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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라린 1(11화)
4. 글라토스 자작과의 영지전(3)


연설을 마친 제라린이 병사들을 이끌고 영지의 경계를 넘었다. 이제 영지전이 시작된 것이다.
경계를 넘자마자 제라린이 접전에 대비해서 병사들을 배치했다.
중앙에 상비군 400명을 두고 좌우측에 징집병 각각 천오백 명을 배치했다. 그런 그들을 보면서 제라린이 내심 한숨을 쉬었다.
‘휴… 이건 집단전의 기본이 안 되어 있군. 음… 지금까지는 어쩔 수가 없었으나 앞으로는 반드시 바꿔야 한다.’
말없이 병사들을 바라보던 제라린이 현재의 전력의 열세를 걱정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옆에 있던 앨버트가 그에게 위로의 말을 했다.
“소영주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왕 이렇게 된 거 저와 기사들, 그리고 종기사들이 최선을 다해서 싸울 것입니다.”
여전히 그는 종기사들을 아직 정식 기사로 취급하지는 않았다. 더불어서 상비군이나 징집병도 거의 무시했다.
제라린이 보기에 그와 다른 기사들의 무력도 그리 높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런 위로가 제라린에게 조금은 도움이 되었다. 적어도 혼자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일 앞에 있던 글랜이 말을 타고 약간 앞으로 나서서 크게 외쳤다.
“악독한 글라토스 자작을 주신을 대신해서 율리우스 영지의 주인이신 제라린 폰 율리우스 경께서 그를 처벌하노라. 당장 나와서 항복하라. 그러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글랜은 제라린을 남작으로 칭하지는 못하고 경이라고만 칭했다. 아직 국왕으로부터 세습에 대한 정식 허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율리우스가문의 독자이므로 영지의 주인이란 말은 거리낌 없이 사용했다. 정당하게 영주가 될 권리는 제라린 외에 누구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곧 글라토스 진영에서 플레이트 메일을 입은 기사가 랜스를 들고 갈색 말을 타고 앞으로 달려 나와서 소리쳤다.
“나는 글라토스 자작님의 기사 더글라스다. 너희 악독한 율리우스 영지군을 주신의 이름을 대신하여 처벌하노라. 먼저 기사대전을 신청한다. 너희 중에 나의 창을 받을 자가 있는냐?”

“음… 저자가 글라토스 자작의 휘하에서 제일 용맹하다는 더글라스입니다. 자작이 그를 특별히 총애하여 그 비싼 플레이트 메일도 하사했다고 합니다.”
제라린의 옆에서 그렇게 말한 앨버트가 자신의 종자에게 랜스를 가져오도록 시켰다.
그 종자는 아직 20살이 안 된 어린 종자로 여전히 앨버트의 뒤를 따르면서 시중을 들고 있었다.
“참, 그리고 수비군에서 먼저 기사대전을 청하면 공격군은 반드시 응해 줘야 합니다.”
그렇게 랜스를 들어서 가슴에 고정시키는 앨버트를 보면서 제라린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하하하, 기사들과 상비군을 이끌고 중앙 돌파를 시도하려고 했는데, 저쪽에서 먼저 기사대전을 청해오다니… 이렇게 좋을 수가…….’
준비하는 앨버트보다 앞서서 제라린이 투핸드소드를 거머쥐고 앞으로 달려 나가면서 외쳤다.
“앨버트 경, 내가 기사대전을 할 테니 뒤에서 준비를 하시오. 그리고 내가 명령을 내리면 바로 돌격하도록 하시오.”
미처 말릴 사이도 없이 앞으로 뛰쳐나가는 제라린을 보면서 앨버트와 다른 기사들이 소리를 질렀다.
“소영주님!”
다들 영지의 주인인 제라린을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제라린이 죽거나 사로잡히면 바로 영지전이 끝나기 때문이었다.

