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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라린 1(7화)
3. 클래치스 남작과의 영지전(3)


휴렌 집사를 보낸 제라린은 서둘러 영주성 내의 모든 마차와 수레들을 징발했다.
모두 7대의 마차와 수레들이 모였다.
영주 소유의 마차는 그나마 지붕이 있고 사람이 탈 수 있는 공간이 있었지만, 나머지는 짐만을 실을 수 있는 수레였다.
제라린은 앨버트 경을 비롯한 기사들과 가려 뽑은 정예 병사 30기를 마차와 수레에 태워서 클래치스 영지로 출발했다.
출발하기 전에 오늘 오후에 도착할 두 기사인 토마스와 앨버트 주니어에게도 한 명은 이곳에 남아서 영주성을 방어하고 나머지 한 명은 병력을 이끌고 클래치스 영주성으로 응원을 오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출발한 제라린.
처음에 출발할 때 말을 탈지 마차를 탈지 고민하던 제라린은 이윽고 결심을 하고 영주 소유의 말들 중에 제일 온순한 놈을 골라서 탔다.
‘그래, 이곳에서는 앞으로 계속 말을 타야 할지도 모르는데 이번 기회에 배워 보자. 내 신체 능력이 있으니까 말 타는 것도 어렵지는 않을 거야.’
마구간 지기가 말의 고삐를 꽉 잡아서 말을 움직이지 못하게 한 다음 제라린이 왼발로 등자를 밟고 몸을 솟구치면서 오른발을 커다랗게 휘둘러서 멋지게 안장에 엉덩이를 놓았다. 그리고 병력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출발.”

클래치스 영지로 가는 제라린의 병력들은 바로 가지 않고 약간 우회를 했다. 휴렌 집사 때문에 느긋하게 가는 클래치스 영지군들과의 접촉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걸어서 이틀 거리, 율리우스 영지 경계까지 하루, 그 이후 클래치스 영주성까지 하루 거리인데 모두들 말, 마차 혹은 수레에 타고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 저녁에는 클래치스 영주성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어느덧 율리우스와 클래치스 영지의 경계에 도착한 제라린의 병력들.
제라린은 지금 마차를 타고 있었다. 처음에는 멋지게 말을 타고 출발했지만 흔들리는 말 위에서 몸의 중심을 잡기가 무척 힘들었다. 그리고 흔들리는 말과 리듬을 맞추어서 엉덩이에 대한 부담감을 최소화시켜야 했지만 제라린은 아직 그런 기술들을 갖지 못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두 다리에 힘을 잔뜩 주고 거의 반쯤 일어난 것처럼 엉덩이의 아픔을 피했지만 그런 말위에서 하는 진짜 기마자세는 곧 다리의 아픔을 가져왔고 곧이어 안장과 엉덩이가 서로 부딪히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래도 제라린은 이를 악물고 참다가 앨버트 경의 권유로 마지못해 마차로 자리를 옮겼었다.
“하하, 소영주님. 그렇게 무리를 하시다가는 이따가 전투에서 싸우지 못합니다. 엉덩이에 피멍이 들면 제대로 서지 못하고 어기적거리면서 걸어야 하거든요. 하하하.”

이윽고 병력들이 클래치스 영지로 진입했다.
그 후에는 일부러 인적이 드문 길로 돌아서 갔다.
클래치스 영지의 들판에 밀들이 익어서 곧 추수가 가까워졌지만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이천 여 명을 징집했기 때문인지 들판에 나온 사람들은 노약자 혹은 아이들과 여자들이 전부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제라린은 일행들에게 위장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말을 탄 기사들은 체인 메일을 벗고 래더아머만 입은 채로 용병 행세를 했고 수레에 탄 병사들도 창을 바닥에 숨기고 헝겊을 늘어뜨려 수레의 뒷부분을 짐으로 위장했다.
얼핏 보기에 짐을 나르는 상단이었다.
그렇게 율리우스 영지군은 빠르게 이동했다.

드디어 클래치스 영주성 서남쪽 2km 도착한 율리우스 영지병
영지병들과 기사들에게 휴식을 취하면서 식사를 하도록 지시한 제라린이 마차 속에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음… 클래치스 영지병 잔당들은 내일 오후 정도에 도착할 것이다. 그들은 서쪽에서 접근할 것이다.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지금 휴식 후에 바로 클래치스 영주성을 치는 것과 내일 클래치스 영지병의 잔당을 격파하고 그 여세를 몰아서 영주성을 치는 것… 둘 다 일장일단이 있어.’
고민하는 제라린에게 병사 하나가 식사를 가져 왔다. 짙은 수프와 커다란 빵 덩어리, 그리고 약간의 고기였다. 그것들을 먹으면서 고민을 하던 제라린은 이윽고 결심을 했다. 그리고 병사들의 휴식이 충분하다고 판단하고 바로 전투 준비를 시켰다.
어느덧 해가 저물고 있었다.

