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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라린 1(8화)
3. 클래치스 남작과의 영지전(4)


그들은 영주관에서 나오자마자 검을 겨누고 있는 제라린과 그 앞에서 넋두리하는 클래치스 남작을 보았다. 중년 부인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고, 그런 그녀를 아들과 딸들이 급히 부축했다.
“제발… 제발… 살려 주세요.”
제라린이 남작을 죽이려고 생각했는지 중년 부인이 애타게 애원했다.
이미 모든 상황은 끝났기에 제라린도 검을 거두고 뒤로 물러났다.
“부인, 모든 건 끝났으니 더 이상 걱정하지 마시오.”
사실 영지를 잃은 그들은 당장 내일부터 걱정해야 했지만, 일단 제라린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클래치스 남작을 보면서 말했다.
“일단은 영주관에 들어가서 기다리시오. 곧 그대에 대한 처분을 결정하겠소.”
“알겠소.”
힘없이 대답을 한 남작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자신의 부인과 자식들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제라린은 남작 일가는 영주관에 유폐시키고 기사 갈토안은 지하 감옥에 가두었다.

켄스와 글랜에게 병사 20명을 주어서 영주성 내의 병사들의 무장 해제에 대한 명령을 내리던 제라린의 귀에 안으로 들어가던 남작 일가의 대화가 들렸다.
“엄마… 나… 나 이제 어떡해? 정혼자인 더비스 공자님과 곧 결혼식을 올려야 하는데… 저 짐승 같은 놈이 오늘밤 더, 덮치진 않을까?”
정말로 걱정하는지 남작 딸의 목소리가 무척 떨렸다. 그녀는 단지 피로 온 몸을 물들인 제라린을 봤던 것이다.
남작부인이 그녀를 달랬다.
“얘야. 너무 걱정하지 마라. 네가 무척 예쁘고 제 놈이 아무리 흉악무도해도 설마 귀족의 딸인 너에게 그런 짓은 못할 게야. 아무렴 그렇고말고…….”
그들과 들어가던 남작도 앞길이 막막한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휴…….”

살이 포동포동하게 찐, 아니 오히려 뚱뚱하고 못생긴 그녀에게서 그런 오해 섞인 말을 듣자 검을 든 제라린의 왼손에 힘이 들어갔다.
투핸드소드여서 뽑을 때 불편했기 때문에 보통 때는 이렇게 왼손에 들고 다니는 그였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오해를 들으면서 정말 저들을 죽일까 고민하면서 제라린이 앨버트 경에게 물었다.
“음… 이제 저들을 어떻게 하면 되겠소? 그냥 죽이면 될까?”
제라린이 정말 그들을 죽이려는 줄 알고 앨버트가 깜짝 놀라서 말렸다.
“예? 영지전도 끝났는데 귀족을 죽이신다고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러면 모두의 공분을 사게 되어서 귀족 사회에서 제명을 받고 왕국의 적이 됩니다. 그러니 절대 안 됩니다.”
‘음, 이번에는 물어보길 잘한 거 같군. 괜히 왕국의 적이 되어서 싸울 필요는 없지.’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겠소?”
앨버트도 이렇게 영지까지 완전히 복속시킨 게 근래에는 드문 일이었는지 머리를 싸매서 궁리를 하면서 대답했다.
“음, 보통 영주나 그 가족을 사로잡으면 그냥 몸값을 요구하는데, 클래치스 남작님은 이제 영지도 없잖습니까? 그리고 이 영지의 재물도 전부 소영주님께서 가지실 테니… 따로 몸값을 지불하지는 못할 테고… 앗… 클래치스 남작 부인께서 왕국의 동부에 있는 세스마 백작님의 셋째 따님이십니다. 그쪽으로 보내면 세스마 백작님이 종속령이라도 하나 내려서 사위 일가가 살아갈 수 있도록 할 겁니다.”
곧 할일이 많은 제라린은 돈이 많이 필요할 거란 생각에 이렇게 물었다.
“응? 그래? 그러면 세스마 백작한테 몸값을 내라고 하면 어떻겠소?”
“예? 세스마 백작님한테서 몸값을요? 영지를 잃고 떠나는 남작의 몸값을 요구하는 것은 너무 과하신 처사입니다. 만약에 세스마 백작님이 거부하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그러면 저들을 죽이지도 못하고… 아무튼 귀족 사회의 공분을 얻으실 겁니다.”
‘음… 설마 사위 몸값을 안내고 거부할까? 아니지, 혹시 사이가 안 좋을 수도 있으니… 그래 너무 위험한 거는 하지 말자. 아직 이쪽 세계를 잘 모르니…….’
“그래, 그러면 그게 좋겠소. 그러면 용병들을 고용해서 바로 보내버리도록…….”
그렇게 클래치스 남작가의 처지를 결정한 제라린은 앨버트에게 병사 10명을 주고서 영주관을 지키도록 명령을 내렸다.

