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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라린 1(14화)
6. 군제 개혁(1)


어느덧 밤이 되었고, 하녀가 홀에 양초를 켜 놓았다. 일렁거리는 촛불을 보면서 제라린은 상념에 빠졌다.
‘휴… 이제야 좀 안심이 되는군. 갑자기 이동?? 워프?? 아무튼 알 수 없는 현상 때문에 이쪽으로 왔는데 오자마자 영지전을 치르고… 거기에서 졌으면 바로 죽었거나 이 세상에서 떠도는 신세가 되었겠지. 음… 지구로 돌아갈 수 있을까? 나는 거기서 싸워야 하는데… 전세는 어떻게 되었을까? 잘 싸우고 있을까?’
한동안 지구의 일을 걱정하던 제라린이 이번에는 이곳에 오자마자 만났던 원래의 제라린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그 아이가 너무 불쌍하군. 탑에서 갇혀서 자라다가 세상의 빛도 보지 못하고 바로 죽어 버리다니… 그리고 내가 온 세상의 자유, 평등, 평화를 이 세계에 심어 달라고 하다니…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에게 무슨 능력이 있어 그런 위대한 일을 한단 말인가?’
밤은 깊어졌지만 제라린의 상념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휴… 뭐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은 나를 지키는 방향으로 먼저 움직이자. 그렇게 하기 위해선 먼저 여기의 비효율적인 군사 제도부터 뜯어 고쳐야 한다. 그래야지 나와 여기 영지를 지킬 수 있다.’
그동안의 영지전 경험과 앨버트 등으로 부터 들은 정보를 바탕으로 제라린이 파악한 이쪽 세계의 전투 형태는 무척 단순했다.
기사가 모든 무력의 최고봉이고 각 영주들 간의 무력은 이들 기사의 숫자와 능력에 따라 좌우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영주들은 기사들을 무척 우대했고 이들에게 높은 월급이나 봉토를 제공했다.
그리고 영주가 월급을 주고 고용한 상비군이 있었는데 대부분 긴 창이나 칼과 방패를 든 보병이었다. 이들은 비록 기사에 비해서 뒤지지만 대다수의 병력을 차지하고 있는 만큼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평상시에 영주성과 주요 군사 요충지, 영주의 창고에 대한 경계를 섰고, 전투에서는 주요 전력이 되었다. 말을 탄 기사의 돌격에는 약하지만 보병 여럿이 뭉쳐서 기사가 탄 말의 속도가 떨어지면 사방에서 공격하여 기사를 잡는 경우도 있었다.
얼마 전에 제라린이 글라토스의 상비군을 홀로 돌파한 것은 그 전의 기사대전을 본 상비군들이 제라린에게 겁을 먹었고 또, 제라린의 능력이 뛰어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백작 이상의 고위 귀족들은 기병대와 궁병대를 운영하고 있다. 기병대는 돈이 많이 들어가지만 그래도 보병들에 대해서 우위를 보이기에 고위 귀족들은 일반 보병보다는 기병대를 선호했다.
마지막으로 궁병대가 있는데 이쪽 세계에서는 활에 대한 기술의 발전이 늦어서 사거리가 100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관통력도 많이 낮았다. 그리고 병사들이 활을 다루는 걸 배우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기에 영주들은 궁병대를 선호하지 않았다. 그래도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 따로 궁병대를 운용하는 고위 귀족들도 있었고 수성을 할 때 망루 혹은 성벽 위에서 활을 쏘면 그나마 효과적이었기에 아주 없지는 않았다.
또한 농민들로 이루어진 징집병들이 있으나 이들은 단지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서일 뿐 전력에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음… 당장 화약 무기를 개발할 수는 없고 앞으로 상당 기간 이렇게 칼과 창으로 싸워야 하는데 어떤 제도가 좋을까? 이쪽 세계는 기사와 상비군이 중심이고 백작급 이상의 영지에는 기병대와 궁병대도 있다. 이 시대에 가장 효율적인 제도는 어떤 걸까?’
