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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라린 1(13화)
5. 글라토스 영지의 합병(2)
제라린이 성벽에 걸쳐진 사다리의 윗부분에 서서 왼손으로 사다리를 잡고 오른손으로 봉을 휘두르고 있었다.
부웅.
빠르게 휘두르자 봉이 잔상을 남겨서 휘어 보였다. 또한 바람을 가르는 소리도 났다.
성벽에 기대어서 밑으로 찌르는 적을 보고는 제라린이 봉을 힘차게 앞으로 찔렀다.
“켁!”
가슴을 맞은 적이 피를 토하면서 뒤로 쓰러졌고 그가 서 있던 자리는 비게 되었다.
그때 성벽의 다른 쪽에서 누군가가 크게 외쳤다.
‘소영주님. 소영주님. 저 쿤타입니다. 제가 제일 먼저 성벽에 올라왔습니다.’
제라린이 소리가 난 곳을 힐끗 바라보니 다른 상비군 병사보다 한 뼘 정도는 더 큰 병사가 성벽 위에서 봉을 휘두르면서 자신이 제일 먼저 올라왔다고 고함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등 뒤에 있는 사다리로 다른 병사들도 계속 올라가서 그가 지키는 영역에서 같이 싸우기 시작했다.
제라린이 다시 정면을 바라 봤다. 여전히 앞의 공간은 비어 있었다.
성벽에 걸쳐진 여러 개의 사다리에서 동시에 치고 올라갔기에 수비병들이 아직까지 여기에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다.
제라린이 높이 점프를 하면서 성벽의 빈 곳에 착지를 했다. 그리고 봉을 커다랗게 휘둘러 좌우를 쓸면서 외쳤다.
“그래, 쿤타가 제일 먼저 올라왔다. 10골드는 쿤타의 것이다.”
제라린이 봉을 좌우로 거칠게 휘두르자 다시 봉이 휘어진 듯 보였다.
주위에서 함성이 울렸다.
“와!!! 와!!!”
이제 여러 군데의 사다리에서 병사들이 속속 올라왔다.
제라린도 자신이 만든 공간을 더 넓히면서 앞으로 전진했다. 그의 뒤에는 새로 올라온 병사들이 공간을 메웠다.
제라린이 오른 손으로 병사들이 쓰는 봉을 휘두르니 너무 가볍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쓰러진 수비병의 봉을 하나 더 집어 들었다. 이것도 역시 나무로 만들어진 약 2미터가량의 봉이었다. 제라린이 봉을 양 손에 하나씩 잡고 위아래로 빠르게 돌렸다.
붕∼ 부∼웅.
봉을 뒤에서 어깨 위로 앞으로 빠르게 내리 찍었다.
그리고 다시 뒤로 뺐다. 빠르게 돌리듯이 휘저으니 봉의 잔상이 남아서 바퀴처럼 보였다.
저항하는 수비병들의 머리 위로 봉을 내리 찍었다.
“켁! 크헉!”
그들의 머리가 갈라지고 피와 뇌수가 터졌다.
어깨가 찢어지고 그 부위를 팔로 감싼 수비병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와!!! 와!!!”
“만세! 만세!”
어느새 백 명 이상의 병사들이 성벽 위로 올라왔다.
동쪽 성벽에서도 드디어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서쪽에서 들린 만세 소리에 동쪽에서도 본격적으로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동쪽의 수비군들은 당황해서 전열을 흩뜨렸다.
“켄스, 글랜. 나를 따르라!”
제라린이 양손에 봉을 들고 그대로 영주성을 가로질러서 동쪽 성벽으로 향했다.
켄스와 글랜이 상비군 200을 이끌고 그 뒤를 급히 따랐고, 나머지는 남아서 전장 정리를 시작했다.
서쪽 성벽을 타고 넘어온 제라린 등을 보자 곳곳에서 수비군들이 창을 던지고 항복을 했다.
기사들도 전의를 잃은 듯이 보였다.