다음날 클래치스 남작가를 호위할 용병들을 근처에서 급하게 모집하던 제라린은 저녁 무렵에 척후병으로부터 클래치스 영지군이 영주성 근처로 도착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얼핏 봐도 기사 한 명이 잡병 1천여 명과 상비군 200여 명을 데리고 오고 있었다.
근처에서 행렬을 맞추었는지 패잔병답지 않게 제법 대오가 정연했다.
제라린은 급히 영주관으로 가서 클래치스 남작 앞에 섰다. 그는 유폐되어 있다가 갑작스런 제라린의 방문에 크게 당황하는 눈치였다.
“클래치스 남작,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율리우스 영지에서 나한테 패했던 그대의 병력이 지금 여기로 오고 있소.”
잠시 동안 그를 노려보던 제라린이 말을 이었다.
“해서 그들과 싸우기 전에 그대와 그대의 가족을 처리해야겠소. 후환이 될지 모르니…….”
그러면서 오른손이 왼팔에 들고 있던 투핸드소드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의 행동에 남작이 사시나무 떨듯이 손을 떨면서 겨우 말했다.
“이, 이보시오. 우, 우리 영지는 이미 패, 패했소. 내가 그들한테 잘 말하면 바로 항복할 것이오.”
제라린은 남작의 말에도 아무 대답을 하지 않고 그대로 노려봤다. 그의 싸느란 눈빛이 무서웠는지 남작이 애원했다.
“제, 제발…….”
그제야 남작의 자발적인 도움을 제대로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제라린이 오른손을 검의 손잡이에서 떼고 말했다.
“그러면 한 번 믿어 보리다.”
남작을 데리고 영주성의 성벽으로 향하면서 제라린은 영주관을 지키던 병사 10명에게 명령을 내렸다.
“너희들은 여기를 지키고 있다가 내가 명령을 내리면 영주관 내에 쥐새끼 하나 남기지 말고 모조리 죽여라. 알겠느냐?”
“옛! 소영주님.”
병사들의 우렁찬 대답을 뒤로 하고 제라린은 남작과 함께 성벽으로 갔다.
남작은 제라린의 명령과 병사들의 태도에 더욱 간절한 심정이 되었다.
사실 영지를 들어서 항복한 클래치스 남작이었기에 이런 제라린의 행동은 약간 과한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하지만 밖에 있는 병력이 제라린의 병력보다 워낙 많았기에 제라린도 만전을 기하는 것이었다.

클래치스 영지군은 영주성의 문이 열리지 않자, 그 앞에서 당황하고 있었다. 기사 하나가 바로 성벽 밑으로 와서 크게 고함을 질렀다.
“네 이놈들, 나는 기사 레이날이다. 벌써 내 얼굴도 잊은 것이냐? 어서 성문을 열지 못할까? 내가 들어가서 너희들 혼구녕을 낼 것이다. 이놈들!”
율리우스 영주성 앞에서 제일 많이 욕을 하던 그 기사 레이날이었다. 죽거나 사로잡은 클래치스 영지의 기사 6명 외에 한 명의 행방이 묘연했는데, 어느 틈에 그가 율리우스 영지군을 피해서 달아났던 것이다.
오면서 율리우스 영지의 휴렌 집사까지 만났기에 그는 영지전이 끝났다는 생각에 안심하고 병력들을 최대한 모아서 느긋하게 왔었다. 여기까지 오기 전까지 그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든지 패전의 책임을 지금은 없는 다른 동료 기사 6명에게 넘길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도착해 보니 병사들이 자신을 보고도 문을 열어 주지 않아서 무척 화가 났다.
이미 성벽 위에는 율리우스 가문을 뜻하는 ‘창공을 나는 매’의 문장이 수놓인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드디어 제라린의 신호를 받은 앨버트 경이 나섰다.
“하하, 욕 잘하던 기사 레이날이 어디로 도망갔나 했더니 여기로 오셨군.”
난데없이 영주성 위의 높다란 문루에 나타난 율리우스 영지의 기사인 앨버트를 보고 레이날은 놀라서 말에서 떨어질 뻔했다.