지구에 있을 때에도 항상 전략과 전술에 대해서 공부하고 고민했던 제라린이었기에 그의 머리와 나노 컴퓨터 속에는 몇 천 년 동안 발전된 지구의 여러 가지 군사 모델들이 들어 있었다.
‘확실히 병사들의 수가 중요하지. 근대 이래에 군사학의 진리라고 불리던 렌체스터 제1, 제2법칙도 있듯이… 하지만 그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다. 총을 사용하게 된 이후 전력의 중심인 보병들은 일주일만 훈련을 받으면 일 년을 훈련받은 병사와 비슷한 사격술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그렇게 수가 중요했던 거지.’
제라린은 화약 무기가 나오기 이전의 전쟁과 전술에 대해서 생각을 집중했다.
‘냉병기를 사용할 경우에도 수는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무장도와 훈련도 그리고 진형이 중요하다. 고구려와 로마는 항상 자신보다 많은 상대와 싸워서 이겼다. 그것도 매우 적은 피해만을 받았을 뿐이다. 여기에는 사방으로 대영주들이 있는데 그들과 혹시 싸우더라도 병력으로는 이길 수 없다. 정예 병사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
제라린은 이번에는 이 세계에서의 전력의 핵이라는 기사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가진 기사들의 숫자는 무척 적다. 이들을 단시간 내에 늘릴 수 있을 거 같지는 않다. 그러면 기사들을 막을 정도의 보병들이 필요하다.’
자신이 글라토스 영지의 상비군들을 단신으로 돌파하던 때를 떠올리며 제라린은 계속 생각에 잠겼다.
‘지금의 보병들은 기사들의 돌격에 매우 취약하다. 하지만 보병들도 제대로 훈련을 받기만 하면 말 탄 기사들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보병이라… 보병…….’
여러 보병대의 형태에 대해서 고민을 하던 제라린은 마침내 고대에 뛰어난 활약을 보였던 로마의 중장보병대를 모델로 삼기로 결심했다.
‘그래, 로마의 중장보병이 적합하겠군. 그들은 항상 적은 수로 많은 적들을 물리쳤다. 그리고 자신들이 받은 피해도 무척 적었지.’
그러면서 이번에는 기병대에 대해서 생각을 한다.
‘음… 하지만 로마는 뛰어난 중장보병을 가진 것에 비해서 기병대의 활용은 많이 낮았지. 로마의 장군이었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기병대를 적극 활용했었고 후대의 로마 장군들도 기병대를 활용했었지만 동양처럼 기병대를 다양하게 사용하지는 못했다.’
제라린이 기병들을 생각하다가 이번에는 동양 쪽으로 생각이 미쳤다.
‘특히 아시아 최강이라는 고구려의 기병대는 그 효용이 무척 뛰어났다. 2013년에 발굴되어서 고증된 고구려 기병들의 편제와 전술은 동시대뿐만 아니라 후대에서도 상대할 기병 집단이 없었지. 징기스칸의 몽골군이 있기는 했지만 그들은 경기병으로만 구성되어 있기에 철갑기병과 궁기병들을 적절하게 사용한 고구려와 같은 복합적인 작전은 할 수가 없다. 기병대는 고구려를 모델로 삼아야겠군.’
그렇게 결론을 내린 제라린은 로마의 중장보병과 고구려의 기병대를 주축으로 이쪽 세계에 가장 적합한 형태로 변형을 시켰다.
‘음… 기병대는 몇 년씩 말을 타고 무기를 휘두르는 연습을 해야 한다. 지금 당장 일반인들을 뽑아서 쓸 수는 없다. 역시 종기사들을 사용해야 하는가?’
제라린은 종자들의 수가 적인 서류를 뒤적여서 종자들의 수를 확인했다.
율리우스와 클래치스 영지의 종자들 중에 저번 전투에 참여했던 20세 이상의 종기사들 중 7명이 죽거나 다쳤지만 여전히 약 십여 명가량의 종자들은 남아 있었다. 그리고 글라토스 영지의 종자들도 몇몇은 글라토스 자작을 따라갔지만 약 사십여 명가량이 남아 있었다.
