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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라린 1(10화)
4. 글라토스 자작과의 영지전(2)
안토니를 사절로 보낸 제라린은 서둘러서 클래치스 남작령의 행정 업무를 처리했다. 이곳 영지도 율리우스 영지와 마찬가지로 영지민들의 대부분이 농사를 지었는데 그 토지에 나는 소출의 60%를 영주에게 바치고 있었다.
율리우스 영지가 50%를 바치는 것에 비해서 많은 소출을 바쳤는데도 제라린이 확보한 영지의 남은 예산은 얼마 없었다. 대부분 클래치스 남작 일가의 사치에 사용되었기 때문이었다.
제라린은 자신의 영지와 세율을 똑같은 세율인 50%로 내리는 포고령을 써서 바로 공표했다.
그리고 소수의 수비병만을 남겨 둔 채로 모든 기사와 상비병을 거느리고 율리우스 영주성으로 향했다.
영지 곳곳에 하달한 포고령의 내용을 알았는지 그의 병력이 지나갈 때 곳곳에서 환영하는 영지민들로 넘쳐났다. 그들의 얼굴에 희망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영주가 바뀌는 것은 그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세율이 더 이상 안 오르기만 바랐던 그들이었으나 바로 올해부터 세금이 감면되자 이제 좀 더 살기 좋게 되리라는 희망을 가지게 된 것이다.
제라린을 따라가는 클래치스 남작령 출신의 상비군들도 그런 기분이 전염되었는지 이제까지의 피동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걸어갔다.
이번에는 말을 타고 가는 제라린이었다.
그는 클래치스 남작령에 있는 며칠 동안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말을 타는 연습을 했다. 그리고 지금은 올 때와 달리 걸어가는 병사들의 속도에 맞추어서 느긋하게 행군하는 길이었기에 그가 승마를 연습하기에 더 없이 좋은 기회였다.
가끔씩 병사들보다 더 빨리 말을 타고 앞으로 나아가기도 했다. 그리고 말을 달리면서 투핸드소드를 휘둘렀다. 그런 제라린의 뒤를 글랜이 허겁지겁 말을 타고 따랐다. 앨버트를 비롯한 다른 기사들은 병력을 지휘하기에 바빴기 때문에 그 혼자만이라도 호위로 따라나선 것이다.
앞에서 말을 달리면서 투핸드소드를 한 손으로 휘두르는 제라린을 보면서 글랜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휴, 소영주님은 정말 힘이 장사네. 어떻게 저렇게 투핸드소드를 한 손으로 가볍게 휘두를 수가 있지? 정말 대단해.”
이틀이 걸려서 율리우스 영주성에 도착한 제라린은 병사들을 정돈하고 율리우스 영지에도 세율을 기존의 50%에서 45%로 내리는 포고령을 비롯한 여러 가지 포고령을 공표했다.
사십 대의 농부들인 제임스와 윌리. 그들은 각자가 율리우스 영지 내의 율리토와 율리아노 마을에 살고 있었기에 가끔씩 서로 만나는 친구 사이였다. 징집병으로 율리우스 영주성의 방어전에 동원되었던 그들이 이번 영지전이 끝나고 처음으로 서로 만났다.
“자네도 이번에 안 다쳤던 모양이군. 다행이야, 다행.”
“그래, 자네도 안 다쳤지? 가족들도 다 무사하고?”
“아무렴, 클래치스 영지군이 여기 도착하자마자 새벽에 패배했기 때문에 마을에 들어와서 행패를 부릴 시간도 없었지. 하하하.”
그들은 귀족들의 싸움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자신과 가족들의 무사만을 진심으로 기뻐했다.
“참, 자네 이번에 내려온 포고령을 봤나? 세율이 45%로 떨어지고 이번 가을부터 적용한다고 하더라고.”
“그렇지. 그걸 듣고 우리 마을은 지금 잔치 분위기야. 앞으로 더 낮추어 줄 것이라는 영주님의 말씀도 있지 않았나?”
“아니, 소영주님이야. 영주님은 며칠 전에 돌아가셨다고 하더라고.”
“아참, 그렇지? 아무튼 소영주님은 뭔가 좀 다른 거 같아. 클래치스 영지도 세율을 크게 낮추어 주었다고 하던데…….”
