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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라린 1(4화)
2. 탑에서 자란 제라린과의 만남(3)
밖으로 나오는 제라린을 보고 한곳에서 누군가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마, 말도 안 돼. 어떻게 살아남았지?”
청각이 예민한 제라린은 그의 말을 놓치지 않고 들었고 그의 앞에 멈춰 섰다.
앨버트가 뒤에서 소개를 했다.
“이분은 소영주님의 큰아버님이신 글라토스 자작님의 둘째 아들이신 데이빗 공자님이십니다. 소영주님의 사촌 형님이시죠. 이번에 영지의 위기 때문에 오셨습니다.”
제라린이 그에게 인사를 하자 그는 당황하면서 제라린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탑 안에서만 자란 제라린을 위해서 앨버트는 마차를 준비해 왔다. 마차에 탄 제라린에게 앨버트가 빠르게 이것저것 설명했다.
“지금 영지의 동쪽에 있는 클래치스 남작이 영지전을 신청했고 지금 우리 영지는 방어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니 클래치스 남작이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동안 잘 지내다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화난 말투로 빠르게 이것저것 설명하는 앨버트였기에 제라린은 완전히 알아듣기는 힘들었다.
‘음, 지금 영지가 누군가의 공격을 받는다는 말이군… 그리고 영지전은 또 뭐야?’
제라린이 모르는 것을 물어보려는 순간에 마차가 영주성에 도착했다.
영주성은 한 면이 약 30m가량의 사각형 형태였고 흙과 목재로 만들어진 대략 5∼6m 높이의 벽을 가진 요새였다.
제라린이 얼핏 알던 중세 시대의 성들이 가진 이중 성벽도 아니었고 해자, 도개교 등도 없는 그냥 볼품없는 요새였다.
하지만 군데군데 소형 방어탑과 망루가 세워져 있었고 그런 방어 시설에는 3∼4명의 군사들이 올라가서 경계를 서고 있었다. 영주성 내에서는 병사들이 이리저리 바쁘게 오가고 있었고 한곳에 대장간 같은 곳에서는 계속 철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제라린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렸다. 이윽고 영주성 내의 한 건물로 안내되어진 제라린은 참았던 질문을 던졌다.
“아, 아버님은?”
아직까지 제라린의 발음이 유창하지는 않았지만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다들 그가 탑 안에서 자랐기 때문에 사람들과 말을 많이 하지 못해 아직 조금 어색하다라고만 생각했다.
앨버트가 허둥지둥 대다가 마침내 토해 내듯이 말한다.
“영, 영주님은 이틀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제라린으로 살기로 결심한 그가 율리우스 남작을 대면했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에 앨버트의 말에 제라린은 무척 놀랬다.
“뭐라고? 무엇 때문에?”
“이틀 전에… 영지전을 수락하신다고 저녁을 드시면서 용병들과 계약 얘기를 하시다가 갑자기 쓰러지셔서… 그대로 돌아가셨습니다.”
제라린은 급히 율리우스 남작의 시신을 보러 영주관으로 가면서 물었다.
“평소에 지병이 있으셨던가요?”
“아닙니다. 항상 건강하셨습니다. 영주님께서는 그날 아침에도 칼을 휘두르면서 오만방자한 클래치스 남작의 목을 한 칼에 베어 버리겠다고 호통을 치시면서 저희 기사 여러 명과 대련을 하셨습니다.”
영주관은 영주성 한가운데에 있는 이층짜리 목조건물이었다.
백작급 이상의 고위 귀족들의 영주성에는 영주관이 돌로 지어져서 내성의 역할을 했다.
영주관에는 집사 휴렌이 에이런 시녀장을 비롯하여 약 이십여 명가량의 하인들과 하녀들을 거느리고 제라린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나타나자마자 에이런 시녀장이라는 여자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이고 도련님, 탑 속에서 얼마나 고생하셨어요? 영주님도 참 무심하시지… 도련님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날 이때까지… 흑흑흑.”
그녀 옆에 있던 50대 초중반 정도의 휴렌 집사가 그녀를 말렸다.
