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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라린 1(3화)
2. 탑에서 자란 제라린과의 만남(2)
갑자기 달려드는 괴한에 당황한 차오성은 오른손에 든 검을 그대로 전력을 다해서 휘둘렀다.
무게가 묵직했기에 반원 형태로 원심력을 받으면서 휘둘려진 검은 덮치던 괴한의 가슴을 베면서 그의 몸을 두 동강 내었다.
허공으로 날아가는 그의 상반신에서 나온 피가 허공에 뿌려졌고 상반신이 날아간 뒤에도 서 있는 하반신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조금 후에 힘없이 앞으로 쓰러지는 하반신은 바닥으로 쓰러진 뒤에도 계속 피가 나왔다. 구석에 떨어진 그의 상반신에 있는 두 눈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부릅뜬 채였다.
갑자기 모르는 사람을 죽인 차오성도 당황하면서 괴한에게 급히 다가갔다. 하지만 그의 몸은 이미 두 토막이 난 상태였다.
한곳에 쓰러져 있던 청년도 그 모습을 보면서 무척 놀랐다.
[다, 당신은… 누구신가요? 어디서 오셨나요?]
역시나 말이 통하지 않았다.
순간 청년의 잘려진 팔에서 핏물이 튀었다.
급하게 지혈시킨 곳이 다시 터진 것이다.
차오성은 급하게 그에게 다가가서 헝겊으로 상처를 막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벽에는 수십 권의 책들이 꽂힌 책장이 있을 뿐 매우 단출한 내부였다.
청년이 책장을 향하여 힘겹게 손으로 가리키자 차오성은 책장에 놓인 나무 상자를 알아차리고 그걸 가져왔다.
청년이 나무 상자를 열고 그 안에서 종이에 쌓인 흰 가루약을 꺼내서 자신의 상처에 뿌리려고 했다. 하지만 한 팔로는 쉽게 되지 않았다.
그걸 본 차오성이 가루약을 대신 뿌려 주었다.
그 약은 지혈제였던 듯이 이내 상처에서 피가 멈추기 시작했다.
청년이 고맙다는 눈빛을 보냈다. 그제야 여유를 찾은 차오성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탑에 난 창문으로 밖으로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여긴 어디지? 갑자기 폭발에 휩싸여서 어디론가 이동한 거 같은데… 화산재가 뒤덮인 북한이나 만주 지역은 아니다. 저런 숲과 밀밭을 보니 남한도 아닌 거 같고… 갑자기 칼 들고 싸우는 사람들. 전혀 총기류 같은 건 보이지도 않네.’
차오성은 그를 간호하면서 우선 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차오성의 향상된 지적 능력과 체내의 나노 컴퓨터의 도움으로 빠르게 언어를 배웠다. 그리고 그들은 많은 말들을 서로 나누었다.
그러다가 차오성이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차오성은 직접 이상한 현상을 겪었고 청년도 차오성이 나타날 때의 신비한 현상을 봤기에 그들은 쉽게 서로의 이야기를 믿을 수 있었다.
청년의 이름은 제라린 폰 율리우스. 율리우스 남작의 아들이다.
하지만 그가 태어날 때 어머니가 죽었기 때문에 불행을 몰고 온다고 생각한 율리우스 남작에 의해서 고탑에 갇혀서 살았다.
탑 내부에는 늙은 하인 한 명만이 그를 시중들기 위하여 같이 있었고 탑의 입구가 완전히 막혔기에 식사는 도르래를 통해서 창문으로 하루에 한 번씩 외부로부터 공급받았다.
그런데 차오성과 만나던 날 그 창문으로 갑자기 괴한 3명이 쳐들어 왔던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벽을 타고 고탑의 꼭대기로 올라갔다가 밧줄을 타고 내려 왔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차오성이 이쪽 세계에 대해서 묻자 제라린은 그가 알아듣기 쉽게 최대한 천천히 말해 주었다.
“여기는 마이센 대륙이라고 해요. 동쪽과 서쪽에도 다른 3개의 대륙이 있는데, 사람들이 왕래는 잘 안 해요. 너무 멀어서요. 하지만 상인들은 소규모로 통상을 한다고 하더라구요.”
제라린이 이번에는 마이센 대륙에 대해서 설명을 했다.
“마이센 대륙에는 두 개의 제국, 일곱 개의 왕국, 세 개의 공국이 있어요. 우리가 있는 곳은 아시렌 왕국이고 제 아버지는 아시렌 왕국의 남부에 있는 율리우스 영지를 다스리는 남작이에요.”