제임스의 말을 듣던 윌리가 크게 놀랐다.
“뭐라고? 거기까지?”
“응, 게다가 이번에 싸우다가 죽거나 다친 사람들의 가족들에게 위로금도 지급한다고 하더라고.”
“아! 맞아, 그 얘긴 나도 들었어. 우리 마을의 윌리엄도 이번에 다쳐서 그 가족의 생계가 막막했는데, 그걸 듣고는 그래도 희망을 얻기 시작했다고 하더라고.”
“정말 대단하신 분이야. 죽거나 다치면 이미 자신에게 쓸모가 없을 텐데… 그런 사람들과 그 가족들을 챙겨 주시다니…….”
“그렇지? 이런 영주님은 이제까지 없었던 거 같아.”
서로 근황을 묻던 그들이 이번에는 자신의 무용담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이번 야습에서 말이야 내가 봉으로 클래치스 영지의 징집병을 무려 5명이나 사로잡았지 않았는가. 내가 봉을 휘두르니 모두들 벌벌 떨더구만. 하하하.”
“하하, 겨우 징집병들을 상대했어? 나는 상비군 바로 뒤에서 돌격하다가 적의 상비군 하나를 잡았다네. 하하하.”
제임스의 자랑에 윌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뭐라고? 상비군과 싸웠어? 자네 미쳤나? 그런 위험한 짓을 왜 해?”
의기양양해진 제임스가 목소리를 더욱더 내리깔고는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이번에 상비군의 바로 뒤에, 그러니까 징집병 제일 앞에서 돌격했잖나. 그러다가 소영주님이 검을 휘두르는 것을 봤는데…….”
갑자기 제임스가 양팔을 좌우로 활짝 펼치더니 커다란 검의 길이를 흉내 내면서 계속 말을 했다.
“소영주님이 이따시만 하게 기다란 검을 그냥 한 손으로 막 휘두르는데 적의 기사가 그걸 맞고는 머리부터 양쪽으로 쪼개지더라고.”
윌리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아니, 이 사람아. 과장도 좀 정도껏 하라고. 어떻게 사람이 양 갈래로 쪼개져? 아무리 소영주님 힘이 장사라도…….”
윌리가 자신의 말을 믿지 않자 제임스가 더욱 침을 튀기면서 열변을 토했다.
“정말이라니까. 그 기사의 몸뿐만 아니라 칼도 같이 쪼개졌어. 내 눈으로 똑똑히 봤다니까… 그리고 그 장면은 보지 못한 사람들도 그 기사의 시체는 많이 봤어. 우리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라니까.”
제임스가 이렇게 자신에 찬 태도로 강경하게 말하자 윌리도 반쯤 믿는 상태가 되었다.
“그래? 정말로 그래?”
그렇게 짧은 시간에 여러 가지 포고령을 공포하여 행정과 군사를 돌본 제라린은 바로 부상을 입고 사로잡힌 클래치스 남작령 출신의 기사 두 명에게 갔다.
둘 다 아직 상처가 완전히 낫지 않아서 침대에 누워 있었고 방으로 들어서는 제라린을 보면서 몸을 급히 일으켰다.
“아, 몸도 불편할 텐데 그대로 누워 있으시오.”
레이날에게 미리 들은 제라린은 그들의 이름이 홉과 제킨스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홉은 30대 중반에 큰 키에 멋진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고 제킨스는 30대 후반에 켄스와 같은 근육질이었다.
“모두들 알다시피 클래치스 남작이 나에게 영지를 들어서 바치고 세스마 백작에게 몸을 의탁하기 위하여 동부로 떠났소. 그런데 떠날 때 그대들에 대한 얘기는 따로 없었소.”
클래치스 남작은 이들이 모두 죽었다고 생각하고 별 신경을 못 썼던 것이었지만, 제라린은 그 결과만을 이들에게 얘기했다.
제라린의 말을 들은 홉과 제킨스는 자신들이 클래치스 남작에게 버림받은 줄 알고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모습을 보던 제라린이 내심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따뜻하게 말했다.
“비록 나와 싸웠지만 용감히 싸우다가 부상으로 어쩔 수 없이 사로잡힌 그대들의 무공을 높이 평가하오. 그래서 앞으로 그대들이 나의 검이 되었으면 하오.”
