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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라린 1(12화)
4. 글라토스 자작과의 영지전(4)
잠깐 뒤를 살피던 제라린은 그대로 말을 달려서 적 기사들의 뒤를 따라 달려오던 적의 상비군에게 뛰어들었다. 말을 타고 투핸드소드를 휘둘면서 달려오는 그를 보자 상비군들은 어느새 공포에 휩싸였다.
800여 명이 한 덩어리가 되어서 달려왔기에 말을 탄 채로 홀로 돌격하는 제라린을 충분히 상대할 수가 있었지만, 모두들 조금 전에 기사대전에서 기사 3명을 손쉽게 처치한 제라린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모두들 겁을 집어 먹고 겨우 내밀은 창은 제라린이 좌우로 크게 휘두르는 투핸드소드에 나무로 된 창대가 수수깡처럼 부서졌다.
제라린이 달리는 말 뒤로는 병사들이 나뉘어져 길이 생겼다.
제라린은 잠깐 사이에 전후좌우로 종횡을 하면서 거칠게 내달렸다.
실제로 그의 칼에 맞은 상비군은 몇 없었으나 겁에 질려서 좌우로 몸을 틀면서 피하는 상비군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거나 서로의 몸을 밀치면서 혼잡하게 되었다.
그들의 한가운데에서 날뛰는 제라린 때문에 상비군들은 우왕좌왕 허둥대기만 했다.
뛰어오던 상비군들의 기세가 완전히 죽었다고 생각한 제라린이 급히 말을 뒤로 돌려서 기사들의 싸움터로 되돌아갔다.
실력 차이로 몇몇 종기사들이 기사들의 칼에 맞아서 땅에 떨어진 상태였지만 뒤늦게 달려온 상비군들이 곳곳에서 율리우스의 기사들과 싸우는 글라토스 기사들을 창으로 위협했고 숫자가 적은 율리우스 기사들이 상비군의 도움으로 기사들과의 전투를 대등하게 이끌고 있었다.
제라린이 그대로 말을 몰고 뛰어들었다.
“저리 비켜라.”
제라린은 창으로 기사를 위협하는 상비군에게 일갈을 하면서 롱소드를 휘두르면서 기사와 싸우던 적의 기사의 등을 그대로 내리 갈겼다.
“크헉!”
투핸드소드를 등으로 맞은 적의 기사는 입으로 한 덩어리의 핏덩이를 토하면서 말에서 떨어졌다.
제라린이 다시 난입한 것을 느꼈는지 아군 기사, 적 기사, 상비군들 너 나 할 거 없이 동시에 손을 멈추었다.
전장에 짧은 고요가 찾아왔다. 제라린이 소드를 높이 들고 힘차게 돌리면서 말했다.
“우리가 이겼다. 남김없이 다 죽여라.”
그러자 기사들과 상비군들이 함성을 지르면서 창과 검을 더욱 힘차게 내찔렀다.
“와!!! 와!!!”
그에 반해서 글라토스 기사들의 검은 더욱더 힘을 잃었고 휘두르는 팔이 어지러워졌다.
모두들 몸을 빼서 전장을 이탈하려고 했다.
하나둘씩 적의 기사들이 말에서 떨어지고 이제 전황이 완전히 기울었다고 판단한 제라린은 급하게 근처에 있는 기사들을 모았다.
“켄스, 글랜, 토마스는 나를 따르라.”
“옛!”
상비군의 도움을 받아서 적 기사를 처리한 그들이 급하게 말을 몰고 이미 달리는 제라린의 뒤를 따랐다.
제라린은 기세를 잃은 적의 상비군의 중앙을 다시 돌파했다.
제라린과 기사 3명이 중앙으로 거칠게 내달리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글라토스의 상비군들이 마침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제라린의 눈에 글라토스 자작가의 상징인 가시나무 새의 상징을 단 체인 메일을 입은 중년의 남자가 기사 두 명의 호위를 받으면서 서둘러서 도망가는 것이 보였다.
“네 이놈, 글라토스 자작. 게 섰거라.”
말을 달리면서 고함을 치지만 자작은 대답도 없이 전력으로 도망갔다.
제라린과 기사들이 서둘러서 그의 뒤를 쫓았지만 3번의 기사대전과 그 이후의 전투에서 피로한 제라린의 말과 역시나 전투로 피로한 다른 기사들의 말로는 그들을 쫓아갈 수가 없었다.
그들이 점점 멀어져서 마침내 시야에서 사라지자 제라린은 그들의 뒤를 쫓는 것을 포기했다.
“젠장, 영주성에 들어가서 농성전을 하면 곤란한데…….”
농성전에 대해서 우려하는 제라린에게 옆에 있던 켄스가 위로했다.