기사들은 글라토스 자작에게 충성을 맹세했기에 그를 따라갔지만 평민 출신의 종자들은 가족을 버리면서까지 그를 따라갈 의무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종자들은 아버지가 기사이거나 기사가 될 자질이 있는 평민 출신이 많다. 그래서 그런지 확실히 보통 병사들보다는 전투 기술이 월등히 좋아. 이들 중 20살 이상을 대상으로 기병대를 편성해야겠군. 그리고 20살 이하의 종자들도 그전처럼 기사들의 시중을 들면서 전투 기술과 예절을 배우는 건 너무 비효율적이야. 대부분의 시간을 기사들의 시중을 드는데 소비하니까… 그리고 담당 기사의 기량과 훈련 방법에 따라서 종자들의 기량도 천차만별이다. 그러므로 이들을 한데 모아서 교육을 시키는 게 훨씬 효율적이다.’
그렇게 제라린은 기존에 한 기사에게 서너 명씩 배속된 종자들 중에서 14∼16세는 그대로 두고, 17∼20세까지는 아카데미를 만들어서 담당 기사를 지정하고 그에게 공통으로 전투 기술을 연마하도록 했다. 그리고 20세 이상 대략 23∼24세 전의 기사 시험을 앞둔 종자들은 따로 모아서 기병대를 창설했다. 이들의 인원은 대략 사십여 명이었다.
이렇게 제라린이 조직을 개편하고 기병대의 교육 담당자는 켄스, 그리고 아카데미의 교육 담당자는 글랜을 임명하는 서류를 작성하는데 어느새 밖에서 동이 트고 있었다.

아침에 해당 기사들에게 해야 할 일을 지시하고 잠이 든 제라린, 정오를 조금 넘긴 무렵에 일어나서 간단하게 식사를 한 다음 기병대가 교육받는 연무장으로 갔다.
영주관 바로 앞에 있는 연무장은 넓은 공터로 주변에 각종 검과 창, 목검들이 받침대에 걸쳐져 있었다.
연무장의 제일 앞에 켄스가 있었고 약 사십여 명가량의 종기사였지만 이제는 기병이 된 청년들이 그 앞에 도열해 있었다.
그들은 전원 손에 활을 들고 있었는데 그들 중의 하나가 막 불만을 표시하고 있었다.
“아니 켄스 기사님. 곧 기사가 될 우리들이 왜 궁술을 연습해야 합니까? 말을 타고 창과 검을 휘두를 시간도 부족한데 굳이 이런 잡술을 연습해야 하는지 의문입니다.”
제라린이 아침에 지시한 대로 켄스가 기병대를 훈련시키고 있었는데 이 시대의 고정적인 관념을 가진 기병들이 오후에 시작한 궁술 연마에 대해서 반발을 하는 것이었다.
질문을 받은 켄스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명령을 받은 대로 기병들에게 말타기, 창, 검 사용법 외에 궁술도 훈련 일정에 포함시켰지만, 그 자신도 종기사 시절 궁술을 연습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막 무어라 대답하려는 켄스에게 제라린이 손을 들어서 제지하면서 앞으로 나섰다.
“질문 잘했다. 앞으로 본관의 기사는 창과 검뿐만 아니라 활도 잘 다뤄야 한다. 기사 시험에 궁술도 추가할 것이다.”
갑자기 나타난 제라린에게 모두들 황급히 예를 표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의문이 풀리지 않는지 조금 전에 질문한 자가 계속 질문했다.
“예? 소영주님, 하지만 화살의 사정거리는 기껏해야 약 100미터이고 기사들의 갑옷을 못 뚫습니다. 겨우 상비병들이나 잡병들한테나 사용이 가능할 텐데요.”