한편 기사대전을 신청하기 위하여 앞으로 나간 더글라스를 잠시 보다가 제라린 쪽으로 눈길을 돌린 글라토스 자작이 돌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
갑자기 웃는 그를 보고 주위의 기사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하하. 저쪽을 봐라. 말을 타고 있는 기사들… 소문에 듣던 수 보다 많은 이십여 명이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체인 메일도 걸치지 않고 있구나. 아마 종자나 상비군 중에서 말을 탈 줄 아는 놈들은 모조리 보낸 거 같구나. 하하하. 저런 잡졸들이라니. 크하하하.”
그제야 글라토스 자작의 웃음을 이해한 주위의 기사들과 상비군들도 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자신들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말을 타고 앞으로 달리는 제라린, 말의 속도는 약간 빠르게 뛰는 정도다. 그는 아직 말타기에 능숙하지 않았기에 속도를 빠르게 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의 휘하에 특별히 뛰어난 기사도 없었고 이 모든 일을 진행시킨 건 자신이었기에 자신의 손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나섰다.
“나는 제라린 폰 율리우스다. 너 더글라스를 상대하러 나왔노라.”
설마 율리우스 영지의 후계자가 직접 나올 줄은 몰랐는지 더글라스가 잠깐 당혹해하다가 소리쳤다.
“글라토스 자작님의 기사 더글라스가 제라린 폰 율리우스 님을 상대하오.”
그러고는 그 자리에서 오른손으로 랜스를 들어 올려 랜스의 손잡이를 겨드랑이에 단단히 끼워 넣고 랜스의 끝이 정면을 향하도록 세웠다.
그리고 말을 몰고 서서히 달리기 시작했다.

제라린도 오른손에 투핸드소드를 거머쥐고 자신의 말을 몰고 앞으로 서서히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더글라스가 들고 있는 랜스의 길이를 재어 보았다.
‘음… 대략 3.6미터 정도는 되는군. 나의 투핸드소드보다 배가량 더 길다. 확실히 잘 보고 칼을 휘둘러야 한다.’
서서히 달리던 더글라스가 말의 속도를 점점 더 올렸다. 제라린도 말의 속도를 올렸다.
약 100미터가량 떨어져 있던 양측이 순식간에 서로에게 가까워졌다.
점점 속도를 올리던 더글라스의 말이 어느덧 최고 속도에 다다랐다.
점점 확대되는 제라린의 갑옷을 보면서 더글라스는 창끝을 제라린의 가슴 중앙에 겨냥했다. 이대로 달려가면서 정확하게 창으로 제라린의 가슴을 때리면 그를 낙마를 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상대가 낙마를 하면 전투의 절반 이상이 끝나는 것이다. 전속력으로 달려오면서 맞은 창과 말에서 떨어지면서 받은 충격에 내장이 온통 뒤틀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령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랜스를 던지고 바로 롱소드를 든 기사가 땅 위에서 허우적거리는 적의 목을 베는 것은 너무나도 손쉬운 일이었다.
더구나 기사대전 중에는 다른 기사가 도움을 줄 수도 없다.

다그닥, 다그닥.
말발굽 소리가 울렸고 제라린은 달리는 말의 배를 다시 힘껏 찼다.
이히잉.
그러자 말이 울음소리를 토해 내고 더 빨리 달렸다.
랜스를 들고 말을 타고 돌격하는 적 기사가 점점 제라린에게 다가왔다. 그 끝은 제라린의 가슴을 한 점 흔들림 없이 겨냥하고 있었다.
말을 탄 양 기사가 점점 가까워졌다.
40미터, 30미터, 20미터…….
제라린에게 이런 대전은 처음이었기에 거리를 정확하게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이번에 마주칠 때 확실한 승부를 걸 자신이 없는 제라린은 이번은 그냥 넘기고 다음에 승부를 볼 것을 결심했다.
그래서 적 기사가 말의 속도를 최고로 높일 때, 제라린은 반대로 말의 속도를 늦추었다.
그리고 상대가 들고 있는 랜스의 끝을 끝까지 노려보다가 투핸드소드로 그 끝 부분을 쳤다.
하지만 랜스의 끝은 이미 제라린의 가슴 근처까지 온 뒤였다.
아무리 나모 컴퓨터로 동체 시력이 강화된 제라린이어도 이런 대결이 처음이었기에 실수를 한 것이었다.
제라린은 급하게 투핸드소드로 랜스를 치면서 가슴을 옆으로 비틀었다.
‘챙’ 하는 금속음과 함께 랜스는 제라린의 가슴을 훑으면서 지나갔다.
소드를 든 제라린의 오른손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랜스가 스치고 지나간 체인 메일은 깊숙이 홈이 파였고 많은 수의 체인이 부서졌다.

