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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라린 1(9화)
4. 글라토스 자작과의 영지전(1)


제라린은 클래치스 남작과 레이날에게서 들은 이야기 때문에 고민에 빠졌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이들이 영지전을 벌였던 이유는 나의 큰아버지라는 글라토스 자작의 부추김 때문이었다고 했다. 영지전을 벌일 때 아버지라는 율리우스 남작이 쓰러질 거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고 하니 아마 그는 독살되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글라토스 자작의 계획대로 되다가 제라린의 기사들 때문에 일이 바뀌었다.
‘영지의 주인이 갑자기 쓰러지면 놀란 기사들이 율리우스 남작의 조카인 데이빗 이공자를 율리우스 남작으로 추대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앨버트를 비롯한 기사들이 제라린이 탑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어서 탑에서 나를 꺼냈지.’
제라린은 영주관의 복도를 천천히 걸으면서 생각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내가 전투 한 번 하지 않는 철부지일 거라는 생각에 영지전을 하는 척하면 내가 겁을 먹고 도망갈 거라고 생각했다지.’
여기까지 생각한 제라린은 영주관의 식당으로 갔다. 식당에는 이미 앨버트 경과 켄스, 글랜, 토마스 등과 전향한 기사 레이날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뽑은 하녀들이 삶은 돼지고기와 스프, 빵, 야채들을 내어 왔다. 그것들을 먹으면서 제라린은 계속 생각에 잠겼다.
‘음… 겨우 클래치스 영지를 합병했다. 지금은 기로에 서 있다. 이대로 내가 생각하는 발전을 할 것이냐? 아니면 이 기세를 몰고 글라토스 자작령을 쳐서 거기를 복속시켜야 하는가? 이 두 가지 길이 있다. 지금 이대로 문물을 발전시키고 군사를 기르는 게 나에겐 유리하다. 나는 많은 지식과 보다 효율적인 군사 제도들을 알고 있으니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영지의 힘은 커질 것이다.’
그러다가 제라린은 글라토스 자작이 계속 자신을 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만약 글라토스 자작이 내 영지를 노려서 영지전을 신청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내가 거절해도 내가 하위 귀족이니 별 상관이 없겠지만 적은 눈에 안 보이는 암수를 쓸 수도 있다. 제라린이 죽었던 그 티베스란 독약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음…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는 제라린을 보고 그의 앞에 앉아서 돼지고기를 씹던 앨버트가 말을 걸었다.
“저… 소영주님. 이제 영지전도 끝났으니까 수도 아시렌 시티로 사신을 보내셔야죠? 국왕 전하께 소영주님이 남작위를 세습했다는 것과 클래치스 남작령을 영지전을 통해서 복속시켰다는 걸 말씀드리고 허락을 받으셔야 합니다.”
식사를 하면서 전혀 다른 고민을 하던 제라린은 앨버트의 질문에 다시 물었다.
“응? 사신을 보낸다라… 사신을 보내서 그 두 가지 일을 허락을 구해야 하오? 그리고 쉽게 허락이 떨어질 거 같소?”
“물론이죠. 정당한 영지 세습과 영지전이었으니 국왕 전하의 윤허와 귀족원의 허락이 바로 떨어질 것입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겁니다.”
그렇게 호언장담하는 앨버트의 말을 듣고 제라린도 안심했다. 영지를 계승하는 데에 외부적인 위험은 없을 듯했다.
갑자기 조용히 밥을 먹던 레이날이 입을 열었다.
“영주님, 보내실 사람이 없다면 제를 보내 주십시오. 제가 가서 깨끗하게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역시나 항복한 기사여서 그런지 모든 일에 대해서 적극적이었다.
그런 그에게 제라린이 웃음을 짓고는 다시 앨비트에게 물었다.
“그건 그렇고, 우리 영지 서쪽에 있는 글라토스 자작령의 병력은 어떻소?”
갑작스런 화제의 전환에 앨버트가 놀랐다.
“예? 소영주님의 큰아버님요? 거긴 자작령이어서 우리 영지보다는 병사가 훨씬 많죠. 제가 몇 번 가 봐서 아는데 기사가 20명 정도에 상비군이 대략 1,000명 정도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십니까?”
앨버트가 그렇게 묻는 순간에 시종이 들어오면서 안토니 경과 율리우스 영지의 전령이 영주성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제라린은 그들을 바로 불러들였고 조금 후에 20대 후반의 연약하지만 다른 기사들에 비해서 훨씬 귀족적으로 보이는 안토니 경과 전령이 들어왔다.
안토니 경은 들어오자마자 바닥에 무릎을 꿇으면서 용서를 구했다.
“소영주님. 죄송합니다. 글라토스 영지에서 용병을 쉽게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최대한 빨리 구하려고 했지만 용병들의 조건이 너무 까다로웠습니다. 그러다가 영지전이 끝났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되돌아왔습니다.”
제라린은 클래치스 남작과 레이날 경으로부터 글라토스 자작의 흑심을 알았기에 안토니가 용병 계약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이해했다.