그들이 생각하는 건 기사들은 기사들로 상대해야 하는데, 겨우 화살이나 쏘면서 보병들을 잡아봐야 하나도 소용이 없다는 식이었다. 이 시대에 통용되는 일반적인 관념이었다.
하지만 제라린은 이 시대의 전술을 뛰어넘어 자신의 효과적인 전술을 만들기 위해서 기병들의 궁술이 꼭 필요했다.
“지금 장인들에게 지시를 해서 활을 개량하고 있다. 곧 사정거리가 향상되고 효과가 좋은 활이 개발될 테니 그동안 여러분들은 열심히 연습을 해서 그때를 대비해야 한다.”
단정적으로 말하는 제라린에게 다른 기병이 질문했다.
“하지만 사정거리가 늘어나도 역시 기사들의 갑옷은 뚫기 힘듭니다.”
그들에게 상세히 설명할 수 없는 제라린은 화제를 돌렸다.
“음… 앞으로 활용할 방법이 많다. 그러니까 지금은 열심히 배워 두도록… 그리고 조금 전에 그대가 말한 대로 기사들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말타기, 창, 검을 쓰는 법이다. 오늘 그대들이 그동안 열심히 훈련했는지를 시험해 보겠다.”
그러면서 제라린은 옆의 받침대에 걸쳐져 있던 목검을 잡았다. 그러자 그 주위에 있던 기병들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모두들 전투에서 보여 준 제라린의 신위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 전부터 질문을 하던 자가 앞으로 나섰다.
“소영주님, 저는 제프라고 합니다. 제가 소영주님과 대련해도 괜찮은지요?”
제프는 23∼24살 정도로 키가 크고 몸에 근육이 상당히 많은 전사 타입이었다. 곧 기사 시험을 칠 정도의 나이였고 이들 중에서 가장 실력이 좋았기에 앞으로 나섰으리라고 생각한 제라린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련을 허락했다.
제프는 목검을 들고 제라린으로부터 약 두세 걸음 떨어진 상태에서 제라린의 주위를 돌면서 약간의 탐색을 했다. 기회를 엿보던 그가 앞으로 전진하면서 목검을 머리 위로 올렸다가 아래로 베는 내려 긋기를 시도했다.
제라린은 그가 목검을 머리 위로 올리는 틈을 타서 재빨리 한 걸음 반을 앞으로 전진해서 목검으로 그의 목덜미를 겨누었다.
졸지에 머리 위로 목검을 든 상태에서 동작을 정지한 제프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목검을 드는 순간의 그 짧은 틈에 제라린이 전진하면서 그의 목에 검을 겨누었기 때문이다.
제라린은 목검을 거두면서 말했다.
“한 번 더 해 볼까?”
그제야 머리 위로 든 목검을 내리면서 제프가 말했다.
“예? 예. 다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소영주님.”
이번에는 쉽게 당하지 않을 거라는 전의를 불태우면서 제프는 좀 더 신중하게 양손으로 목검을 잡고 앞으로 내밀어서 자신의 상체를 방어하면서 제라린에게 접근했다.
몸에 빈틈을 주지 않기 위해서 좌에서 우로 살짝 찌르는 제프의 검을 보면서 제라린은 손에 힘을 잔뜩 주면서 그의 목검과 부딪쳐갔다.
‘꽝’ 하는 나무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제프가 쥔 목검은 허공으로 튕겨졌고, 그는 고통 때문에 인상을 찡그리면서 손아귀를 감싸 쥐었다.
제라린은 자신의 목검을 거두면서 주위에 있는 기병들에게 말했다.
“전투 기술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힘과 스피드다. 그중에 하나만 있어서는 안 된다. 두 개의 조화가 필요하다.”
그렇게 제라린은 기병들과 대련을 통해서 그들이 실력을 쌓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약 두 시간 정도 연무장에서 직접 화살을 쏘는 연습을 했다.
대련을 통해서 검 다루는 법을 훈련한 후에 제라린이 손수 화살을 쏘면서 연습을 하자 기병들도 더 이상 불만을 말하지 못하고 묵묵히 같이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