앨버트의 말에 이어서 그의 영주인 클래치스 남작의 말이 들렸다.
“레이날 경. 이번 영지전은 우리가 졌네. 그리고 나는 우리 영지를 제라린 폰 율리우스 경에게 들어서 바치기로 했네. 그러니 더 이상 소용없는 저항은 하지 말고 항복하게나.”
클래치스 남작도 자신과 가족의 목숨이 달렸기에 최선을 다해서 말했다.
이내 전투의 승패가 결정 난 것을 알아차린 레이날이 허리에 찬 롱소드를 풀고 말에서 내려서 항복을 했다. 그리고 다른 상비군들도 무장을 해제시켰다.
그 모습을 보고 흡족해진 제라린은 곧 병사들을 내보내 무기를 수거하고 레이날은 지하 감옥으로 보냈다. 좁은 지하 감옥이었기에 상비군들은 그대로 몸을 포박하여 다른 병사들과 함께 영주관 근처에 정렬을 시키고 징집병들은 그대로 집으로 돌려보냈다. 어떤 해코지를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던 징집병들은 제라린에게 무척 고마워하면서 집으로 향했다.
제라린도 지금 병사가 겨우 30명이었기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 다음날 저녁이 무렵에 드디어 토마스 경이 병사 100명을 이끌고 클래치스 영주성에 도착했다.
영지 내의 다른 방어 거점을 지키던 기사 중의 하나로 역시 다른 기사인 앨버트 주니어는 율리우스 영주성을 지키고 토마스가 여기로 병력을 이끌고 도착한 것이다.
그들이 도착해서야 제라린은 어느 정도 안심을 하면서 영지전 전후 처리를 시작했다. 그리고 역시 저녁 무렵에 클래치스 영지 내의 다른 방어 거점에 나가 있던 기사 2명이 영주성 함락 소식을 듣고 복귀했다. 그들도 바로 지하 감옥으로 수감되었다.

다음날 근처에 있던 10여 명의 용병을 고용한 제라린은 클래치스 남작 일가를 동부의 세스마 백작으로 보내면서 지하 감옥에 갇혀 있던 기사 4명을 밖으로 꺼내서 물었다.
“이제 클래치스 남작 일가는 동부의 세스마 백작령으로 갈 것이다. 그대들의 어떻게 할 것인가? 나를 섬기며 이곳에 남을 것인가? 아니면 남작을 따라 갈 것인가?”
그러자 제라린이 내심 탐냈던 갈토안과 다른 기사 두 명은 남작을 끝까지 따르기를 원했고 레이날만은 이곳에 남아서 제라린을 섬기기를 원했다.
“영주님, 제는 이곳에 남아서 영주님을 섬기겠습니다. 비록 예전에 입에 담지 못할 욕을 많이 했지만, 이미 영주님의 용맹함에 한껏 감복했습니다. 부디 저를 받아 주십시오.”
레이날은 제라린의 기사들도 아직 소영주라고 부르는 제라린을 벌써 영주라고 부르면서 오른팔을 직각으로 꺾어서 가슴에 대는 예를 취했다.
그런 레이날을 보면서 갈토안과 다른 두 기사는 그에게 경멸 어린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기사들이 부족했던 제라린은 그를 흔쾌히 받아들이며 나머지 기사들에 대한 아쉬움을 달랬다.

이윽고, 남작을 비롯한 가족들이 영주 전용의 마차에 올라타고 동부로 떠나기 시작했다.
제라린은 갈토안을 비롯한 기사들의 무구를 모두 주었기에 그들은 기사 3명과 용병 십여 명의 호위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제라린은 그들이 값나가는 보물들은 전혀 가져가지 못하게 막았지만, 클래치스 남작가를 상징하는 오랜된 물건들은 가져가도록 허락했다. 그런 물건들을 실은 수레 두 대가 마차 뒤를 따랐다. 걸어가는 하인들과 마차에 겨우 몸을 실은 하녀들도 보였다.
남작가 영애는 이틀 동안 제라린이 자신을 강간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영지를 떠날 때는 약간 살이 빠졌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피를 씻은 뒤의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잘생긴 제라린의 얼굴은 끝내 보지 못했다.

그런 그들의 뒤를 보면서 제라린은 약간 허망한 감상에 빠졌다.
‘음… 저것이 패망한 자들의 최후인가? 저들은 과연 재기할 수 있을까? 나도 만약에 전쟁에 패하면 저들처럼 되겠지.’
잠시 그런 마음을 품던 제라린은 곧 마음을 굳게 다잡고 어제 했던 클래치스 영지의 재정을 파악하는 일을 마저 했다.
사치를 부리던 남작 일가여서 영지에 여유 자금은 100골드가 고작이었다.
다행인 점은 곧 추수가 다가오기 때문에 큰 수입 예상되었고 지금 바로 지출해야 할 소비 항목이 없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