“아니오. 어서 일어나시오. 경의 잘못이 아니니… 먼 길을 달려와서 배가 고플 테니 같이 식사를 하도록 합시다.”
오랫동안 말을 타고 왔는지 그는 옆의 전령보다 훨씬 많은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옆에서 잠시 기다리던 래더아머를 입은 전령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율리우스 영주성에 있는 앨버트 주니어 경이 보고를 올립니다. 지난 새벽의 전투로 상비군 군은 12명이 전사했고 23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이 중 5명은 중상자로 앞으로 병사의 역할을 할 수 없을 거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 포로로 잡고 있는 적의 병력은 부상을 입은 기사가 2명, 상비군이 150여 명, 징집병이 약 천 명입니다.”
야습을 했을 때 앨버트, 켄스, 글랜과 싸우던 기사들 중 한 명은 죽고 두 명은 부상을 입고 잡혔던 것이다.
제라린이 급하게 클래치스 영지를 치기 위해서 기사 3명과 병사 30명만을 이끌고 떠났었기에 율리우스 영주성을 맡은 앨버트 주니어가 대신 전후 처리를 하고 보고를 한 것이었다.
‘휴… 한국군에 있을 때는 이런 정도는 바로바로 보고가 되었는데 여기서는 그런 건 어렵겠지… 아니다. 앞으로 내가 만들면 된다.’
이윽고 전령의 보고를 다 들은 제라린이 다른 전령에게 명령을 내렸다.
“너는 즉시 율리우스 영주성으로 가서 적의 징집병들은 모두 풀어서 각자 집으로 돌아가도록 해라. 그리고 기사들의 부상은 잘 치료해 주고 상비군들은 이제 율리우스 영지와 클래치스 영지가 합병되었음을 알리고 그들의 새로운 주군이 나란 것을 주지시켜라. 그리고 그들에게 율리우스병사와 똑같은 대우를 해 주도록… 내가 사흘 뒤에 갈 테니 앨버트 주니어 경이 그동안 그들을 지휘하도록 전하라.”
“옛, 영주님.”
준비했던 새로운 전령이 그대로 출발했고 여기까지 와서 보고를 마친 전령은 곧 시종에게 안내되어서 침실과 식사를 제공받았다.
제라린은 다시 식사를 하면서 생각을 가다듬었다.
‘이제 나한테 기사가 6명… 아니지 레이날 경까지 포함하면 7명, 율리우스 영주성에 부상을 당한 기사 2명이 합류를 하면 9명, 상비군은 양 영지를 다 합치면 겨우 550명… 그들을 모두 데려갈 수 없으니 전장에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은 겨우 400명 혹은 450명이 전부다. 이대로 영지전을 하면 너무 도박이 아닐까? 음 어쩌면 기호지세인지도 모른다. 이대로 쳐야 한다.’
마침내 결심을 굳힌 그는 같이 식사를 하던 안토니 경에게 말을 했다.
“안토니 경, 많이 피곤할 테지만 식사를 하고 바로 글라토스 자작령으로 출발하도록 하시오. 내가 영지전을 신청할 테니 그걸 전달하고 오시오.”
식사를 하던 안토니의 몸이 굳어졌다. 그 외에도 그 자리에 있던 자들도 마치 잘못 들은 것 인양 얼굴 가득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마침내 기사대장인 앨버트가 물었다.
“아니, 소영주님. 갑자기 거기랑 영주전이라뇨? 혹시 영주전의 의미를 잘못 알고 계신 건 아니시죠?”
그제야 제라린이 자세한 사정을 말했다.
“모두들 클래치스 남작이 우리에게 갑자기 영지전을 신청해서 궁금했을 것이오. 평소에 그리 사이가 나쁘지 않은 양 영지였는데… 사실 이번 영지전의 원인은 글라토스 자작이었소. 글라토스 자작의 꾐에 넘어간 클래치스 남작이 영지전을 하면서 공격하는 척만 해서 데이빗 공자가 새로운 율리우스 남작이 되면 막대한 재물을 받기로 되어 있었소… 무엇보다도 내 아버님이신 율리우스 남작은 독살이 되어서 죽었을 것이오. 그러므로 그가 아무리 내 큰아버지지만 용서할 수 없소. 그러니 이번 기회에 그를 칠 것이오.”
그러자 모두들 같이 밥을 먹던 레이날을 쳐다봤다.
전부의 시선을 한순간에 받은 그가 당황하다가 바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제라린의 말에 보충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모두들 율리우스 남작이 독살을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분개하면서 글라토스 자작을 욕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앨버트는 끝까지 반대했다.
“아무리 그래도 전력의 차이가 너무 심합니다. 그러면 귀족원에 알려서 그의 죄상을 만천하에 밝히고 그의 작위를 박탈하도록 청원하는 게 어떠신가요?”
“그런 평화적인 방법이 싫은 것은 아니나, 그자의 흉계에 대한 증거가 전혀 없소. 다만 몇몇의 증인만 있을 뿐인데 그자가 아니라고 우기면 시간만 지날 뿐 해결되지 않을 것이오. 따라서 귀족원이 조사를 한다고 해도 그가 잡아떼면 아무런 소용이 없소.”