“와!!! 와!!!”
자신들의 기사가 적의 기사의 가슴에 커다란 흠을 내고 거의 떨어뜨릴 뻔하자 글라토스 영지군은 마치 승리라도 한 거 같은 커다란 환호성을 터뜨렸다.
반면에 율리우스 영지군은 자신들의 소영주가 불리한 전투를 하자 침묵을 지켰다.
글랜 같은 경우는 안절부절 못하면서 앞으로 뛰쳐나가려는 것을 주위에서 겨우 막았다. 기사대전 중에는 누구도 방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달려오던 속도에 몇 십 미터를 더 달려 나간 더글라스가 그대로 방향을 선회했다.
그는 이번에는 좀 전과 같은 얄팍한 수에 넘어가지 않으리라고 다짐하면서 랜스를 낀 오른팔에 더욱더 힘을 주었다.
그리고 다시 말을 달렸다.
50미터, 40미터.
투핸드소드를 든 제라린이 말을 달려오자 이에 호응하듯이 더글라스도 말의 속도를 더 높였다. 그리고 랜스의 끝을 정확하게 제라린의 가슴으로 겨냥했다.
좀 전에는 그의 검 때문에 겨냥이 약간 빗나갔지만 이번에는 아무리 힘껏 그의 랭스를 친다고 할지라도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을 다짐하면서…….

제라린은 좀 전의 실수를 곱씹으면서 다시 더글라스를 향해서 말을 달렸다.
좀 전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서 출발한 두 사람이어서 더 빨리 가까워졌다. 말이 중간 지점에 다다를 무렵 이번에는 조금 전과 달리 제라린도 말의 속도를 최대한으로 높였다. 그리고 투핸드소드를 양손으로 잡고 랜스의 끝을 겨냥했다.
좀 전의 경우를 감안하여 거리를 정확하게 가늠하였다.

제라린은 자신의 힘에 대해서 자만했던 조금 전과 달리 두 손으로 투핸드소드를 꽉 잡고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다가오는 랜스의 끝부분을 힘껏 쳤다.
‘챙’ 하는 소리와 함께 단단히 고정되었던 적 기사의 어깨가 벌어지면서 랜스의 끝이 바깥쪽으로 돌았다. 그러면서 순간적으로 적 기사의 몸이 제라린의 옆을 스쳐지나갔다.
제라린은 조금 전에 투핸드소드를 치면서 생긴 원심력을 이용하여 그대로 소드의 손잡이로 스쳐 지나가는 기사의 허리를 쳤다.
살짝 맞았다.
워낙에 순식간에 가까워졌다가 멀어졌기에 힘을 주고 때릴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빠른 속도로 지나가면서 맞은 적 기사는 충격을 받았는지 움찔거렸다.

