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제라린 1(6화)
3. 클래치스 남작과의 영지전(2)
영주성에서 약 500m 전방에 설치된 클래치스 영지군의 숙영지에 도착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비록 뒤늦게 보초병들이 고함을 외쳤지만 이미 율리우스 영지군이 진지 내로 난입한 뒤였다.
‘음… 경계 근무도 엉망이군. 이들만 이런 게 아니라 우리 율리우스 영지군도 똑같겠지. 나중에 제대로 교육시켜야겠어.’
자신의 영지군에 전혀 환상을 갖지 않은 제라린은 투핸드소드를 위로 쳐들고 외쳤다.
“돌격!”
그의 명령에 상비군과 징집병들이 동시에 고함을 지르면서 앞으로 뛰어갔다.
“와!!! 와!!!”
당연히 입에 문 나뭇가지가 밑으로 떨어졌지만 거기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갑작스런 고함 소리에 클래치스 영지의 병사들이 천막에서 황급히 뛰어나왔지만 곧 병사들의 창에 맞아서 나뒹굴었다.
제라린은 그대로 상비군을 이끌고 클래치스 영지군의 중심부로 내달렸다. 역시나 주변의 천막과는 다른 대형 천막 7개가 중앙에 모여 있었다.
중심부로 오면서 시간이 약간 지체되었는지 체인 메일을 걸친 몇몇의 기사들이 롱소드를 들고 천막 밖으로 뛰쳐나왔다.
조금 전부터 제라린의 뒤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앨버트가 다른 두 기사를 이끌고 거의 도착한 것이다.
달려가던 제라린이 앞에 선 적의 기사 한 명을 보고 두 손으로 잡은 투핸드소드를 치켜세우고 그대로 높이 도약했다.
한 손으로도 휘두를 수 있지만 그래도 두 손이 더 강한 힘을 내기 때문이었다.
클래시스 영지의 기사 멕더비는 깜짝 놀랐다.
투핸드소드를 쥐고 달려오던 적의 기사(?)가 높이 뛰어올랐기 때문이다. 2∼2.5미터 정도? 이것은 인간이 뛰어오를 수 있는 높이가 아니었다.
그래서 멕더비는 자기가 두려움 때문에 잘못 본 것이라고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면서 롱소드를 들어서 머리 위를 막았다.
아무리 적의 기사가 높이 뛰어올라 내리쳐도 반드시 막을 수 있다는 생각과 함께 그는 두 손에 힘을 잔뜩 주었다.
제라린의 몸이 허공에서 최고점에 도달한 이후에 빠르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제라린은 투핸드소드를 쥔 두 손에 힘을 더 넣었다. 적 기사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양손으로 잡은 검을 힘껏 내려 그었다.
‘쨍’하는 소리와 함께 기사가 든 검이 부러졌고 제라린의 검이 그대로 그의 어깨부터 아래로 일직선으로 베었다.
울컥.
적 기사가 한 모금의 선혈을 뱉었다.
그가 입은 체인 메일 밖으로도 피가 스며 나왔다. 그는 이미 반 토막이 된 검을 떨어뜨리며 서서히 쓰러졌다.
제라린은 적의 기사를 한 명 해치우고 주위를 둘러봤다. 그의 동작이 워낙 빨랐기에 그제야 말을 타고 도착한 앨버트 경과 켄스, 글랜 등이 천막 밖에 있는 적의 기사들과 접전을 시작했다.
제라린은 근처의 천막에서 밖으로 나오는 적의 기사 한 명을 발견하고는 다시 그에게 달려들었다.
투핸드소드를 쥔 채로 그에게 달려가던 제라린은 도움닫기 거리가 약간 짧다는 생각에 이번에는 도약을 하지 않고 그에게 그대로 돌격했다.
그 기사는 조금 전에 제라린이 다른 기사를 쓰러뜨리는 것을 보았는지 아주 신중하게 대응했다.
제라린은 오른손으로 검을 잡고 앞으로 찔러 넣었다.
천막 밖으로 나온 기사인 클래치스 영지의 아크론은 처음에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약 2∼2.5미터가량 높이 점프를 한 적의 기사가 멕더비의 검부터 체인 메일을 입은 몸을 일격에 베어 버린 것이었다. 그의 강력한 일격을 보고 힘이 무척 좋은 상대라고 생각하고 신중하게 대응했다.
아쉽게도 적의 기사는 이번에는 도약을 해서 공격하지 않았다. 만약에 그랬다면 멕더비가 당하던 것을 보았으니까 아크론은 몸을 살짝 피했다가 옆에서 공격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적의 기사가 그대로 찔러오는 검을 아크론은 정면으로 부딪히지 않고 몸을 피하면서 검을 그대로 옆으로 흘렸다.
제라린은 달려가던 기세 그대로 검을 찔렀다.
그런데 적이 검을 마주치는 듯이 하다가 그대로 제라린의 검을 옆으로 피하는 것이었다.