그러자 침대 위에 앉아서 말없이 고민하던 그들이 동부로 떠난 클래치스 남작을 찾아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침대에서 내려와서 왼발을 뒤로 빼어서 무릎을 꿇고 오른발을 세운 채로 앉았다. 그리고 오른손을 직각으로 굽힌 채로 자신의 가슴 앞으로 내밀었다. 기사들이 주군을 받들 때 하는 최상의 예를 표시한 것이다.
“기사 홉, 앞으로 제라린 폰 율리우스 남작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저, 기사 제킨스. 앞으로 제라린 폰 율리우스 남작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고맙소. 앞으로 날카로운 나의 검이 되어 주길 바라오.”
그렇게 그들을 치하한 제라린이 그들을 일으켰다.
영주성 앞의 벌판에서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기사들을 보면서 안토니의 소식을 기다리던 제라린에게도 커다란 고민이 있었다.
‘음… 이번 전투에 투입할 수 있는 상비군은 겨우 400명 정도, 율리우스 영지에서 징집할 잡병은 3천 명. 글라토스 자작의 병사에 비해서 반 혹은 1/3 수준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기사들이다. 겨우 7명. 아직 홉과 제킨스는 부상으로 전투에 참가할 수 없다. 아무리 내가 여기의 기사들보다 뛰어난 힘과 근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 혼자서는 그들 모두와 싸울 수는 없다. 방법이 없을까?’
그렇게 고민하던 제라린이 마침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앨버트 주니어의 모습을 보였다. 기사대장인 앨버트의 아들로서 25살이었다. 약 10년의 종기사 생활을 마치고 올해 초에 기사로 서임 받은 앨버트 주니어는 기사들 중에서 제일 어렸다.
기사들은 대략 14∼15살에 종자 생활을 시작하여 약 10년 동안 자신의 기사들에게서 무술과 예절을 배우기 때문에 대략 25세 이상이 되어야지만 한 명의 기사로서 활동할 수 있었다.
특히, 20세 이상으로 실질적으로 몸이 다 자라서 본격적인 무술을 배우기 시작하는 종자들을 따로 종기사라고 불렀다.
‘음… 솔직히 종자 생활은 너무 길어. 그렇다고 계속 무술을 익히는 게 아니고 기사들의 시중을 드는데 드는 시간이 더 많으니… 이 점도 나중에 반드시 고쳐야 한다. 그런 고급 인력들을 제대로 키우지 못하고 활용하지 못하면 안 되지.’
그렇게 장래에 대한 일을 결심한 제라린은 이번 글라토스 자작과의 영지전에서 종기사들의 활용을 결심했다.
‘그래, 일단은 수가 너무 밀리니 종기사들이라도 같이 투입하자. 20살 이상의 종기사들만 투입하면 어느 정도의 전력은 되겠지.’
이윽고 안토니가 글라토스 자작령으로부터 돌아왔다.
그리고 그로부터 영지전 시작을 안 제라린은 며칠간 병사들의 훈련을 더 시킨 후에, 날짜에 맞추어서 글라토스 자작령과 맞붙은 영지의 서쪽 경계로 향했다.
병력의 제일 앞은 글랜이 말을 타고 가고 있었다. 그 뒤를 래더아머를 입은 사백 명의 상비군들이 창을 잡고 대오를 지어서 행군을 했고 체인 메일을 입은 제라린과 약 이십 명의 다른 기사들이 그들의 뒤를 말을 타고 따랐다. 그리고 약 삼천 명의 징집병들이 기다란 봉을 들고 행렬의 제일 마지막을 따라가고 있었다.
징집병들은 별다른 방호구도 입지 않고 평상시에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그들 중 약 오백여 명은 율리우스 영주성의 무기고에서 꺼낸 창으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나머지는 단지 나무를 깎아 만든 기다란 봉을 들고 있을 뿐이었다.
제라린은 이들의 전투력에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다.
징집병들의 머릿속에는 며칠 후부터 시작해야 할 추수에 대한 걱정이 가득 차 있었고 어떻게 하든지 이번 전투에서 죽거나 다치지 않고 무사히 끝낼까 하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제라린 주위에 있는 이십 명의 기사들 중에 특이한 무리들이 보였다. 수염 없는 이십 대 초반의 앳된 얼굴을 한 십여 명의 기사들. 그들 중에는 제대로 된 체인 메일을 입은 사람들도 있었으나 대부분 그냥 래더아머만을 입고 있었다.