“흠, 흠… 에이런 시녀장. 여기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소. 도련님, 이쪽으로 가시지요.”
그렇게 휴렌 집사가 율리우스 남작이 안치된 관이 있는 지하로 제라린을 안내했다.
특이하게 이들은 소영주라고 부르던 앨버트 경과 다르게 제라린을 도련님이라고 불렀다.
지하의 관 속에는 40대 중반의 남자가 누워 있었다.
차오성이 아는 제라린과 많이 닮은 흑발에 오뚝한 콧날, 검은 구레나룻을 가지고 있는 남자였다. 어떻게 보면 차오성과도 많이 닮았다.
제라린이 자세히 시신을 살폈지만 고탑 속의 노인과 같은 증상은 없었다.
전문적인 의료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자연사한 것과 같았고 이미 부패가 진행되고 있었다.
제라린은 확인해야 할 사항이 많은 것을 느끼고 기사대장인 앨버트에게 하나하나 확인을 했다.
“영지전이란게 무엇인가요?”
탑에서 자란 제라린이 이런 것들은 잘 모른다고 생각한 앨버트가 자세하게 설명했다.
“영지전이란 귀족 간에 다툼이 발생했을 경우에 서로의 영지를 걸고 공격하는 전쟁입니다. 공격하는 영주가 이길 경우에 상대 영주의 모든 것을 가지지만, 방어하는 영주가 방어에 성공할 경우 공격하는 영주의 사과와 함께 일정 부분 보상금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영지전은 우리 영지 동쪽에 있는 클래치스 남작이 신청했습니다. 영주님께서 영지전을 허락한 게 5일 전이니 이제 2일 후부터 시작되어서 일주일 동안 진행됩니다.”
궁금한 점이 많았던 차오성, 아니 제라린이었기에 여러 가지를 물었다.
“방금 영지전을 신청한다고 했는데 그러면 거절을 할 수가 있소?”
“예, 물론 거절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거절한 귀족의 명예는 땅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고위 귀족이 군사력이 약한 하위 귀족에게 영지전을 신청하면 하위 귀족은 거절해도 별 상관은 없죠.”
앨버트가 수비하는 귀족의 응원군에 대해서 설명했다.
“남작과 남작의 영지전 시 수비하는 남작은 외부의 용병을 고용할 수가 있습니다. 자작과 자작의 영지전에서 수비하는 자작측은 다른 자작령의 도움과 용병들을 고용할 수 있고요. 물론 공격측에서는 이런 외부의 도움을 일체 받을 수가 없습니다.”
앨버트 경에게서 들은 영지전 규약을 곰곰이 생각하던 제라린은 이내 이쪽 세계에서의 군사 분쟁에 대해서 이해했다.
‘음… 확실히 수비하는 귀족들에게 유리한 규칙이구나. 이렇게 서로의 명예를 걸고 싸우다가 적당한 시점에 타협을 하고 물러나겠군. 수비하는 쪽도 무리할 필요가 없고 공격하는 쪽도 마찬가지고…….’
“그렇다면 영지전의 승패는 어떻게 결정이 나는 것이오?”
“영지전은 영주가 죽거나 사로잡히는 경우, 혹은 영주성이 함락되는 경우에 결정이 됩니다. 그래서 영지전에는 영주님들이 잘 참여를 안 합니다.”
제라린은 그다음에 바로 영지와 병력 현황을 파악했다.
영지민은 대략 2만 8,000명 정도였고, 상비군인 군사들은 약 300명이었다. 그리고 기사들은 기사대장인 앨버트 경까지 포함해서 총 7명이었다.
영지내의 3군데 방어 거점에 분산된 기사 3명과 병사 약 120명을 제외하고 현재 본성에는 기사 4명과 병사 180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리고 죽은 제라린으로 부터 듣지 못했던 영지 주위의 상황에 대해서도 확인했다.
제라린은 단지 책과 함께 있던 노인으로부터 들은 지식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약 20여 년 전에 벌어진 아시렌 왕국 북쪽에 위치한 케로노스 제국과의 일전에서 일개 기사로 출전한 율리우스 남작이 큰 공을 세웠기에 남작 작위와 함께 국왕으로부터 영지를 하사받았다.