“걱정 마십시오. 소영주님. 적의 기사들을 대부분 죽이거나 사로잡았으니 별다른 저항을 못할 겁니다.”
이윽고 좀 전의 전장으로 복귀한 제라린에게 전장의 뒷정리를 지휘하던 앨버트가 말을 달려와서 보고했다.
“소영주님, 적의 기사들은 4명이 달아났습니다. 각기 북쪽과 남쪽으로 달아났는데 그 외에는 모두 죽이거나 잡았습니다. 총 5명을 죽였고 9명을 사로잡았는데 그중에 4명은 아마 오늘을 넘기기 힘들 거 같습니다.
반면에 아군 기사들은 두어 명이 상처를 입었지만 그 외에는 모두 무사합니다. 다만 종기사들은 7명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흩어진 적의 상비군과 징집병들도 병사들이 사로잡고 있었지만 기사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앨버트는 먼저 기사 전력부터 보고를 했다.
아직 상비군에 대한 확인은 이루어지지 않은 거처럼 보였다.
5. 글라토스 영지의 합병(1)
제라린이 다시 진열을 정비하여 글라토스 자작의 영주성으로 향했다. 그는 병사들의 행군 속도에 맞추어서 이틀 만에 영주성에 도착했다.
글라토스 영지의 영주성은 가로 세로 약 50미터가량의 돌로 만들어졌다. 확실히 돌과 흙을 섞어서 만든 제라린의 영주성보다 크고 단단했다. 성벽의 높이는 약 6∼8미터였고 곳곳에 망루가 세워져 있었다. 튼튼한 나무로 만들어진 성문은 이미 굳게 닫혀 진 뒤였다.
겨우 도망쳐 온 글라토스 자작은 원래 성에 남겨 두었던 100명의 상비군과 역시 도망쳐 온 100여 명의 상비군으로 수비를 시작했다.
자신을 호위하면서 같이 도망친 기사 2명과 뒤늦게 말을 타고 탈출한 기사 4명이 있어서 어느 정도 안심한 글라토스 자작은 급하게 둘째 아들 데이빗을 주노 자작의 영지로 구원을 요청하기 위해서 보냈다.
남부 최대의 용장이라는 주노 자작이 수도에 있지만 그와 자신의 친교를 감안할 때 영주 대리가 바로 기사와 병력을 빌려 주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그리고 영주성 근처의 영지민들을 최대한 많이 징집했다. 이미 20세 이상 40세 미만의 남자들을 데리고 나갔다가 격멸되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16세 이상 50세 미만의 남자들을 모조리 끌어 모았다.
이대로 5일만 시간이 더 지나가거나 주노 영지군이 구원을 오면 이번 영지전을 끝낼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제라린군은 저녁 무렵에 글라토스 영주성 앞에 도착했고 징집병들이 숙영지의 건설을 시작했다. 그리고 상비군들은 징집병들이 운반해 온 사다리를 영주성 앞에 나란히 늘어뜨리고 바로 성을 공격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400명의 상비군들이 영주성에 앞에서 공격 채비를 갖추자 영주성 내에서도 긴장한 상태가 되었다.
제라린은 병사들을 이끌고 여러 번 공격하는 척을 하다가 그대로 물러나서 병사들에게 저녁을 먹이고 쉬게 했다.
자정이 조금 넘은 무렵 갑작스러운 함성에 글라토스 영주성의 경계병들이 전 병력을 깨웠다. 자다가 급하게 일어나서 허겁지겁 롱소드를 허리에 차고 문루에 올라선 글라토스 자작은 곳곳에 놓인 횃불로 성 밖이 대낮같이 보였다. 그리고 횃불 사이로 래더아머를 입은 율리우스 영지의 상비군이 사다리를 세우고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 주위로 말 탄 기사들도 서너 명이 보였다.
글라토스 영지군은 전 병력이 일어나서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하지만 한 시간, 두 시간이 흘러도 적의 공격이 시작되지 않았다.
어느덧 동이 떠오르고 그때까지 공격하는 시늉을 한 율리우스 영지군은 그대로 숙영지로 돌아갔다.
율리우스 영지군의 숙영지에서는 서로 옷을 바꿔 입는다고 분주했다.
밤새 래더아머를 입고 창을 들고 공격 흉내를 낸 병사들은 징집병들이었다. 상비군들은 숙영지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서너 명의 기사로 보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종기사들이 대신 체인 메일을 입고 징집병들을 지휘했던 것이다.
해가 완전히 뜨고 다시 율리우스 영지군이 다가오자 영주성 내의 병사들도 정신을 차리고 경계를 하기 시작한다. 졸음을 느낄 사이도 없이 바짝 긴장했다.
