 제3초소에서 비상 보고가 들어왔다.
“본부, 제3초소, 전방 500미터에서 적 로봇 출현.”
“추가 확인.”
“알았다.”
이제 한국군의 초소 보고 체계는 매우 간단해졌다. 제일 먼저 원하는 곳을 부르고 두 번째는 보고하는 장소 그리고 마지막에 보고 내용만 말할 뿐이었다.
본부에서도 초소에 원하는 명령을 간단하게 지시만 한다. 어차피 초소에 연결된 디스플레이를 통해서 그쪽 상황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초소에 연결된 디스플레이에서는 약 이십여 명의 사람들이 쫓기고 있었고 그 뒤를 로봇 5대가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장면이 잡혔다.
벌써 몇몇 사람들은 기지 근처로 와서 문을 열어 달라고 외쳤다.
전 국민이 기지로 들어와서 살 수는 없었기 때문에 기지 근처에 사는 난민들도 많았다.
이런 사람들은 외계 문명에 나름대로 저항하거나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가 나타나면 근처 기지로 달려와서 도움을 청했다.
차오성은 서둘러서 제1기동타격대에 비상을 걸었다.
모두들 가수면 상태에서 대기하였기에 3분이면 출동 준비가 완료될 것이다.
근처까지 쫓아온 로봇 5대가 사람들 근처에 다다르자 차오성은 망설였다.
‘겨우 5대 정도면 지금 초소 병력과 내가 나서면 막을 수 있다. 하지만 과연 5대가 다 일까?’
레이더에는 로봇 5대 외에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하지만 차오성은 불길한 예감에 초소를 통하여 앞쪽 영역에 대한 디스플레이 확대를 지시했다.
그런데 확대한 화면 속에는 짙은 안개로 몸을 숨긴 약 100여 대의 로봇들이 있었다.
반 레이더 도료를 칠했는지 레이더에는 잡히지 않는 적의 병력들이었다.
아마 기지의 문을 열었으면 순식간에 치고 들어왔었을 것이다.
그 사이 기지 밖에서 로봇들은 난민들을 학살하고 있었고 차오성이 제1기동타격대를 이끌고 출전했을 때는 대부분의 난민들은 죽어 있었다.
제1기동타격대를 이끌고 적의 로봇 대다수를 파괴한 차오성에게 통신을 통해서 기지 사령관의 칭찬이 들렸다.
“차 소령, 잘했어. 저 교활한 놈들이 난민들을 일부러 이리로 몰았던 거야. 만약에 문을 열어 줬으면 기지 안쪽은 아마 피바다가 되었겠지. 정말 냉철하게 잘 판단했어. 아주 잘했어.”
전장 정리를 하는 제1기동타격대 대원들을 보면서, 차오성은 발밑에 반쯤 불탄 인형을 하나 주워서 들었다.
무척 낡았다. 더 이상 이런 것들은 생산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마 20여 년 전에 만들어졌던 것이리라.
순간 그 인형을 품에 꼭 안고 어른들과 뛰던 9, 10살 정도 된 소녀가 떠올랐다.
아마 로봇에 밟혀 죽었으리라.
순간 차오성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생겨나 인형 위로 떨어졌다.
‘과연 내 결정이 옳았는가?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이들을 구해야 하지 않았을까? 이 조그마한 아이까지 희생시켜야 했을까?’
차오성은 자신의 결정으로 많은 부하들과 사람들의 생명이 순식간에 달라질 수 있다는 책임감에 더 괴로워했다.
‘외계인들과 싸우고 힘없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총을 들었다. 그런 내가 피해를 볼 것을 두려워해서 이런 사람들을 외면하다니…….’
어느새 인형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앞으로는 이런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설령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차오성은 출동 명령을 받고 부대원들을 소집했다.
출동 목적은 백두산 화산 폭발로 폐허가 된 북한의 평안북도 자성에 북한 정부가 몰래 비축해둔 플루토늄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화산 폭발로 워낙 피해가 컸기에 북한은 무정부 상태였고, 이 정보는 난민이 되어서 얼마 전에 흘러들어온 북한 군인들로부터 확보했다.
핵무기가 외계 문명에 대응하는데 효과적이었기에 한국 정부도 이미 핵무기를 보유한 상태였는데, 플루토늄의 추가적인 확보를 위해서 거기에 보관된 플루토늄도 가져오기로 결정한 것이다.