제라린이 성벽에서 지휘하던 글라토스 자작에게 바로 달려가서 그의 목에 봉을 갖다 대었다.
그는 두려움에 가득 찬 눈으로 칼을 떨어뜨리고는 고개를 숙였다.
“와!!! 만세!!!”
몇몇 기사들과 병사들이 전장 정리를 하고 제라린은 영주관으로 들어갔다.
영주관으로 향하는 길에는 주먹만 한 돌들이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고 곳곳에 시체들이 널려 있어 지금 막 전투가 끝난 상황을 잘 보여 주었다.
영주성 정중앙에 세워진 영주관은 율리우스 영지의 영주관과 달리 돌로 만들어진 2층짜리 건물이었다. 간단한 방어전을 감안하여 만들어진 듯이 창들의 크기가 작고 튼튼한 나무로 만들어진 출입문이 있었다. 하지만 백작급 이상의 고위 귀족의 석성과 같은 완전히 독립적인 내성은 아니었다.
제라린은 앨버트, 글랜 등을 거느리고 영주관 내의 홀로 들어갔다. 홀의 정중앙에는 푹신한 가죽이 놓인 커다란 의자가 덩그렇게 놓여 있고 벽에는 롱소드, 숏소드, 방패 등으로 장식되어 있다.
한쪽 벽은 벽난로가 설치되어 있는데 아직 추운 날씨가 아니어서 불을 땐 흔적은 없었다.
제라린이 전후 처리를 위해서 글라토스 자작을 비롯한 포로들을 불렀다.
먼저 글라토스 자작부터 입을 열었다.
“제라린, 나는 네 큰애비이다. 서, 설마 나를 죽이지는 않겠지?”
비굴한 목소리로 애원하는 그를 보면서 앨버트가 그의 석방을 요청했다.
“그렇습니다. 소영주님. 비록 아무리 그가 흉악한 일을 저질렀다고는 하나 소영주님의 큰아버님이십니다.”
말없이 지켜보는 다른 기사들도 앨버트와 같은 생각을 하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모습을 보던 제라린 고민을 하다가 말했다.
“당신이 율리우스 남작을 독살하지 않았소? 아니면 그렇게 건강하다던 분이 하루아침에 죽을 수는 없을 것이오.”
순간 무릎을 꿇고 있던 글라토스 자작의 기사와 문관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자작은 잠시 흠칫하다가 다시 비굴한 목소리로 자신의 혐의를 완강하게 부인했다.
“나, 나는 아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할 리가 없지 않느냐?”
잠시 많을 끊었던 자작이 이번에는 약간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더구나 이미 십여 일이 지나서 시체가 섞기 시작했는데 어떻게 증거를 찾을 수가 있겠니?”
옆에 있던 앨버트 기사대장이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소영주님. 영주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이삼 일 내에 검사를 했더라면 독살 여부를 알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시간이 너무 지났습니다.”
제라린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음… 이자를 고문을 해서라도 자백을 받아 내어야 하는가? 아니면 하인이나 하녀들을 조사해야 하는가? 하긴 이미 영지를 빼앗긴 처지에 더 이상 위협은 될 수 없을 것이야. 저자와 그 일가들은 그냥 추방을 시켜야겠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제라린은 바로 글라토스 자작 일가의 추방을 명했다.
그리고 제라린은 글라토스 자작의 기사들과 문관들에게 흥미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인재가 너무나 부족한 제라린이었기에 최대한 많은 인재의 확보가 필요했던 것이다.
더구나 클래치스 남작의 기사였던 홉과 제킨스의 임용을 성공했던 터라 제라린의 자신감은 좀 더 높아졌다.
“이제 글라토스 자작은 이 영지에서 추방되었소. 모두들 대략적인 사정을 알겠지만 그는 자신의 동생인 율리우스 남작을 독살했소. 정확한 증거는 없지만 주변 상황이 그렇소. 그러니 그런 흉악한 자를 떠나서 나를 도와서 영지를 발전시켜 주시오.”