곧 영주성의 문이 닫힐 시간인 것을 안 제라린은 적절한 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문이 닫히기 직전 어둠이 내려앉을 때에 병력의 이동을 명했다.
클래치스 영주성도 율리우스 영주성과 비슷한 크기와 모양이었다. 대부분 흙과 목재로 지어졌으며, 약 5∼6미터 정도의 높이에 몇 개의 망루가 있을 뿐 해자도 없고 이중 성벽 혹은 이중 문도 아닌 매우 허술한 상태였다.
하지만 공성병기를 가져오지 않은 제라린이었기에 들키면 지금 병력으로 공격을 하는 게 무척 어려워진다. 그래서 최대한 위장을 하고 수비병들이 눈치를 못 채게 접근했다.
마차 1대, 수레 6대, 말 탄 용병 3명의 상단으로 위장한 일행들이 천천히 영주성으로 다가갔다. 어둠이 짙어지고 있었기에 더더욱 그들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적당한 속도로 영주성에 앞에 도착한 제라린 일행들. 성문 앞에는 검문을 하는 병사들이 있었지만 다가오는 상단 무리들에게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병사들의 대장은 상인이 찔러 줄 약간의 뇌물에 오늘밤 부하들과 술을 마실 생각에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졌다.
수비병 대장은 창을 든 대부분의 병사들과는 달린 옆구리에 숏소드를 차고 있었고 그가 입은 래더아머도 다른 병사들과는 달리 상당히 튼튼해 보였다.
마차의 마부석에서 래더아머만을 입고 앉아 있던 제라린이 바닥에 놓인 투핸드소드를 뽑고 뛰어내리며 병사들의 대장처럼 보이는 인물에게 칼을 내리그었다. 그리고 동시에 외쳤다.
“쳐라.”
무방비로 마차 옆으로 다가가던 수비병 대장은 검을 내리긋는 제라린의 행동에 놀란 나머지 눈을 동그랗게 뜬 상태로 몸이 두 개로 나눠지고 그 사이로 피가 솟구쳤다.
수비병 대장의 바로 앞으로 착지한 제라린이 솟구치던 그의 피를 그대로 뒤집어 섰다.
그와 동시에 마차와 수레에 숨어 있던 병사들이 창을 꺼내 들고 주변 병사들을 위협했고 말을 탄 기사들도 롱소드를 뽑고 전투에 참가했다.
하지만 그전에 이미 자기들 대장의 몸이 두 개로 갈라지고 피를 뒤집어쓴 제라린의 모습을 본 수비병들이 금방 전의를 잃고 창을 떨어뜨리고 항복을 했다.
곧 병사들이 수비병들의 손과 발을 묶고 입에 재갈을 물렸다. 그리고 제라린은 그대로 전병력을 이끌고 영주관으로 향했다.
여기에 일부 병력을 남겨서 퇴로를 확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미 적의 영주를 잡는데 전력을 쏟아부을 것을 결심했기 때문이다.

병력을 이끌고 영주성 안으로 난입한 제라린. 피를 뒤집어쓴 그를 보고 안에 있는 사람들이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앞을 막는 병사들이 몇몇 있었지만 제라린이 투핸드소드를 몇 번 휘두르자 창대와 함께 그대로 갈라졌다.
이 좁은 영주성의 안에도 율리우스 영주성처럼 일반 민간인들은 살지는 않았다. 병사들 아니면 대장간, 마구간등 영주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 혹은 하인과 하녀들 그리고 영주의 가족들만이 안에서 살 수 있었다.
앞을 막는 병사들은 거침없이 베어 넘기면서 제라린은 영주관으로 일직선으로 달렸다.
앨버트를 비롯한 기사들과 상비군 30기도 그의 뒤를 바짝 쫓았다.
제라린이 영주관에 도착하자 포동포동하게 살이 찌고 리넨으로 만들어진 셔츠에 튜닉과 겉옷까지 걸쳤고 여러 개의 반지들을 손가락에 낀 중년의 귀족이 체인 메일을 입은 한 기사의 호위를 받으면서 막 나오고 있었다.
그가 클래치스 남작임을 직감한 제라린이 외쳤다.
“네가 클래치스 남작인가?”
잔뜩 묻은 피는 이제 더 이상 떨어지지 않고 제라린의 얼굴과 몸에서 말라 가고 있었다.
혈귀 같은 기색의 제라린을 보면서 클래치스 남작이 놀라 고함을 질렀다.
“네, 네놈은 도대체 누구냐? 도적 떼들이냐? 이놈들, 무엄하구나. 감히 나의 영주성으로 쳐들어오다니… 죽고 싶어서 환장했구나.”
상황 파악이 제대로 안 된 그의 말에 제라린은 순간 멍해졌다. 그러고는 자신들을 한번 훑어보았다.
래더아머만 입고 투핸드소드를 들고 얼굴과 몸에 피를 묻힌 자신이나, 역시 래더아머만 입고 롱소드를 든 앨버트를 비롯한 기사들은 무척 흉악하게 보였다.
비록 뒤에 있는 병사들만이 용병들이 잘 쓰는 소드가 아닌 장창을 들고 있었지만 그들도 짐수레에 타고 왔기에 온몸에 지푸라기를 잔뜩 묻힌 영락없는 도적 떼 몰골이었다.
“하하하.”
그의 말에 잠시 헛웃음이 터뜨린 제라린이었지만 바로 정신을 다잡고 매섭게 말했다.
“나는 율리우스 영지의 제라린이다. 너의 영지전 신청을 받아서 이렇게 달려왔다. 우리 영지전 한 번 화끈하게 해야지?”
“뭐, 뭐야? 율리우스 영지라고? 거짓말하지 마라. 거기에는 나의 충성스러운 기사들과 병사들이 공격하고 있다. 도적놈들이 허황된 소리를 하는구나.”
“하하, 그들은 모두 죽거나 사로잡혔다. 너는 그들을 다시는 볼 수가 없을 것이다.”
“뭐, 뭣이라? 그런 말도 안 되는…….”
제라린의 말을 믿지 못하는 클래치스 남작에게 앨버트 경의 얼굴을 알아본 적의 기사가 남작의 귓가에 조용히 소곤거렸다.
바로 인접한 영지였기에 몇 번의 왕래를 통하여 서로 의 얼굴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제야 제라린의 말을 믿었는지 클래치스 남작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런 그를 보면서 제라린이 명령을 내렸다.
“모두들 영주관을 에워싸라. 한 놈도 빠져나가게 하면 안 된다.”
“예!”
그의 명령에 상비군 30명이 영주관을 에워쌌다. 그리고 제라린은 기사 3명을 이끌고 클래치스 남작에게 다가갔다.
남작은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그 옆에 있던 기사가 대신 앞으로 나섰다.
“나는 클래치스 남작님의 기사 갈토안이라고 하오.”
“나는 제라린 폰 율리우스다. 덤벼라.”

