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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라린 1(5화)
2. 탑에서 자란 제라린과의 만남(4)
앨버트 경이 두 번째 제안을 했다. 이번에는 당장 도움이 되는 제안이었다.
“소영주님, 18세 이상 40세 미만의 영지민들을 징집하여 영주성의 방어력을 높여야 합니다.”
그렇게 율리우스 영지는 영지전을 하루 앞두고 영지민에 대한 징병을 실시했다. 하지만 이미 대부분 주민들이 영지전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영지의 경계 쪽으로 피난을 갔기 때문에 징병된 인원은 영주성 근처에 있는 큰 마을인 율리아노와 율리토에서 잔류하던 인원 300명이 고작이었다.
그런 상황을 보면서 데이빗은 미소를 지었다.
‘하하, 역시나 경험 없는 게 나타나는군. 벌써 징병을 했어야 했는데… 아마 실제로 전투가 벌어지면 제일 먼저 달아날 것이야. 하하하.’
대략 3,000명가량이 징병될 수 있을 거라는 앨버트의 말을 기대했던 제라린은 실망하였고 앨버트도 난감해했다.
“죄, 죄송합니다. 소영주님. 영지전을 결정한 후에 바로 이런 조치들을 취했어야 했는데… 영주님께서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다들 정신이 없어서…….”
“아니오. 우선은 징병된 사람들을 곳곳에 배치하고 징병을 위해서 밖으로 나간 병사들도 모두 안으로 들이도록 하시오. 더 이상 징병을 위해서 병력을 분산시킬 수는 없소.”
3. 클래치스 남작과의 영지전(1)
다음날 오후 척후병이 뛰어와서 거친 숨을 내쉬면서 보고했다.
“헉, 헉, 새벽 일찍 클래치스 군이 영지의 동쪽 경계를 넘어섰습니다. 병력은 대략 2,500명 정도였고 기사들은 7명이었습니다. 동쪽 경계를 지키던 칼릭스 경이 40명을 이끌고 응전에 나섰으나 대부분이 괴멸당하고 칼릭스 경은 전사했습니다. 적군은 오늘 저녁쯤에 도착할거 같습니다.”
척후병의 보고를 듣던 제라린은 한순간 자기의 잘못을 깨달았다.
‘이런 멍청한… 적보다 적은 전력인데 그런 아군 병력들을 한곳으로 모으지 않고 내가 너무 소극적으로 대처했어. 그리고 귀중한 기사도 한 명 그냥 죽이고…….
그러다가 기사대장인 앨버트에 대한 원망이 생겼다.
‘기사대장인 앨버트 경이 이 정도는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아무리 영주가 죽어서 우왕좌왕했다고는 하나 정말 너무 하는군. 아니지… 그보다 거기에 있던 기사가 물러서지 않고 맞서 싸워 죽은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그래도 이들의 충성심은 의심할 필요는 없겠군. 허, 이런 내가 너무한가?’
제라린은 불안했기에 그렇게 주위의 모든 것을 의심하는 자신에 대해서 냉소를 보내면서 후회를 했고 그의 옆에서 같이 보고를 듣던 앨버트가 척후병에게 물었다.
“적의 상비군은 얼마나 되던가?”
“예, 대략 삼백오십 명 정도 되었습니다.”
척후병의 말에 앨버트가 욕설을 내뱉었다.
“이런 미친! 영주성의 방어를 위해서 겨우 오십만 남겨 두고 대부분을 이끌고 나오다니…….”
제라린도 징병된 사람들의 수준을 보고는 상비군이 전력의 핵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았기에, 그의 심정을 이해했다.
‘음… 상비군이 겨우 170명 정도에 징집병까지 합쳐도 470명이다. 하지만 적은 상비군 350을 포함해서 총 2,500명… 고대의 병법에 성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3배의 병력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 상황은 방어하는 우리가 절대적으로 불리하다는 말이군.’
아직까지 이 세계의 전투과 전략, 전술 등을 자세히 몰랐기에 제라린도 영주성 밖으로 요격을 나가는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바로 고치기 시작했다.
“앨버트 경, 나머지 두 군데에 있는 기사들과 병사들을 이쪽으로 모아야 하지 않소?”
“예? 그쪽은 완전히 포기하는 건가요?”
“어차피 영지전을 벌이고 있는데 그쪽의 병력을 썩힐 필요는 없지. 병력을 집중해야 하오.”
제라린은 척후병이 가고 병력들이 영주성으로 급하게 온다고 해도 겨우 내일 오후에나 도착할 수 있다는 대답에 서로 병력을 합친 후에 무리하게 영주성으로 들어오지 말고 근처에서 관망을 하면서 기다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방어 태세를 점검하고 기사들과 병사들의 무장을 확인했다.