화산재가 뒤덮인 건물의 폐허를 배경으로 치열한 전투가 진행되고 있었다.
차오성의 부대는 처음에는 한 건물을 중심으로 원형 방어진을 편 채 적의 로봇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전력의 열세로 방어선 곳곳이 무너졌고 난전이 벌어졌다.
차오성도 처음에는 예비대를 운용했지만 워낙 전력의 차이가 심했던지라 예비대도 곧 방어선에 붙들려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차오성의 옆에서 고 상사가 재촉했다.
“대장님, 어서요. 빨리!”
그는 왼손으로 개량형 기관총을 잡아 쏘고 있었고 그의 오른손은 이미 너덜너덜해져 덜렁거리고 있었다.
기관총의 화력은 약했기에 로봇의 전력 계통의 약점을 잘 쏘아야만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고 상사는 부대원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저렇게 악을 쓰면서 총을 쏘고 있던 것이었다.
그런 고 상사가 차오성에게 빨리 건물 내의 플루토늄을 확보하라고 재촉했다. 이미 차오성 주변에는 대대의 본부 대원들도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예비대를 다 쓴 차오성이 그들도 임시 예비대로 투입한 결과였다.
주변을 살피는 차오성도 고 상사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
자신만이라도 플루토늄을 확보해서 이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그래야만 한국군들이 핵무기를 몇 기라도 더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윽고 마음을 굳게 먹은 차오성이 건물 쪽으로 뛰었다. 그런 그의 귓가로 고 상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요. 대장님. 빨리… 빨리… 헉.”
차오성은 뒤쪽에서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고 상사의 비명을 들었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앞만 보고 건물로 들어갔다.
북한군들로부터 얻은 암호를 이용하여 3중 방어막을 열고 들어간 차오성은 드디어 플루토늄을 보관한 방에 도착했다.
차오성은 눈물이 나올 사이도 없이 바로 플루토늄을 챙겼다. 빨리 이 플루토늄을 가지고 복귀해야 되기 때문이다.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는다는 통신을 전했으니 곧 제2기동타격대를 비롯한 후속 병력들이 도착할 것이다.
플루토늄을 매고 건물 밖으로 뛰던 차오성, 외계의 로봇들도 심상치 않은 것을 느꼈는지 그 건물을 나오는 차오성에게 집중적으로 레이저를 쏘았다.
차오성은 처음에는 강화된 신체 능력으로 약 2∼3미터가량 점프를 하면서 레이저를 피했고 이윽고 엄폐가 가능한 곳으로 몸을 숨길 수 있었다.
후방에 있던 외계의 군사령관은 그들의 에너지원인 프레롤로 만들어진 대함미사일 발사를 명령했다.
이런 소규모 격전에는 사용하지 않는 무기지만, 한국군들이 필사적으로 얻으려는 물건에 대해서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프레롤로 만들어진 미사일이 그대로 날아가서 차오성이 멘 플루토늄이 들어 있는 상자에 직격했다.
차오성이 메고 있던 플루토늄은 불안정한 상태였는데 거기에 새로운 물질인 프레롤이 갑작스럽게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반응하기 시작했다.
플루토늄과 반응한 프레롤이 불완전 수축을 하면서 순식간에 약 반경 2미터의 홀이 생겼고 바로 앞에 있던 차오성을 빨아들였다.
그러고는 바로 엄청난 팽창과 함께 폭발했다.
프레롤과 플루토늄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대폭발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생명체는 말살되었고 화산재로 뒤덮여 있던 북한과 만주 지역은 다시 한 번 거대한 폭발에 완전한 폐허가 되었다.
2. 탑에서 자란 제라린과의 만남(1)
율리우스 남작가의 영지.
영주성에 약 4km 떨어진 황량한 산비탈에 돌로 만들어진 탑이 세워져 있었다.
높이 약 20미터가량, 밑의 둘레는 약 40미터.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형태의 돌탑이었다.
원래 입구가 있던 곳은 막혀 있었고 탑의 상층부에 창문이 하나 있었다. 고대인들은 이 탑을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단으로 사용했지만 후세에는 그 용도를 아는 사람이 없어 그냥 방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탑 내부에서 지금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대략 18∼19세가량의 한 청년이 약 80∼90cm가량의 롱소드 형태의 검을 들고 양손에 숏소드와 단검을 하나씩 든 검은 복면을 쓴 괴한과 대치하고 있었다.