붕.
내려찍는 제라린의 검에서 소리가 났다.
멋모르고 롱소드로 제라린의 검에 대항하던 갈토안은 손아귀가 찢겨지는 듯한 아픔을 느끼면서 급히 손을 거두었다.
‘윽, 이런 무지막지한 힘이라니…….’
다시 바로 옆으로 날아오는 투핸드소드를 무심코 검을 맞대어서 막았지만 바로 검이 부서졌다.
쨍그랑.
제라린의 힘에 갈토안은 아연실색을 했지만, 앨버트 등은 이제 제법 익숙해졌는지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반 토막 난 검을 힘없이 늘어뜨린 갈토안이 곧 치욕 때문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이내 체념했는지 검을 떨어뜨리고 두 눈을 감으면서 말했다.
“베시오.”
그 소리에 제라린이 검을 더 높이 치켜세웠다.
투핸드소드의 칼끝이 갈토안의 목에 닿아서 핏방울이 맺혔다.
갈토안은 제라린이 쉽게 벨 수 있도록 고개를 들어서 목을 더 잘 보이게 내밀었다.
‘호오… 제법 기개가 있는 자로군.’
그런 그를 보면서 제라린이 감탄하는데, 한쪽에서 두려움에 떨면서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던 클래치스 남작이 외쳤다.
“그만, 그대가 이겼소. 그러니 더 이상 무고한 살상은 하지 마시오.”
그러자 갈토안이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
“영주님. 안 됩니다. 절대 항복하시면 안 됩니다. 영지를 이렇게 허무하게 넘길 수는 없습니다.”
그러자 클래치스 남작이 허공을 향해 넋두리하듯이 말했다.
“이 상황에서 항복하지 않고 어떻게 버티겠는가? 이미 진 싸움이야. 지금 외부에 나가 있는 다른 기사 2명이 더 있다고 해도 막을 수 없을 거 같은데… 아, 처음부터 그런 요청을 받는 게 아닌데… 내 무모한 욕심 때문이었어. 모든 게… 모든 게…….”
그렇게 제라린은 클래치스 남작의 항복을 받았다.

이때 바깥의 소란을 들었는지 영주관에서 몇몇의 사람들이 밖으로 뛰쳐나왔다.
중년 부인과 그녀의 아들, 딸인 젊은 남자와 여자였다. 그들의 주위에 시종들과 시녀들이 그들을 호종했다.
뚱뚱한 중년 부인은 긴 소매가 달린 파란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치마 자락이 무척 풍성했고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길었다. 옷의 곳곳에는 레이스가 달려 있고 머리에 쓰개를 써서 머리를 가리고 있었다. 보석으로 된 목걸이를 목에 걸고 있었고 손에는 클래치스 남작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보석으로 된 반지들을 끼고 있었다.
그녀의 딸로 보이는 십대 후반의 여자도 비슷한 옷을 입고 있었다. 다만 드레스 색깔이 분홍색이었다.
젊은 남자도 클래치스 남작과 비슷하게 셔츠에 튜닉을 걸치고 있었는데 여자와 남자 모두 부모를 닮았는지 살이 올라서 뚱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