아시렌 왕국은 마이센 대륙의 남쪽에 위치해 있고, 율리우스 영지도 아시렌 왕국의 남쪽 끝머리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남쪽에 접한 주노 자작령을 가로질러 약 7일 정도를 남쪽으로 내려가면 바다를 만날 수 있고 그 주위의 아센 강의 하류에는 라르고 백작령이 있었다.
라르고 백작령은 다른 백작령에 비해서 작았지만, 아센 강과 바다를 이용한 무역으로 발달한 라르고 시티가 있었고, 라르고 백작은 라르고 시티에서 나는 세금으로 백작령에 걸 맞는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율리우스 남작의 형인 글라토스 자작이 다스리는 영지가 있고 그 영지는 마이센 대륙의 젖줄기라는 아센 강이라는 거대한 강을 접하고 있었다.
율리우스 영지의 북쪽은 유마하 백작령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동쪽에는 이번에 영지전을 걸어온 클래치스 남작령이 있었다.
그런 사정을 파악한 제라린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휴… 덩 중위가 얘기하던 판타지 세계는 나라의 외곽에 위치해서 마물들만 격퇴하면 넓은 대지를 가져서 발전할 수 있는 곳이었는데… 이곳은 주위가 다른 영지로 둘러싸인 겨우 사방 80km 남짓의 작은 영지. 게다가 이틀 뒤에는 영지전으로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신세구나. 하하. 어처구니가 없구나.’
율리우스 영지의 대부분은 밀농사를 하는 밭과 숲으로 된 평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산맥을 파기만 하면 광물이 나오는 그런 꿈같은 얘기는 정말 꿈조차 꿀 수가 없었다.
“적의 병력은 어느 정도 되나요?”
“클래치스 남작의 병력도 여기와 비슷한 규모입니다. 기사가 10명이고 상비군이 대략 사백 명 정도 입니다.”
앨버트의 말에 위안을 가진 제라린은 일단 영지전이 벌어지는 일주일만 버티자는 심정을 가졌다.
그날 밤, 손님용 방에 머물고 있는 데이빗이 제라린이 무사히 탑에서 나온 것에 무척 놀라고 있었다.
‘음… 자객들이 복귀하지 못해서 그놈이 안 죽은 줄은 알았지만, 저렇게 멀쩡하게 살았을 줄은 몰랐군. 그 늙은 하인의 칼솜씨가 좋았나? 탑에서만 자란 제깟 놈이 검술 솜씨가 좋을 리는 만무하고…….’
그러다가 현재의 문제에 대하여 고민을 했다.
“그러나저러나 영지전을 신청 받은 상태에서 작은 아버지가 죽고 고탑 안에 있던 제라린까지 죽었으면 여기의 가신들한테 내가 쉽게 영주로 추대를 받을 수 있었을 텐데… 많이 아쉽군. 하지만 제라린 저놈은 탑 안에서만 살았던 18살의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다. 틀림없이 클래치스 영지의 병력이 근처로 와서 무력시위를 하면 겁에 질릴 터… 그때 좋은 말로 영주 자리를 양도 받으면 될 거야. 하하하.’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그는 편지를 쓴 다음 데리고 다니던 시종을 불러서 무언가 귓속말을 했다.
그 후 시종은 급히 어디론가 떠났다.
아침 일찍 일어난 제라린은 간단한 체조로 몸을 풀고 바로 투핸드소드를 휘둘러서 몸에 익혔다.
요즘은 틈만 나면 이 검을 휘두르면서 검술을 익히기 바빴다.
‘음… 빨리 화약을 만들어야지 이런 전근대적인 병기를 더 안 쓰지, 이번 위기만 넘기면 바로 만들자.’
제라린은 영주성의 곳곳을 다니면서 방어 시설을 점검하고 어떤 구조인지를 익히고 있었다.
영주성 내에 있는 상비군들은 대부분이 동물의 가죽을 이용해서 만든 래더아머를 입고 약 180cm의 갸량의 스피어를 들고 군사훈련을 받고 있었다.