이번에는 제라린이 이 세계의 귀족과 평민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약간씩 더듬거렸다.
자신도 늙은 하인에게서 듣기만 한 얘기였기 때문이었다.
“여기의 지배층은 저와 같은 귀족이에요. 왕족과 귀족이 다스리고 시민과 평민이 일을 하는 것이죠. 아, 평민은 주로 농업과 광산업, 목축업과 같은 육체노동을 하고 시민은 상업, 금속세공업, 이발사, 의사 등과 같이 부가가치가 높거나 귀족들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이에요.”
차오성이 뭔가를 묻자 제라린이 실소를 터뜨렸다.
“풋! 하늘을 나는 커다란 도마뱀요? 귀가 뾰족한 매우 아름다운 인간? 아니면 털이 나고 무시무시한 괴력의 인간? 그런 건 저도 못 들어 봤어요. 아마 없을 거예요. 그런 신기한 얘기라면 저를 보살피던 하인이 저에게 얘기해 줬겠죠.”
자신이 지구의 중세 유럽과 비슷한 문명의 다른 세계에 떨어진 것을 알아챈 차오성은 내심 실소를 했다.
‘훗, 그렇게 판타지 소설에 빠져 살던 덩 중위가 여기 왔으면 좋았을 것을… 아니지. 마법도 없고 검기를 사용하는 검사도 없고 게다가 드래곤과 엘프도 없다니 오히려 실망했을지도…….’
차오성도 제라린에게 자신이 살던 지구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수많은 전쟁들 그리고 여기와 비슷한 지구 중세 유럽의 이야기들, 비참하게 살았던 하층민들, 그리고 사람들이 자유, 평등, 평화를 쟁취하기 위하여 싸웠던 이야기와 외계인들과 힘겹게 싸우고 있는 지금의 시기까지…….
제라린은 청년답게 차오성의 이야기에 많은 흥미를 나타내었다.
“대단하군요. 사람들이 자신의 권리를 위해서 그렇게 싸우면서 권리를 쟁취했다니… 그런 사람들이라면 외계인들도 물리칠 수 있을거예요.”
그렇게 차오성을 위로하던 제라린이 무언가를 생각했는지 이내 시무룩해졌다.
“아∼ 나도 그런 세상에서 태어났으면 아버지가 나를 이런 곳에 가두지 않았을 텐데… 어머니가 평민 출신이라고 나를 미워하지도 않았을 텐데…….”
제라린을 키운 늙은 하인은 제라린이 태어날 때의 어머니의 죽음으로 그의 아버지가 그를 미워한다고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제라린은 어머니가 평민이었기에 자신이 여기에 갇힌 걸로 오해하고 있었다.
그런 제라린이 차오성이 말하는 자유, 평등,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듯이 동경했다.
이야기를 하는 도중 차오성은 자신이 왜 여기로 왔는지 의아해했다.
플루토늄과 외계인의 미사일이 이상한 반응을 하면서 자신이 여기로 이동을 했다는 것은 알겠는데, 다시 그런 반응을 구현하여 본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었다.
이쪽 세계의 과학기술은 아직 걸음마 단계였기에 차오성 혼자 그런 실험 환경을 갖추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차오성을 보면서 제라린은 미소를 지으면서 위로했다.
“주신 메젠스께서 당신을 이곳으로 보내셨다면 그럴 이유가 있겠죠.”
이렇게 서로 얘기를 나누면서도 제라린은 고열에 시달렸다. 팔을 잘랐지만 독약의 미세한 성분들은 이미 몸에 침투한 뒤였기 때문이다.
서서히 생명이 꺼져 가는 제라린으로 부터 자세한 사정을 들은 차오성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음식을 실어 나르는 도르래가 올라오고 해독약을 얻기 위해서 거기를 통해서 사람을 부르려는 차오성을 제라린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렸다.
“안 돼요. 전 이 독약이 무엇인지 잘 알아요. 책에서도 나온 해독약이 없다는 티베스예요. 그걸 알고 팔을 잘랐는데도 너무 늦었네요. 소용없어요. 제 입술이 이미 검죠? 전 지금 앞이 안 보이고 다만 검게만 보여요. 독이 이미 머릿속까지 침입했다는 뜻이죠.”
정말 그의 입술은 검게 변해 있었고 초점 없는 눈은 단지 허공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흐물흐물하게 녹고 있는 노인의 시체를 보며 차오성은 눈물을 흘리고는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이런 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네요. 나를 이곳에 가둔 사람인데… 음, 죽을 때의 비참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요.”
이윽고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제라린이 가쁜 숨을 쉬면서 차오성에게 마지막 부탁을 했다.