제라린의 검이 갑자기 목표를 잃었다. 입술을 깨문 제라린이 찔러가던 검의 방향을 바꾸었다.
양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팔이 아팠다. 하지만 앞으로 찌르던 검이 빠른 속도로 왼쪽으로 휘둘러졌다. 짧은 거리였기에 원심력은 이용할 수 없었고 오로지 팔의 힘으로만 바꾼 결과였다.
적은 자신의 눈앞에서 검의 궤적이 바뀌자 당황했다.
그는 검을 세워 막지도 못하고 그대로 자신의 목에 일격을 허용했다.
“켁!”
제라린은 휘두른 검에 그가 비명을 지르면서 쓰러졌다.
입으로는 한줄기 핏줄기를 뿜었다.
아크론은 적이 찌르던 검을 다시 회수할 줄 알았는데 상대는 찌르던 기세 그대로 옆으로 베어왔다.
‘헉… 이럴 수가. 인간의 움직임이 아니야. 어떻게 찌르다가 그대로 벨 수가 있지?’
그것이 아크론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한 생각이었다.
“켁!”
제라린은 쓰러지는 적의 기사에 다가가서 그의 몸을 발로 찼다. 몸을 꿈틀거렸지만 일어서지는 못했다.
확인 사살까지는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제라린은 다시 장내를 살폈다. 주위에서는 그의 기사들과 클래치스 영지의 기사들이 여전히 싸우고 있었다.
말을 탔기 때문인지 앨버트, 켄스, 글랜 등은 우세하게 싸우고 있었지만 이들의 무력이 평범한지 상대의 실력이 좋은 건지 아직까지 적들을 확실히 쓰러뜨리지는 못하고 있었다.
‘음… 지금 싸우는 놈들이 세 놈, 그리고 내가 방금 쓰러뜨린 게 두 놈. 어제 저녁에 돌 맞고 뒈진 놈이 한 놈. 분명히 일곱 놈들이었는데 한 놈이 어디로 사라졌지?’
잠깐 적의 기사를 찾던 그가 마지막 기사를 찾을 수가 없자 다시 기사들의 전투로 시선을 돌렸다.
‘음… 도와줘도 되나? 유리하게 싸우고 있어서 별 문제는 없을 거 같은데… 기사들끼리 싸우는데 옆에서 괜히 도와줬다가 기사들의 명예가 어쩌고저쩌고 하면 귀찮아지는데…….’
그렇게 새로운 세계의 관습을 몰라서 고민하던 그는 싸우는 기사들을 두고 전황을 살펴봤다.
병사들끼리 싸우는 전장도 대부분 율리우스 영지의 병사들이 압도했고 클래치스 병사들은 도망가기에 바빴다.
그런데 몇몇 곳에는 적의 병사들이 뭉쳐서 저항하는 곳도 있었다. 아무래도 숫자가 월등히 많으니까 도망가는 와중에 저렇게 발작적으로 뭉쳐서 저항하는 것이었다.
제라린은 그런 곳으로 뛰어들면서 투핸드소드로 거칠게 좌우로 휘저었다. 그의 칼에 맞은 병사들의 창들이 우수수 부러졌다. 창촉은 쇠로 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창대는 나무로 만들어져 있기에 옆에서 치는 칼에 무척 약했다.
그가 휘저어 주자 이내 클래치스 영지의 병사들은 저항을 멈추고 항복했다. 어떤 곳은 체인 메일을 입은 그가 나타나자마자 바로 창을 던지고 항복하는 병사들도 있었다.
모두들 전장의 최종 병기라는 기사들을 두려워했다. 비록 제라린은 말을 타고 있지는 않았지만 체인 메일을 입은 그를 모두들 기사로 알고 있었다.
드디어 기사들 간의 전투도 끝났다. 앨버트 경이 약간의 상처를 입었지만 세 명 모두 커다란 상처 없이 적 기사들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기사와의 전투에서 이겨서 그런지 세 명 모두 의기양양한 모습을 보였다.
제라린은 서둘러서 병사들을 반원형으로 포위해서 마지막으로 저항하는 글래치스 병사들을 사로잡게 했다.
“창을 버려라. 무기를 버리면 살려 준다.”
“항복하라. 항복하면 살려 준다.”
어느새 도망가는 클래치스 병사보다 항복하는 병사들이 많아졌다.
성으로부터 끈을 가져온 징집병들이 이들을 묶어서 호송했다.
어느새 동이 떠오르고 있었다.
한쪽에서 묶여서 호송되는 적의 병사들을 뒤로하고 제라린이 앨버트에게 질문을 하고 있었다.
“앨버트 경, 이제 영지전이 끝난 것이오?”
“예, 이렇게 적 병력을 크게 깨뜨리고 기사들도 대부분 죽이거나 사로잡았으니 클래치스 남작도 남은 영지전 기간 동안 다시 싸움을 걸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의 말에 약간은 안심한 제라린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내가 이대로 쳐들어가는 것은 어떻소?”