아직 정식으로 전투에 참여할 수준은 안 되었지만 기사들간의 숫자 차이가 너무 크게 나기에 제라린이 같이 출진시킨 율리우스, 클래치스 양쪽 영지의 종기사들이었다.
앨버트 기사대장과 다른 기사들도 처음에는 종기사들의 동원에 대해서 반대를 했지만 제라린의 설득에 넘어가서 그들이 이 자리에서 같이 행군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첫 전투를 앞둔 열기와 첫 전투에 대한 두려움이 공존하는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윽고, 영지의 경계에 도착한 제라린의 병사들. 이미 노을이 지고 있었다.
척후병들이 달려와서 보고를 했다.
“소영주님, 글라토스 영지군이 저쪽 영지 근처에 도착했습니다. 모두들 야영지를 건설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적의 병력은 대략 기사가 18명, 상비군이 800여 명, 징집병이 약 9,000명입니다.”
그런 보고를 받던 제라린이 묵직한 신음성을 삼켰다.
‘음… 기사와 상비군의 대부분을 데리고 나왔군.’
야영지를 건설하는 글라토스 영지군.
제일 중앙에 대형 천막이 쳐져 있고 그 안에 긴 탁자가 놓여 있다. 상석에 글라토스 자작이 앉았고 그의 좌우로 18명의 기사들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래, 영지전의 시작은 내일부터다. 제라린 그 어린놈이 저번에 야습으로 클래치스 영지군을 기습했다고 하니, 우리 영지군은 오늘 저녁 경비를 강화한다. 이렇게 전력 차이가 나니까 그런 기습만 조심하면 우리의 승리가 틀림없다.”
야간 경계를 강화시킨 글라토스 자작이 그보다 자신이 더 걱정하는 점을 말했다.
“그리고 제라린 그놈이 영지군과 같이 여기 왔으면 이번 전투를 빨리 결정지을 수 있을 텐데… 그놈은 여기에 없고 영주성에 버티고 있을 수가 있으니까 가지고 온 공성 무기도 잘 손보도록 하라. 내일 율리우스 영지군을 격파하고는 바로 율리우스 영주성으로 향할 것이다. 하하하.”
바로 조금 떨어진 곳에 제라린이 이미 도착했다는 것을 모르는 글라토스 자작은 내일 있을 전투 후의 공성전까지 걱정을 하고는 회의를 마쳤다.
그리고 내일의 달콤한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고, 오로지 제라린이 여기에 없는 것을 걱정하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동틀 무렵 이른 아침을 먹은 율리우스 영지군이 전열을 갖췄다.
제라린이 다시 상비군과 징집병의 앞에 서서 연설을 했다.
“모두들 들어라. 이제 율리우스 영지와 클래치스 영지는 살기 좋은 곳으로 변할 것이다. 하지만 저 악독한 글라토스 자작이 있는 한 너희의 가족들이 평화롭게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가 바로 율리우스 영지를 노려서 율리우스 영지와 클래치스 영지 사이를 이간질시키고 영지전이 벌어지도록 했기 때문이다. 모두들 오늘 힘껏 싸워서 각자의 가족을 지키도록 하자.”
제라린의 말이 끝나자마자 상비군과 징집병들이 창과 봉을 들어서 흔들면서 환호성을 질렀다.
비록 영지전을 청한 것은 제라린이었지만 그는 여기로 오기까지 수시로 병사들에게 악독한 글라토스 자작이 없어져야지만 양 영지의 영지민들이 잘살 수 있다는 생각을 주입시켰던 것이다.
이제 대부분의 병사들은 그런 제라린의 말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안 그래도 제라린은 전권을 행사하자마자 세율을 낮추어 준 인자한 영주가 아니던가.
역시 아침을 먹고 정렬하는 글라토스 영지군.
대부분의 병사들이 피곤한 기색을 보였다. 야습을 경계한 글라토스 자작이 밤새 전병력을 삼교대 체제로 경비를 세웠서 대부분 편하게 자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신들보다 병력이 열세인 율리우스 영지군을 보고는 자신들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불안한 모습은 전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