제라린은 급하게 말을 멈춰 세우고 몸을 돌렸다. 더글라스는 몸에 받은 충격 때문인지 아직까지 앞으로 달리고 있었다.
제라린이 그의 뒷모습을 향해서 급하게 말을 몰았다. 그제야 말을 뒤로 돌린 더글라스가 랜스를 치켜세우고 말을 다독거렸다.
그도 말을 몰고 싶었으나 이미 제라린이 바로 앞에 다가왔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랜스만 치켜세웠다.
제라린은 제자리에서 랜스를 치켜든 더글라스를 향해서 달리면서 랜스를 쳤다.
속도감이 없으니 힘을 별로 받지 못한 랜스가 옆으로 휘둘렸다.
그대로 더글라스에게 다가가 제라린이 투핸드소드로 그의 투구 턱 부분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쳤다.
‘챙’ 하는 날카로운 금속 소리와 막 롱소드를 꺼내려고 버둥거리던 더글라스가 이번 강력한 타격으로 말에서 거의 떨어질 거 같이 뒤로 크게 휘청거렸다.
제라린은 상체를 뒤로 젖혀서 휘청거리는 더글라스에게 다가가서 투구의 턱 아랫부분에 보이는 목을 향하여 투핸드소드를 그대로 박아 넣었다.
‘푹’ 하는 소리와 함께 목 사이로 박힌 칼 주위로 핏줄기가 새어 나오고, 플레이트 메일의 가슴팍을 붉게 물들였다.
“크억!”
목을 맞았기에 잠긴 비명을 지르면서 더글라스는 땅에 떨어졌다.
제라린이 피 묻은 소드를 높이 치켜올리고 원을 그리듯이 빙빙 돌리면서 율리우스 영지군 앞에서 말을 몰았다. 그러자 율리우스 영지군에서 함성이 쏟아졌다.
“와!!! 와!!!”
“소영주님, 만세!”
“율리우스 영지, 만세!”
상비병, 징집병 할 것 없이 창과 봉을 하늘 높이 흔들면서 고함을 질렀다.
조금 전에 글라토스 영지군이 지른 함성보다 몇 배는 더 큰 함성 소리였다.

그때 글라토스 영지군에서 기사 한 명이 다급하게 말을 몰고 나왔다. 체인 메일을 입고 랜스를 든 기사였다.
“나는 글라토스 자작님의 기사 제코비라 하오. 제라린 폰 율리우스 님에게 기사대전을 신청하오.”
하지만 용감하게 말을 몰고 나왔던 제코비도 곧 제라린의 칼에 쓰러졌고, 이제 기사대전이 점점 더 익숙해진 제라린은 그 다음 기사마저 한 칼에 베어 버렸다. 그러자 더 이상의 기사가 글라토스 영지군에서 나오지 않았다.
글라토스 영지군은 모두 숨을 죽인 체 제라린의 일거수일투족만 쳐다봤다.
제라린이 율리우스 영지군의 앞에서 말을 달리면서 소드를 머리 위로 치켜올리고는 힘차게 흔들었다.
그의 검에는 이미 세 명의 기사들의 피가 묻어 있었다.
드디어 상황이 되었다고 판단한 그는 허공에서 휘돌리던 검을 내려서 글라토스 영지군을 가리켰다.
“보라, 저 겁쟁이들을… 우리 율리우스 영지군이 나아가면 모두 한줌 먼지처럼 흩어질 것이다. 모두들 돌격하라! 돌! 격!”
“와!!! 와!!! 돌격! 돌격!”
돌격을 외치면서 제일 앞장서 말을 달리는 제라린의 뒤를 이어서 기사들이 롱소드를 뽑고 앞으로 말을 달렸다.
그 뒤를 이어서 상비군과 징집병들이 창과 봉을 들고 글라토스 영지군을 향해서 돌격했다.
제라린을 향해서 글라토스 영지군에서 십여 명의 기사들이 앞으로 뛰쳐나왔다. 이제는 기사대전이 아니기 때문에 일대일의 대결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제라린은 제일 앞장서서 돌격하면서 롱소드를 휘두르던 적의 기사를 그대로 베어 넘겼다. 그 뒤를 따라서 율리우스 영지군의 기사들도 그대로 상대 기사들과 부딪혔다.
그들은 대부분 일격에 상대를 쓰러뜨리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서 싸움을 시작했다. 서로 간의 실력 차가 많이 나지 않는 듯 처음 충돌할 때 말에서 떨어진 율리우스 영지의 래더아머를 입은 몇몇 종기사들 외에는 아직까지 말에서 떨어진 기사는 없이 말 위에서 서로 검을 주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