청년은 대략 180cm가량의 키에 검은색 눈, 흑발을 하고 있었고 괴한은 170cm가량의 키에 복면과 검은 색 옷으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
그들의 근처에는 60대 노인 한 명과 복면을 쓴 2명의 괴한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그들은 치명상을 입었는지 전혀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안타까운 눈으로 노인을 잠깐 바라본 청년이 곧이어 크게 놀랐다.
노인의 상처에서 나오던 붉은 색 피가 이내 검붉은 색으로 변하더니 상처 부위도 검게 변하는 것이었다.
청년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곧바로 오른손에 들고 있던 롱소드로 자신의 왼팔을 쳐서 끊어 냈다.
그러면서도 앞에 있는 복면 괴한을 지켜보면서 경계를 했다.
[크크크. 어린놈이 대단하구나. 독이 묻었다고 자기의 왼팔을 바로 끊어 내다니… 나이답지 않게 독심이 있어. 하하하. 하지만 이미 늦었다. 독은 이미 너의 온몸으로 퍼졌을 것이야.]
괴한은 그렇게 말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어차피 청년은 지혈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피가 계속 나왔고 이대로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쓰러질 것이기 때문이다.
청년은 칼을 고쳐 들고 괴한에게 다가갔다. 그의 말대로 시간이 흐를수록 자기에게 불리했다.
다가오는 청년을 보면서 괴한도 긴장했다.
순간 벽의 한쪽에서 2미터가량의 홀이 생기더니 한 남자가 굴러 떨어지듯이 거기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 홀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홀에서 굴러 떨어진 남자는 180cm가량의 흑발의 남자였다.
차오성이었던 것이다.
폭발의 영향이었는지 입고 있던 군복은 갈기갈기 찢어져서 거의 넝마가 되다시피 했고 온몸에서 자잘한 핏물들이 흘렀다.
차오성은 굴러 떨어지자마자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그는 이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어리둥절한 상태였다.
괴한이 먼저 놀라면서 말했다.
[넌… 넌 누구냐? 아니 어떻게 벽에서 나올 수 있지? 방금 그 빛무리는 뭐냐?]
청년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피를 너무 많이 흘렸는지 이내 몸이 휘청거렸다.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롱소드를 놓고 오른손으로 왼팔의 끊어진 부분을 지혈했다.
그런 청년을 보면서 괴한이 다급해졌다. 이대로 청년이 지혈하도록 놓아두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결심을 했는지 차오성을 경계하면서 단검을 들고 청년에게 다가갔다.
팔을 지혈하던 청년이 애절한 눈초리로 차오성을 보면서 소리쳤다.
[저를 도와주세요. 제발….]
그들의 말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한눈에 봐서 어느 쪽이 나쁜 놈인지를 생각한 차오성은 일단 사람을 죽이려는 복면 괴한을 막기로 결심했다.
“이봐,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고. 복면 쓰고 이게 무슨 짓이야?”
차오성이 자기의 앞을 막자 괴한은 그에게 적의를 드러냈다.
차오성은 그를 경계하면서 벽으로 물러났다.
벽에는 약 170∼180cm가량의 굉장히 긴 검과 그보다 짧은 청년이 들고 있던 롱소드와 비슷한 검 두 자루가 서로 엇갈려 걸려 있었다.
차오성은 괴한에게 시선을 떼지 않고 손을 뒤로 돌려서 그중에서 긴 검을 떼어 냈다.
차오성에게 달려들 순간을 노리던 괴한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비웃었다.
[미친 놈… 이런 실내에서 투핸드소드를 잡고 뭘 하겠다는 거야? 정말 멍청한 놈이구나. 하하하.]
괴한이 보기에 갑자기 나타난 인물은 전투를 전혀 모르는 인물이었다.
무거워서 두 손으로 겨우 드는 투핸드소드를 단지 길이가 길어서 좋다고 선택하는 신출내기가 분명해 보였다.
검을 떼어내서 오른손에 든 차오성을 보면서 공격할 순간을 노리던 괴한이 그대로 달려들었다.
괴한은 분명 검은 머리의 상대가 왼손을 이동해서 오른손과 같이 그 검을 잡아야지만 제대로 휘두를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