낮에도 율리우스 영지군은 공격하는 척만 하고 실제로 공격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눈앞에서 적의 창칼이 오락가락했고 글라토스 영지의 기사들도 병사들 곳곳에서 경계를 늦추지 말 것을 독려했기에 글라토스 영지군은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다시 밤이 되고 대부분의 글라토스 영지군은 졸린 나머지 선 채로 꾸벅꾸벅 졸았다.
하지만 어느새 래더아머를 입은 율리우스 영지군의 징집병들이 밤새도록 공격하는 흉내를 내자 전원 취침도 하지 못한 상태로 성벽 위에서 밤을 새우게 되었다.
“와!!! 와!!!”
간간히 율리우스 영지군들이 함성을 내지르면서 서너 명씩 사다리를 들고 성벽 쪽으로 뛰어온다. 그러다가 다시 후퇴하지만 그럴 때마다 글라토스의 병사들은 움찔거리며 긴장을 했고 밤새도록 반복이 되자 모두들 지쳤는지 적이 가까이와도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기사들도 밤새도록 병사들을 독려했고 적들이 제대로 된 공격을 하지 않자 어느 정도 나태해졌다.
여기는 율리우스 영지군이 주로 공격하는 동쪽 성벽의 반대쪽인 서쪽 성벽.
상비군이 워낙 적었기에 제라린은 성을 모두 포위하지 않고 동쪽에 정예병과 대다수의 징집병을 두었고 서쪽에는 단지 징집병 300명만을 두고 견제만 했다.
글라토스 자작도 서쪽에는 래더아머를 입은 상비군도 없이 일상복을 입은 잡병 300명이 창 대신 봉을 들고 있자 이쪽에 있던 대부분의 병력을 동쪽으로 돌린 상태였다.
동이 틀 무렵, 충분한 휴식을 취한 상비군 300명이 이곳으로 왔다.
이들은 징집병처럼 보이기 위하여 래더아머를 벗고 봉을 든 상태였다. 그들 틈에 역시 체인 메일을 벗고 일상복만 걸치고 봉을 든 제라린과 몇몇 기사들이 보였다. 성에서 보기에는 전부 잡병들로 보였다.
동쪽에서는 래더아머를 입은 상비군 100명과 역시 래더아머를 입고 상비군 흉내를 내는 잡병 300을 비롯한 나머지 징집병들이 공격 준비를 했다.
이제 이들은 실제로 사다리를 성벽 위로 걸치고 올라가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성 안에서는 더욱더 긴장을 하면서 몇 안 되는 궁병들이 마구 화살을 날렸다.
서쪽 성벽 위의 병사들이 선 채로 꾸벅꾸벅 조는 모습을 본 제라린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그의 근처에는 병사 300명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제는 실제로 성을 공략할 차례였다.
“모두들 들으라. 제일 먼저 성벽에 올라간 자에게 10골드를 내리겠다. 공격! 공격!”
위로 든 봉을 앞으로 내리면서 제라린이 ‘공격’을 외치자 병사들이 일제히 사다리를 성벽에 걸치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실제로 병사들이 사다리를 타자 수비군들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성 위에서 방어를 시작했다.
제라린도 봉을 하나 잡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하지만 아무리 민첩한 제라린이라고 해도 약 8년 혹은 10년 이상의 병사들의 봉급이 걸린 성벽 공략을 제일 먼저 할 수는 없었다.
상비군이건 징집병이건 모두들 목숨을 도외시한 채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어떤 이는 손으로 사다리를 잡지도 않고 그대로 발로 밟기만 하면서 뛰어올라가는 병사도 있었다.
성벽 위에서도 필사적으로 봉과 창으로 기어오르는 공격군들을 밀어 떨어뜨렸다.
“으악!”
“켁!”
성벽에 거의 다다른 몇몇 병사들이 비명과 함께 밑으로 떨어졌다.
운 좋은 병사들은 다른 병사의 위로 떨어져서 팔과 다리에 찰과상을 입었다. 하지만 어떤 이는 바로 바닥에 떨어져서 장출혈을 일으키거나 팔과 다리가 꺾였다. 가장 운 나쁜 이들은 아군이 잡고 있는 봉 위로 떨어져 봉에 몸이 꿰인 경우였다.
하지만 더 많은 병사들이 올라갔다.
떨어진 병사들 다음에 올라간 병사들이 사다리의 제일 윗부분까지 올라가서 봉을 들고 성벽의 적들과 싸웠다.
공격군은 필사적으로 성벽 위에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서 사력을 다했고 수비군은 절대 성벽위에 자리를 내어 주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을 쳤다.
제라린도 사다리의 거의 윗부분에 올라가서 봉으로 수비군과 싸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