제라린과 인사했던 30대 후반의 턱수염을 기른 기사 켄스가 병사들에게 창의 사용법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었다.
병사들도 영지전이 다가와서 그런지 눈을 반짝이면서 진지하게 훈련에 임하고 있었다.
제라린이 잠시 살펴보니 대부분 찌르기 위주의 단순한 사용법이었고 켄스는 창대를 두 손으로 잡는 법과 찌르는 법, 그리고 농성전을 감안했는지 위에서 아래로 효과적으로 찌르는 법 등을 집중적으로 가르치고 있었다.
제라린이 그런 모습을 잠시 살펴보자 켄스 경이 눈인사를 살짝 했다.
그는 체인 메일을 벗고 소매를 걷어 붙인 채로 훈련을 시키는 중이었는데, 드러나 팔뚝으로 근육들이 꿈틀거리는 근육질의 기사였다.
그리고 병사들이 자신이 지시한 대로 하지 않으면, 엄격하게 다시 자세를 잡고 처음부터 시키는 것으로 보아 매우 꼼꼼한 성격을 가진 것으로 보였다.
그에게 턱을 끄덕이면서 인사를 받은 다음 제라린은 자리를 옮겨서 궁병들을 살펴봤다. 궁병은 대략 십여 명 정도가 있었는데 대부분 망루에 올라가서 활과 화살을 점검하고 있었다.
제라린이 보기에 따로 지휘하는 사람도 없을 정도로 방치되고 있었다.
제라린이 한 궁병에게서 활을 건네받은 다음에 시위를 튕겨 보았다.
‘음… 이건 한 종류의 나무로만 만들어진 단일궁이군. 복합궁이 아니라서 그런지 별로 탄력이 없어. 사거리도 짧겠어.’
제라린에게 활을 건넨 궁병이 옆에서 설명을 했다.
“소영주님, 이 활 사거리는 약 100미터 정도입니다.”
제라린이 사정을 알아보니 궁병은 일반 창병보다 육성하기 어렵고 화살로 적에게 피해를 입히기도 쉽지 않기 때문에 남작과 자작과 같은 조그마한 영지에서는 전문적인 궁병 양성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제라린이 실제로 한 번 쏘아보자 활은 약 130미터 정도 날아가서 힘없어 떨어졌다.
제라린이 화살을 시위에 먹여서 방금 전보다 조금 더 당기려고 하자 활대가 부러질 듯이 위태로워졌다.
‘음, 정말로 활대의 탄성이 무척 낮구나. 이런 정도의 사거리라면 약 100미터가 최대 살상 거리겠군. 이번 전투에서 크게 기대하면 안 되겠어.’
그렇게 궁병 전력에 대해서 거의 포기하고 다른 방어 시설물을 살피는 제라린에게 앨버트가 건의를 했다.
“소영주님, 영주님께서 용병들과 계약을 맺으려다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는데, 소영주님께서 그들을 고용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러면 방어를 하는데 도움을 많이 받을 수가 있을 겁니다.”
새로운 세계에서의 첫 전투여서 내심 불안해하던 제라린 이었기에 반색을 하면서 말했다.
“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소?”
“저… 그게 영주님이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모두들 근처로 왔다가 소영주님의 백부님이 다스리는 서쪽의 글라토스 자작령으로 이동했습니다. 누군가를 보내서 빨리 협상을 하시면 됩니다.”
제라린은 영지에 대한 장부를 급하게 살폈다. 영지의 1년 수입은 대략 1천 골드였고, 현재 여유 자금이 약 600골드 정도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보석류들도 있었다.
일반 용병들은 1개월 고용하는 데에 대략 2∼3실버이기 때문에 고용하기에 충분한 자금이 있는 것을 안 제라린은 안토니라는 기사에게 병사 10을 인솔해서 용병들을 고용해 오라는 지체 없이 명령을 내렸다.
비록 하루 뒤에 벌어질 영지전의 시작까지는 그들을 데려올 수 없지만, 영지전의 후반부에는 충분히 도움이 될 거 같았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태였기에 지금은 아군의 전력이 된다면 무엇과도 손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