제라린의 말이 끝나고도 모두들 한동안 말없이 묵묵히 있었다. 그러다가 그중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약 50살 정도의 노기사가 입을 열었다.
“소영주님. 저는 글라토스 자작님이 그런 나쁜 짓을 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그분이 그런 일을 했다면 그것은 그분을 잘못 모신 저희들의 불찰이 큽니다. 하지만 이제 영지를 잃고 여기저기를 떠돌 그분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그분을 뒤따라가겠습니다.”
그러자 모두들 그의 말이 자신의 생각과 같다며 동의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제라린은 당혹해했다.
‘음… 이 세계의 가신들은 보통 이렇게 충성심이 강한가? 아니면 나에게 매력이 없어서 그런 건가?’
그러다가 3명의 문관 중에 하나가 눈알을 돌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재빨리 말했다.
“영주님, 저는 영주님을 따르겠습니다.
40대 초반의 염소수염을 가진 사무엘이라는 자였다. 무릎을 꿇고 있던 글라토스 자작의 기사들과 다른 문관들이 그에게 경멸의 눈빛을 보냈다.
사무엘은 그들의 시선을 견딜 수가 없었는지 고개를 숙이면서 글라토스 자작의 험담을 시작했다.
“솔직히 글라토스 자작님이 클래치스 남작에게 모략을 걸었거나 율리우스 남작님을 독살한 것은 무척 나쁜 일입니다. 아무리 증거가 없다고 하더라도 이미 귀족의 명예를 버린 그분을 저는 더 이상 모실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음흉한 글라토스 자작님을 벗어나 영명하신 영주님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은 저에게 크나큰 광영입니다.”
사무엘의 말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기에 그에게 경멸의 눈빛을 보내던 다른 사람들도 이내 체념했는지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하지만 자신들의 결심을 바꾸지는 않는 단호한 모습을 보였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제라린은 그들에 대한 설득을 포기하면서 아쉬워했다.
‘음… 이번에는 내가 너무 성급했구나. 저들에게 한평생 충성을 다한 영주였을 텐데… 내가 좀 더 세심하게 접근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구나.’
영주성 밖으로 글라토스 자작의 일가가 마차와 수레를 끌고 나가고 있었다. 그의 기사들과 제라린이 고용한 용병들이 행렬을 호위했다.
성벽 위에서 그 모습을 보던 제라린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음… 글라토스 자작은 이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율리우스 남작 시절부터 왕래가 빈번하여 이곳 영지의 사정을 잘 아는 앨버트가 대답했다.
“아마 서쪽으로 갈 겁니다. 그곳에 글라토스 자작님의 사돈이 있거든요.”
‘음… 이곳 영주들은 혼맥으로 인해서 그래도 비빌 언덕은 있는 모양이군. 이렇게 영지를 잃고 쫓겨나도 그들을 받아 줄 친척이 있으니…….’
그때 말을 타고 가던 글라토스 자작이 몸을 돌려 성벽 위의 제라린을 노려봤다. 홀에서 보였던 비굴한 모습이 아닌 분노에 찬 모습이었고 꽉 깨문 입술 밑으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거리가 멀어서 옆에 있는 앨버트는 그 모습을 보지 못했지만 제라린은 확대해서 그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확실히 나중에 후환이 될 거 같은데… 밤에 도둑으로 가장해서 확 쓸어버릴까? 음… 아직까지는 경거망동을 하지 말자. 이제야 겨우 영지를 안정화시켰는데 저들이 길을 가다가 갑자기 피살되면 나를 의심할 거야. 지금은 자중할 때다.’