드디어 노을이 질 무렵 적들이 영주성 근처로 도착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래더아머를 입은 상비군이 350명 정도 되어 보였다. 그 외의 이천여 명의 징집병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영주성에서 약 5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가져온 천막을 치기 시작했다.
그런 징집병을 뒤로 하고 말을 탄 기사 7명이 상비군들을 데리고 영주성 앞 약 120미터 앞까지 진출했다.
화살의 사정거리 때문인지 체인 메일을 입은 기사들은 그쪽에 상비군들을 도열시켜 놓고 자신들만 말을 타고 앞으로 조금 더 나왔다.
제라린이 들은 바에 따르면 플레이트 메일은 대부분 부유한 백작 영지 이상의 일부 기사들이 사용한다고 했다.
그때, 40대 초중반 정도 되고 허리에 롱소드를 차고 있는 한 명의 기사가 앞으로 나서면서 소리를 지른다.
“나는 클래치스 영지의 기사 레이날이다. 율리우스 남작이 우리 클래치스 남작님을 모욕했기에 주신의 이름으로 영지전을 벌이겠다. 영지전을 피하고 싶으면 지금 당장 항복하라. 그러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제라린의 신호를 받은 앨버트가 그를 대신하여 대답했다.
“우리 율리우스 영지는 주신의 이름하에 클래치스 남작의 영지전 신청을 받았다. 지금이라도 너희들의 편협함을 깨닫고 돌아간다면 너희들의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이렇게 영지전이 시작되었다.
제라린은 약 5배가량 차이나는 병력의 열세 때문에 아군의 사기가 급격하게 떨어지는 것을 깨달았다. 그 와중에 적의 기사들은 돌아가지 않고 앞에서 계속 욕을 했고 그들이 욕을 할수록 아군의 사기는 더 떨어졌다.
“이런 망할 율리우스 영지 놈들아. 너희들은 겁쟁이냐? 왜 영주성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안에 숨어 있느냐? 이런 빌어먹을 겁쟁이 놈들아!”
앨버트 경과 다른 기사들인 켄스, 글랜 등이 마주 고함을 지르고 욕을 했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일단 병력이 열세였고 영주성을 나가지 못하고 안에 있는 것은 누가 보기에도 불리했던 것이다.
성에는 지금 앨버트 경 외에 총 2명의 기사들이 있었는데, 켄스와 글랜이었다. 켄스는 제라린이 성을 둘러볼 때 병사들에게 창의 사용법을 알려 주던 기사였고 글랜은 20대 후반에 무척 급한 성격을 가진 기사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제라린의 병사들의 사기는 더 떨어졌다.
‘음… 이대로 저들이 오늘밤 푹 쉬고 나면 내일의 전투는 어렵게 되겠어. 이대로는 더 두고 볼 수는 없는데 무슨 방법이 없을까?’
이윽고 입술을 깨문 제라린이 암석을 주워서 들었다. 그것은 어른 주먹 두 개 정도의 크기로 한 손으로 겨우 감싸 쥘 정도였는데 병사들은 이것으로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군을 향해 두 손으로 들고 던지기 위하여 모아 두었던 돌들이었다.
제라린이 암석을 쥔 채로 전방을 지긋이 노려보았다.
그가 집중을 하자 눈앞에 조준경이 생기고 계속 욕을 하는 레이날 기사의 얼굴이 확대되었다.
‘삐. 목표물이 확대됩니다.’
청신경에 연결된 나노 컴퓨터의 소리가 들렸다.
차오성은 심호흡을 하면서 다시 한 번 암석을 만지작거렸다. 그러고는 오른쪽 어깨를 살짝 뒤로 돌리면서 긴장을 풀었다.
오른발을 뒤로 반발자국 빼면서 무게 중심을 뒤로 이동했다. 오른손을 머리 위로 올리면서 왼팔을 앞으로 뻗쳤다. 상체를 최대한 뒤로 뺐다가 오른발로 몸의 무게를 이동하면서 오른손을 앞으로 던지듯이 뻗었다. 암석이 손을 벗어나 일직선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욕을 하던 레이날의 당황하는 얼굴이 눈에 들어 왔다.
퍽!
수박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암석은 레이날의 옆에 서 있던 기사의 얼굴에 정통으로 박히면서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앗!”
그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말에서 떨어졌다.
깊숙이 함몰된 그의 얼굴로 보아 살아날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모두 한순간의 일이었다.
클래치스 영지의 상비군들이 달려 나와서 떨어진 기사를 수습해서 뒤로 물러났다.