그렇게 제라린은 식사를 하면서 글라토스 자작령에 대한 영지전을 선포했다.

이번에는 혼자서 말을 타고 글라토스 자작령으로 빠르게 달려간 안토니 경. 그가 글라토스 자작에게 안내되어졌다.
제라린이 영지전을 신청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글라토스 자작이 그를 바로 들여 보내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자작은 사십대 중반의 배가 약간 나와 있고 리넨으로 만들어진 셔츠와 바지를 입고 있었다. 허리에는 보석으로 장식된 숏소드를 차고 있고 자수가 놓인 망토를 걸친 채 집무실의 중앙에 앉아 있었다.
자작의 바로 옆에는 무장하지 않은 사오십 대의 중년인들 세 명이 서 있고 그 주위에는 체인 메일을 걸치고 롱소드를 허리에 찬 기사들 십여 명이 좌우로 늘어서 있었다. 무장하지 않은 자들은 문관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율리우스 영주성에서 급히 떠났던 데이빗 둘째 공자의 모습도 보였다.

율리우스 영지의 영지전 신청 소리에 모두들 웅성거리는 와중에 도착한 안토니가 품 안에서 영지전 신청서를 꺼냈고 문관 중에 하나인 사무엘이 그것을 읽었다.
“글라토스 자작이 본관의 명예를 더럽혔기에 이를 벌하기 위하여 영지전을 신청한다. 그대는 물론 방어자의 권리로 외부로부터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외부의 병력과 함께 그대의 영주성에 나의 군대를 기다려라.”
사무엘이 여기까지 읽는데 돌연 글라토스 자작이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하.”
그의 갑작스러운 웃음에 사무엘을 비롯한 모두가 놀라면서 그를 바라봤다.
“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녀석. 감히 나한테 영지전을 신청한다고? 게다가 외부의 병력과 함께 영주성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라고? 하하하.”
자작이 자신의 앞에서 잠자코 서 있는 안토니에게 소리쳤다.
“그래, 그놈의 영지전 신청을 받아 주마. 영지전은 바로 일주일 후부터다. 그리고 나는 다른 외부의 도움 없이 글라토스 영지군만으로 그놈을 상대할 것이다. 일주일 후에 영지의 경계에서 그 놈과 승부를 가릴 것이라고 전해라.”
“예, 자작님.”
자작의 입에서 허가가 떨어지자 안토니는 그제야 거북한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잠시도 쉬지 않고 그는 다시 제라린에게 말을 달렸다.

안토니가 방에서 나가자 자작이 혼잣말을 한다.
“그래, 잘됐다. 잘됐어. 눈치 보면서 억지로 영지를 빼앗는 것보다 쳐들어오는 그놈을 패배시키고 바로 율리우스 영주성을 빼앗는 게 훨씬 낫지. 그놈이 클래치스 남작령까지 복속시킨 덕에 이번에 이기면 남작령 두 개가 손에 들어오겠군. 하하하.”
기사들 틈에 있던 데이빗이 기분 좋게 웃고 있는 자작에게 말을 걸었다. 제라린의 전투를 직접 본 그는 아무래도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아버님, 그놈이 영지전을 신청했으니 아버님과 친하시고 남부 제일의 용장이라고 불리시는 주노 자작님에게 응원을 요청하시는 건 어떠신가요?”
자작이 조금 전보다 더 크게 웃다가 말한다.
“아하하하. 그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과의 영지전 때문에 주노 그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그 친구가 비웃을 게야. 그리고 그 친구는 지금 수도에 가 있잖아.”
“그러시면 그곳 영주 대리나 다른 영지에서 병력이라도 빌리시는 게 어떠신가요?”
“아니다. 그들에게 응원을 청하면 그에 대한 사례를 해 줘야 하는 법. 제라린 그놈이 병력을 끌어 모아 봤자 우리 영지의 반도 안 될 게야. 그놈이 기껏 할 줄 아는 게 귀족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야습 정도겠지. 그러니 우리는 야습 같은 거만 조심하면 우리가 질리가 없는 싸움이야. 하하하, 더구나 우리에게는 더글라스가 있잖나.”
자작은 기사들 중의 한 명을 믿음직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체인 메일을 입고 있는 다른 기사들과는 달리 플레이트 메일을 입고 있었다.
자작이 더글라스에게서 눈을 떼고 자신의 둘째 아들인 데이빗을 보면서 말했다.
“영지 경계에서 그놈의 영지군을 격파하고 바로 율리우스 영주성을 점령할 것이다. 너는 율리우스 남작령을 원하느냐? 아니면 클래치스 남작령을 원하느냐? 하하하.”
벌써 다 이긴 듯이 데이빗에게 원하는 영지를 물어보는 자작이었다. 그리고 데이빗도 어느새 제라린의 무서움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머릿속으로 두 영지를 비교하면서 어느 영지가 더 나은지를 계산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