그날 바쁘게 전후 처리를 하던 제라린은 저녁에 영주관의 홀에서 안토니를 불렀다. 영지 내의 일 외에도 수도에 영지 승계와 두 번에 걸친 영지전의 결과에 대한 보고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홀에는 원래 커다란 의자 하나만 있고 가신들은 서서 글라토스 자작의 말을 들었는데, 제라린이 커다란 직사각형 테이블과 의자를 들여 놓아서 제라린뿐만 아니라 그와 얘기를 나누는 가신들도 편하게 앉아서 얘기를 할 수 있도록 배려를 했다.
“그래, 이번에 수도로 올라가서 수고를 좀 해 주시오.”
“예, 소영주님. 국왕 전하와 귀족원에 잘 보고하겠습니다.”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는 안토니를 보고 제라린은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그는 아직 이곳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는 것이다.
“갔다가 영지로 다시 돌아오는데 얼마나 걸리겠소?”
“예, 수도로 가는 길은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말을 타고 육로로 가는 방법과 이 영지의 경계를 따라 흐르는 아센 강을 타고 올라가는 방법이 있는데, 육로를 이용할 경우 약 이십 일, 수로를 이용할 경우 약 십오 일 정도가 걸립니다. 수도에서 영지로 귀가할 때 수로를 이용하면 내려오는 물살 때문에 약 칠팔 일 정도면 귀환할 수 있습니다.”
“그래요? 그러면 수로를 이용하면 갔다 오는데 총 이십이삼 일이면 충분하겠군.”
짐작하는 제라린의 말에 안토니가 맞장구를 쳤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수도에 머무는 시일까지 생각하면 약 한 달 정도가 걸릴 걸로 예상됩니다.”
그렇게 안토니를 떠나보낸 제라린에게 사무엘이 장부를 들고 와서 영지에 대한 전반적인 보고를 했다.
“영주님, 이곳 글라토스 영지는 영지민이 약 9만 명 정도이고 지금 장부상 남은 예산은 약 천 이백 골드 정도입니다. 하지만 곧 추수를 통해서 세금을 걷을 수 있기 때문에 재정 상태는 양호한 편입니다. 영지민 대부분은 농사를 짓고 있고 밀 이외의 특산물은 없습니다. 그리고 아센 강을 따라 수도와 하구의 라르고 시티를 오가는 상인들이 있습니다. 이들 때문에 상업은 약간 활발한 편입니다.”
원래부터 이곳에서 일하던 문관이었기에 사무엘은 영지의 사정을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보고를 하면서도 간간히 글라토스 자작에 대한 나쁜 점들을 말하는 그를 보면서 제라린은 내심으로 그를 경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음… 확실히 표리부동한 자인 듯하다. 지금은 인재들이 너무 없어서 그냥 쓰지만, 경계를 늦추어서는 안 되겠군. 전 영주를 따라간 자들은 충성심이 확인된 자들이고 이렇게 나에게 넘어온 자들은 충성심이 의심되는 자들이라… 정말 진퇴양난이군.’
하지만 제라린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으면서 사무엘에게 지시를 했다.
“그래, 저번 전투에서 붙잡힌 글라토스 영지의 징집병들은 빨리 풀어 줘서 이번 추수에 지장이 없도록 하도록 하시오.”
“예, 영주님. 걱정 마십시오. 모두들 제집으로 보내서 추수에 한 치도 소홀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제라린이 조금 전부터 고민하던 일을 결정하고는 사무엘에게 덧붙였다.
“그리고 현재 율리우스 영지나 클래치스 영지에 제대로 된 문관이 없소. 고작해야 세금을 걷는 세금징수원들이 몇몇 있을 뿐이오. 사무엘 경이 그들까지 관리하면서 세 영지의 행정을 맡아 주시오.”
제라린의 말이 자신의 승진을 뜻하는 걸로 받아들인 사무엘이 허리를 깊숙이 굽히면서 열정적으로 대답을 했다.
“영, 영주님. 가, 감사합니다. 절대 영주님을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기뻐하는 사무엘을 밖으로 내보내고 제라린은 혼자 고민에 빠졌다.
‘음… 빨리 인재들을 모아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