레이날과 다른 기사들도 놀래서 욕을 하면서 뒤로 물러났다.
“이런 비겁한 놈들아. 너희들이 기사냐? 누가 돌을 던진 거야? 이 빌어먹을 놈들아.”
그들은 화살의 사정거리 밖이라고 안심하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한 명의 기사를 잃었기에 황망해했다.
‘젠장, 역시나 투석 연습을 따로 했어야 했군. 이렇게 과녁을 빗나가다니. 뭐 하지만 더 이상 욕설이 들리지 않아서 좋군.’
그런 생각을 하는 제라린에게 앨버트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아니, 소영주님. 돌을 던지는 건 고귀하신 귀족의 예법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허어…….”
“영지전 규약에 귀족이 돌을 던지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소?”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귀족의 명예에 누가 됩니다.”
제라린은 앨버트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면서 다시 한 번 더 결심했다.
‘아직 영지의 전체 기사들을 다 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들은 오랜 관습으로 인해서 고리타분하고 정형적인 생각만을 한다. 앞으로 전투나 영지 경영에 이런 걸 감안해야 한다.’
제라린이 암석을 던져서 기사 한 명을 쓰러뜨리는 것을 보던 데이빗도 놀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니… 전투가 시작되면 분명히 도망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돌을 던져서 기사를 쓰러뜨려? 저놈 이제까지 탑에서만 갇혀서 자란 놈이 맞아?’
약 50여 미터 정도 뒤로 더 후퇴한 클래치스 남작의 기사들이 다시 욕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리는 멀었고 적의 기사 한 명이 쉽게 중상을 입었기에 병사들은 아까처럼 주눅 든 상태는 아니었다. 적들의 목소리는 점점 더 힘이 빠졌고 제라린이 다시 돌을 들고 던질 시늉을 하자 클래치스 영지의 기사들은 움찔하면서 재빨리 말머리를 돌려서 뒤로 더 물러났다.
그런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는지 성 위에 있는 병사들의 여기저기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터졌다.
“하하하.”
보초를 제외한 전 병력을 일찍 취침시킨 제라린이 밤에 앨버트를 조용히 불러서 물었다.
“내일 새벽에 야습을 하려고 하는데 어떻소?”
앨버트가 놀라서 되물었다.
“예? 야습요?”
“그래, 영지전을 할 때 야습을 해도 괜찮은 거지요?”
제라린은 혹시나 하는 심정에 앨버트를 불러서 물었다.
그가 아직 잘 모르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정말 중요한 관습에 어긋나서 전 왕국의 적이 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걸 금지한 규정은 없습니다. 하지만 명예로운 귀족이 야습이라뇨? 안 됩니다.”
역시나 관습적으로 반대하는 앨버트를 보면서 제라린이 결정을 내렸다.
“지금은 죽고 죽이는 전쟁이오. 그런 걸 금하는 관습이 없다면 나는 야습을 해야겠소. 새벽 4시에 쳐들어갈 테니까 그때까지 병사들을 준비시켜 놓으시오.”
이걸 감안해서 병사들도 일찍 재운 거였다.
새벽 4시.
율리우스 영주성의 문이 조용히 열렸다. 제일 앞에는 제라린을 비롯하여 상비군 170명이 도열해 있었다.
그 다음에 징집병 300명이 기다란 막대기를 들고 있었다.
어차피 별 도움은 안 되겠지만 기세를 올리는 데는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대열을 이루도록 한 것이었다.
그리고 3명의 기사들이 말을 타고 기다리고 있었다.
제라린은 어차피 말을 못 탔기에 상비군들을 이끌고 먼저 적진으로 쳐들어가고 기사들은 말발굽 소리를 죽이면서 접근하다가 동시에 타격을 들어가기로 전술을 짰던 것이다.
앨버트는 제라린이 앞장서는 것을 반대했지만, 제라린은 이번에도 역시나 그의 말을 무시했다.
투핸드소드를 굳게 잡은 제라린이 제일 먼저 나서자 말을 못하게 하기 위하여 입에 나뭇가지를 하나씩 문 상비군이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역시나 나뭇가지를 물고 있는 징집병들이 소리를 죽이면서 성문을 나섰다.
이미 30분 전에 깨워서 제라린은 이들에 대한 정신 교육을 단단히 시켰다. 소리를 죽인 상태로 이번 야습이 제대로 성공하지 못하면 대부분 허무하게 죽거나 병신이 될 것이고 병사들의 누이와 어머니들은 강간을 당할 것이라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그래서인지 모두의 눈에서 강인한 의지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