“후우∼ 후우∼ 당신은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 이제는 왜 주신 메젠스께서 당신을 이곳으로 보내신지 알겠어요.”
말을 하는 제라린의 숨이 더 가빠졌다.
“…바로 이곳의 사람들에게 당신이 살던 세계의 자유, 평등, 평화를 구현하라는 뜻일 거예요.”
차오성이 힘겹게 말을 하는 제라린의 손을 꼭 잡았다.
제라린은 계속 말을 했다.
“그리고 후우∼ 후우∼ 이곳에서 저를 만난 것도 신들의 안배 같아요. 그러니 당신은 이 세계에서 저를 대신해서 살아가 주세요. 하하, 그러면 제 이름은 영원히 남는 거겠죠? 하하하.”
힘겹게 말하던 제라린이 차오성이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가고 자신의 이름이 이쪽 세계에서 영원히 남는다는 상상을 했는지 유쾌하게 웃었다.
아직까지 세상을 보지도 못하고 죽어 가는 제라린이 너무 가여웠다. 그래서 차오성은 그의 부탁은 무엇이든지 들어주고 싶었다.
“그래… 내가 너를 대신해서 살께… 그리고 이쪽 사람들에게 자유, 평등, 평화가 있는 사회를 만들도록 하마. …그리고 너의 이름을 길이길이… 남겨 주마.”
차오성의 승낙에 제라린은 만족스런 미소를 짓고는 이내 두 눈을 감았다.
차오성이 이 세계로 온 지 7일째, 제라린이 숨을 거둔 지 2일째 되는 날.
차오성은 흐물흐물 녹기 시작한 노인과 괴한들의 시체를 지하에 묻으면서 남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하여 제라린은 더 깊숙이 묻었다.
그리고 차오성은 여전히 탑으로 배달되는 음식을 먹고 책을 보면서 투핸드소드를 휘둘렀다.
제라린을 대신하여 살겠다고 약속했지만 여기에 언제까지나 있을 생각은 없었다. 좀 더 대륙을 알고 검을 연습한 뒤에는 탑을 탈출할 생각이었다.
차오성은 나노 컴퓨터에 저장된 투핸드소드의 연습법을 읽으면서 연습을 했다.
원래는 두 손으로 잡고 연습대를 깨끗하게 원모양으로 자르면서 연습을 해야 했지만 차오성은 그냥 한 손으로 잡고 휘둘렀다. 그의 완력은 보통 사람의 3배 이상이었기에 아무런 무리도 없었다.
탑 내에서 ‘연습대’로 사용할 만한 것들은 모조리 베는 연습에 사용되었다.
그리고 ‘투핸드소드의 반격 방법’도 연습했다. 방어하기 위해서는 크게 휘두르지 말고 극히 작은 동작으로 휘두르도록 노력했다. 동작을 크게 하면 다음 동작으로 연결될 때 빈틈을 많이 보이기 때문이다.
쿵. 쿵.
저녁 무렵, 무언가 탑의 입구를 막은 석회를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식사 외에 처음 접하는 외부의 신호였기에 차오성은 검을 들고 그대로 입구로 달려갔다.
석회에는 이미 금이 가고 있었고 그것을 알아차린 듯이 밖에서는 더 세게 때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석회가 무너지고 자욱한 먼지 속에서 밖이 보였다.
횃불을 든 몇몇 사람들과 통나무를 든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콜록콜록.”
쇠고리를 연결한 형태인 체인 메일을 걸치고 허리에 롱소드를 찬 사람이 기침을 하면서 먼지가 자욱한 입구를 지나서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다가 입구에 서 있던 차오성을 발견하고는 그를 부른다.
“소영주님.”
먼지가 가라앉으면서 나타난 그는 40대 중후반의 모습이었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그가 오른쪽 팔꿈치를 90도로 고정한 상태로 가슴 앞으로 내밀었다. 여기에서의 기사들의 인사법이었다.
“저는 앨버트라고 합니다. 율리우스 영지의 기사대장입니다. 제라린 소영주님을 모시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차오성은 생각에 빠졌다.
‘음… 이제까지 탑에는 와 보지도 않던 사람들이 오늘 갑자기 왜 이렇게 나타난 거지? 영지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그리고 나는 정말로 제라린의 말처럼 그로 살아야 하는가?’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당황하던 차오성이 일단은 변화에 순응하리라고 마음먹었다.
차오성이 탑 밖으로 한 걸음 옮겼다. 앨버트를 비롯한 사람들은 탑 안에서 나오는 그를 당연히 제라린 소영주로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