“예? 영지전이 끝났는데요. 이대로 사과와 함께 배상금을 받으시면 되는데요.”
“아니, 만약에 내가 클래치스 영지로 쳐들어가도 이곳 관습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오?”
“예, 물론 그런 관습에 위배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앨버트 경의 말을 듣던 제라린은 그들이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이미 자기에게 이빨을 내민 자들이 있는데 배상금만 받고 물러나라니……. 2∼3년 후에 또 영지전을 신청해 올지 모르는 적을 그냥 둘 수는 없다고 제라린은 판단했다.
“만약에 내가 클래치스 영지를 쳐서 그곳 영주를 사로잡거나 영주성을 함락시키면 어떻게 되오? 그곳 영지가 내 것이 되오?”
제라린의 질문이 무척 의외였는지 앨버트는 놀라면서 대답했다.
“예? 보통 영주전을 신청한 귀족이 수비하는 영주를 전사시키거나 사로잡거나, 영주성을 함락시키면 그 수비하는 영주의 영지를 보통 가지게 되죠. 마찬가지로 수비하는 영주가 공격하는 영주를 사로잡거나 죽이면 그 영지를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쪽 영지를 직접 공격하는 건 옛날에나 몇 번 있었고 근래에는 거의 없었습니다.”
역시나 관습에 얽매인 그의 대답을 들으면서 제라린은 생각을 정리했다.
‘음… 그래서 공격하는 귀족 중에는 영주가 포함되지 않는 모양이군. 영주가 사로잡히거나 죽으면 바로 영지전을 패하는 것이니… 일단 내가 클래치스 영지를 치는 거는 오래된 관습에 어긋나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면 이번에 클래치스 영지를 쳐서 완전히 복속을 시켜야겠다.’
그렇게 결심한 제라린은 서둘러서 성으로 들어가는데 말을 탄 데이빗이 시종 두 명을 데리고 막 성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어디를 가는 것이오?”
무뚝뚝한 제라린의 음성에 데이빗이 화들짝 놀라면서 말에서 떨어질 뻔했다.
“응? 응… 응… 막 아버님이 편찮으시다는 전갈을 받아서 지금 글라토스 영지로 돌아가는 것이네. 참 오늘 새벽에 대승을 했다면서… 축하하네… 난 바빠서 이만…….”
그렇게 허겁지겁 인사를 한 데이빗이 서둘러서 성을 떠났다.
‘헉… 미치겠네. 저놈 탑에서만 자랐다는 놈 맞아? 어떻게 그렇게 과감하게 공격할 수가 있지? 탑에서만 자라서 이 세상 관습을 잘 몰라서 그런가? 보통 기사들이라면 명예를 떨어뜨리는 일이라고 야습 같은 건 생각도 못할 텐데… 참 그게 문제가 아니다. 모든 계획이 틀어졌다. 서둘러서 아버님께 이 사실을 말씀드려야 한다.’
허둥지둥 성을 떠나는 데이빗을 차가운 눈으로 쳐다보던 제라린이 바로 성으로 들어가서 휴렌 집사를 찾았다. 이윽고 그의 앞으로 온 휴렌 집사에게 제라린이 엉뚱한 말을 했다.
“휴렌 집사, 집사가 해 주어야 할 일이 있소. 지금 당장 병사 20기를 이끌고 클래치스 남작에게로 가시오. 그리고 이번 영주전은 그쪽의 패배로 끝났으니 적당한 배상금을 지불하라고 하시오.”
“예? 제가 가서 배상금 문제를 협상하라고요? 아니, 기사님들이 안 가시고 제가요?”
기사들은 제라린이 따로 쓸 목적이 있었기에 휴렌 집사보고 가라고 한 것이었다.
그리고 휴렌 집사가 실질적인 배상금 협상을 할 필요는 없었다.
“아니, 휴렌 집사는 병사들을 이끌고 가면서 만나는 클래치스 영지군에게 이제 배상금만 받으면 영지전이 끝난다는 말을 하면서 그쪽으로 가시오. 그리고 만약 그쪽 병사들과 같이 가게 되거든 그쪽 영주성에 도착하기 전에 배가 아프다거나 무슨 변명을 대어서라도 그 무리를 빠져나오시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상황을 살피면 내가 전령을 보내리다.”
“아니, 도련님도 같이 가시게요? 조금 있다가 출발하시는 건가요?”
“어허, 시키는 대로만 하고! 빨리 출발하지 않고…….”
그런 제라린의 재촉에 휴렌 집사는 병사 20기를 이끌고 급히 클래치스 영지로 떠났다.
가면서 제라린의 말대로 영지전의 배상금 문제로 간다는 얘기를 만나는 클래치스 병사들에게 했고 허겁지겁 도망가던 그들도 이제 영지전이 끝났다는 생각에 느긋하게 대열을 이루면서 회군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